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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 현대 재림기-146화 (146/170)

< -- 146 회: 전쟁과 여인 그리고 과거의 향기 -- >

“……내성주님.”

남자의 말에 수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혈문의 문주는 본좌다.’

창현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연한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수연은 왠지 모르게 분한 느낌이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수연의 말에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똑똑-!

곧바로 노크가 들려왔고, 곧 몇 명의 중년인 남자와 한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수연에게 악수를 건네고 있었다.

이름만 대어도,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유명 기업들의 회장들이었다.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수연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던, 수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유명 기업들의 회장이고 또 한혈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자금을 한혈문에 투자하고 있고, 수연은 이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는 중이었다.

“내성주님의 안색이 썩 편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별 일 없었어요. 바쁘신데 모이게 해서 죄송해요.”

사과를 하고 있지만 수연의 얼굴에 미안함은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경복궁에 있는 건물 하나를 사용하고 있는 수연이었다.

외부 인사를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수연이었고, 또 한혈문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직책이기도 했다. 창현은 그녀를 배려해서 근정전만큼이나 큰 건물을 내어주었고, 수연의 위세는 그 건물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이거, 이거 요새 소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곧바로 본론을 꺼내는 남자의 말에 수연은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아직 학살 사건의 배후가 일본 잔존 세력이었던 무인들과 실버 론즈의 간부인 실비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단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한혈문이 최근 전열을 재정비하고, 론즈 가문에 관한 정보를 설난이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뜬소문이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혈문은 후원을 받는 것보다 후원을 하는 자금이 훨씬 많다.

제 1 지부가 정상화가 되고, 그 곳의 여러 가지 기술들을 대기업에게 이제는 대가를 받아가면서 팔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돈이라고는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창현에게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흔히들 사람들은 순위를 매기는 것을 좋아한다.

재력 순위로는 창현이 전 세계 1위였다.

론즈 가문 역시 천문학적인 자금을 쥐고 있지만 그들이 한 나라를 식민지화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었던 제 1 지부는 창현이 거느린 문파 중 하나였기에 그들의 수익은 고스란히 한혈문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수연의 위세가 그래서 더욱 막강한 것이다.

그녀는 한 나라의 살림을 손에 쥐고 흔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날고 기는 대기업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수연에게 공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었다. 수연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 이용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007가방을 힐끔 본 이후 말을 이었다.

“글쎄요…… 문주님께서 아직 가타부타 말이 없으셔서요. 조만간 큰 발표가 있기는 할 거에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가방을 가득 채운 돈 값을 한 것이다. 그 말 한마디로 말이다.

한국의 경제 중심은 한혈문에서 돌아가고 있고, 그 누구보다 정보에 민감한 그들이었기에 충분히 출혈을 감수 할 수 있었다.

돈 가방을 자신의 책상 뒤로 옮긴 수연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말을 잇고 있는 그 시각,

“의외야!”

“뭐가?”

창덕궁에 온 창현이 뒤에서 들려오는 설난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연이 고 계집애 많이 변한 것 같던데.”

창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과거 배교 시절에도 그런 녀석이 있었어. 너도 알고 있나?”

“아! 칠장로?”

설난은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할배는 정말 인자하고 너그러웠는데. 그래서 네가 중책을 맡겼잖아. 그 이후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렸지만. 그 때 넌…….”

“단순히 직책을 박탈하면 반발만 사게 되어있지. 이미 수연이는 권력의 맛에 취해버렸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정부라는 기관에서 높은 중책에 있었지만, 그 때와 지금은 좀 다르지. 지금은 완전무결한 권력을 손에 쥐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유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에게 전부 맡겼으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일정부분 너의 책임도 있어.”

설난의 말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창현에게 붙어 있던 윤미가 입을 열었다.

“그 어떠한 상황이라도 주군에게 반하는 행위는 용서될 수 없습니다.”

“저 얼음덩어리의 눈빛이 언젠가부터 변한 것 같은데……?”

설난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윤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창현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나는 신뢰를 주었다. 그 신뢰에 답하는 것은 그 아이의 몫이었어. 초반에 잘 해 내기는 했지만, 확실히 지금은 실망을 주고 있지.”

“그 할배처럼 처벌 할 거야?”

창현은 배교 교주 시절 칠장로의 권력을 박탈하고 손수 징계를 함으로써 혈마라는 별호에 다시 한 번 피를 더 한 적이 있었다.

“아니. 한 번 거뒀으니 안고는 가야지.”

“……여자니까 그런거지?”

“딱히 부정은 하지 않는다. 수연은 수연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그건 너희 모두 마찬가지이고. 마치 네가 떽떽 대는 것이 귀여운 것처럼.”

“……떽떽?”

“그래. 떽떽 되잖아. 어린 아이처럼.”

“야!”

설난이 이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지금도 하루 왠 종일 일만하고 있고만, 놀리기나…… 아!”

이내 설난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홱 돌렸다.

“딱, 딱히 널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난 운명에 부응하고 있는 거니까!”

“언제는 그 운명이 싫다고 하지 않았나?”

고귀한 피와 성스러운 피.

고귀한 혈통을 지닌 창현의 가문은 대대로 이 땅의 주인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성스러운 혈통은 그 고귀한 혈통의 씨를 받아 또다시 이 땅의 주인을 배출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가문이라는 것 역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으면서 얼굴도 알지 못했던 창현에 대한 마음을 키워 나가고, 그를 보필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웠던 설난이었다.

가끔 그 운명이 지독하게 싫을 때도 있었다.

교육은 쉽지 않았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두산 근처에서 스치듯 만난 창현을 보고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오히려 그 전보다 훨씬 더 노력했고, 자신만이 유일한 창현의 배필이라고 생각했었던 설난의 의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단지,

“그, 그래 멍청아! 싫어! 지독히도 싫어! 고 계집애랑 결혼해라! 지금이 그 시절도 아니고 무슨 정략결혼……앗!”

윤미는 오랜만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차갑기만 하고, 무표정 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은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가 번지자 설난은 그 의미를 곧바로 깨닫고 있었다.

“방금 하신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그, 그래! 내, 내가 너처럼 저 녀석에게 빠져서…….”

윤미는 설난을 가볍게 무시했다.

“주군, 오늘은 그만 주무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지. 오늘도 들도록 해.”

윤미가 몸을 살짝 꼬았다. 마치 설난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야! 야! 아직 보고 할 것 엄청 남았어.”

창현을 잡아 두려는 설난의 눈물겨운 노력(?)이 통했을까?

“그럼 보고 해.”

“응?”

“보고 하라고. 할 것이 있다며 각주.”

“……음, 그게…… 중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 이야기는 이미 전체 회의 때 나온 이야기였다.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인지 설난은 어느새 상황을 잊고 자신이 분석한 정보를 창현에게 말 하기 시작했다.

“배교 시절에는 소림이 최고였지만, 지금은 무당이 최고라 할 수 있어. 그 도사들을 중심으로 구파일방이 모여들고 있지. 중원의 문파는 그동안 상당한 변혁을 겪었어. 일단 근대화가 되면서 나라에서 사파와 천마교를 인정하지 않았지.”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사파와 천마교를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으니까, 자연히 구파일방은 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지.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야. 어디에선가 숨어 있겠지만. 어쨌든,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중원이 정파만이 남으면서 이제는 그들끼리의 전쟁이 된 거야. 무림을 차지하기 위한.”

“무림이라는 것이 아직도 있는 모양이지?”

“그들끼리의 세상이지. 그 이후 오대 가문과 구파일방의 권력도로 나뉘었고, 기존에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구파일방이 득세했지. 공산당 일원이 상당부분 심어져 있었거든.”

골치 아픈 것은 질색이라는 것을 설난은 알고 있기에 창현의 눈치를 슬쩍 본 이후 결론을 곧바로 꺼냈다.

“최근엔 무당파가 완벽하게 정도맹의 수장이 된 모양이야.”

“그 웃기는 짓거리를 아직도 하고 있는 모양이군.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아.”

창현이 뒷짐을 쥐고 달을 올려다 보았다.

“수 없이 변하는 것은 인간뿐이지만, 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지. 그들은 그럼 당장 가까이 있는 나부터 정리하려 들겠군. 자신의 위에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럴거야. 그렇지만 예전처럼 배교를 배척하는 명분을 가지고 전쟁을 할 수도 없고, 또 개인적으로 비무를 청해오는 낭만도 없을거야. 지금 무당파 장문인은 꽤 술수에 능하고 처세술이 뛰어난 것 같거든. 무공보다.”

“그래?”

설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세계 모든 네트워크에 침입할 수 있었고, 각국에서 취급하는 고급 정보를 제 손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실비아가 따로 마법을 걸어 놓은 론즈 가문에까지 접근할 순 없었지만 중국 국가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구파일방은 정부의 세력이었다.

정부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그 문파들 출신이었으니까말이다.

당연히 내부적인 정보를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설난은 그 곳에 침입을 해서 현재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재밌는 건 검선의 후예가 나타난 모양이야.”

“검선?”

설난이 킥킥 하고 웃은 이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창현이 네가 기억하는 그 검선(劍仙).”

“재밌는 사실이군. 그 이야기는 이제 내일 하도록 하지. 오늘은 늦었으니.”

설난이 몸을 움찔 떨었다.

창현은 부드럽게 윤미의 손을 잡았다.

“왜?”

“뭐, 뭐가?”

“보고 끝났잖아. 그 이후에는 내일 하자고.”

“…….”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꼬고 있는 윤미를 보면서 설난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철심의 무제라 불리는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창현의 앞에서는 귀여운 여인 그 자체였다. 은은한 달빛에 빛나는 수줍은 보조개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모습은 밤하늘에 피어 있는 한 떨기 꽃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새어 나오는 색기는 은색의 달이 뿜어내는 음기를 물씬 받아 남자의 욕정을 한 껏 자극하고 있었다.

창현이 사랑스럽게 윤미의 머리를 쓰다듬자 설난이 볼을 부풀렸다.

“야!”

“그럼 간다. 수고해 각주.”

이내 창현이 윤미와 함께 비원을 나섰다.

홀로 남은 설난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 하나도 아, 안부러워! 멍청이 같으니라고! 그 딱딱한 계집애가 뭐가 좋다고!”

둘 사이에 흐르는 눈빛은 무척이나 그리운 눈빛이었다.

그 시절, 간혹 지루한 일상에서 자신이 끓인 차를 마실 때 나누던 눈빛이었다.

“왜 지금은 안되지…….”

설난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내 주먹을 움켜 쥐었다.

“윤미 고 계집애와 일본에서부터 계속 붙어 다니더니 그런 거야. 나도 처 박혀서 컴퓨터만 하지 말고 같이 다니면서 일을 해야겠어!”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설난이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듯 중얼거렸다.

“따, 딱히 그 녀석의 그 눈빛을 받고 싶어서는 아니야. 내가 윤미 고 계집애보다 훨씬 예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이지.”

그 것도 역시 창현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이라는 사실을 설난은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지 이내 신나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틀림 없이 중국으로 한 번은 갈 창현이라는 사실에, 꼭 따라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작품 후기 ============================

벌을 받긴 받아야죠.

아주 큰 벌을 받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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