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 현대 재림기-123화 (123/170)

< -- 123 회: 세력 -- >

그날이 떠올랐다.

가주는 그 괴물들을 막아 내지 못했고, 결국 다른 천외천 고수가 괴물들을 쓸어버리고 일본을 구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엄청난 비난에 시달린 가주는 결국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천만의 인명 피해를 책임진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의 배를 찔렀다. 나미코는 그런 가주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술법문은 가주가 죽자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력을 고스란히 지켜 온 다른 가문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10대 가문의 위세는 그렇게 끝나 버렸다.

-더러운 년, 혼자 살아남다니.

-하긴 천한 핏줄이 어디 가나.

-하여튼 쯧쯧.

그래도 나미코는 다른 술법문 사람들처럼 도망치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기존의 중소 가문들은 한혈문과의 거래를 위해 의도적으로 10대 가문들을 정리하러 다녔다. 후쿠시마에서 태어난 괴물들보다 그들이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나미코는 그 모든 비극이 창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0대 가문의 제1목표였던 한국에 대한 침략을 방해한 것에서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독도 습격 사건 때 괴물의 눈동자를 통해 보았던 그의 비릿한 웃음을 떠올리며 나미코는 이를 악물었다.

“전부 그 자식 탓이야.”

후쿠시마의 괴물도, 한국 침략도 모두 일본 10대 가문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가주의 목표였던 일본의 지배와 한국의 식민지화를 방해한 창현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미코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술법문 사람들 중 유일하게, 가주가 끝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를 지켜 주지 않았던 사실도 모두 다 창현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죠. 그가 없었다면 애초에 독도 습격에 실패할 일도 없었고, 그 이후 서울 습격과 부산 습격도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나미코는 술법문은 물론 일본 가문의 영웅이 되었을 테니까요.”

나미코는 자신을 실비아라고 소개한 여자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눈부신 금발과 아름다운 찬란한 미소를 지닌…… 아니, 나미코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생긴 서양인 마법사의 미소와 따뜻한 말이었다.

“혼잣말이었어요.”

“날씨는 여전히 좋군요.”

“그래도……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실비아가 가만히 나미코를 끌어안았다. 인생이 거짓과 버림으로 점철되어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여자. 나미코를 품에 안으며, 실비아는 얼굴 가득 섬뜩한 표정을 흘렸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차오른 감정은 진득한 살기와 광기 그리고 희열이었다.

“나 역시 그 자식에게 꼭 복수하고 싶어요. 마치 자신이 성인군자인 척 이 세계 최강의 무인인 척하는 그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기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나미코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에요. 혈혈단신으로 그 거대한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정말 까마득했는데…… 당신 덕분에 한 줄기 희망이 보이니까요.”

따뜻한 위로와 자신의 편이라는 그 말에 나미코는 더욱더 실비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살아오는 동안 자신의 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술법문의 일원이었지만 식구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단단한 울타리를 쳐 놓았다. 만약 자신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가문의 일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10대 가문 모임에서도 변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가주가 자신을 챙겨주기는 했지만 그 역시 이상할정도로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았다. 자신이 여자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울타리의 이유는 끝내 알지 못하고 가문은 멸문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나마 교류를 하고 있었던 몇몇 무인들은 그래도 자신의 힘을 꽤 알아주는 편이었기에 이류가 되어 버린 지금도 곁에 있어주었다.

정확하게 말을 한다면 10대 가문의 수족으로 살아오다 지금은 비빌 언덕이 없어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찾아 온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나미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혈문 무인들과 최근 들어 일반인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기에 사람 자체를 피해 다니며 생활을 하다 실비아를 만났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다.

실비아는 잠시 나미코를 떼어 놓은 뒤 환하게 웃었다.

무지막지한 미모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나미코의 눈에는 여전히 평범한 서양인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따듯한 인상이라고 느껴지고 있었다. 실비아는 나미코를 깊게 끌어안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정말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한국으로 가는 배편은요?”

“주신 돈으로 밀항선을 구했어요.”

“히유, 마법이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날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나미코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언니 나이에 6서클은 엄청난 것이잖아요.”

“그래도…… 그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모자란 경지이죠.”

나미코의 얼굴에 스산한 비장함이 스치고 있었다.

“그놈 동족들의 피는 제법 쓸 만해요. 제 술법도 빠르게 회복하고…… 언니의 마법과 제 술법이 합쳐지면 언니 역시 7번째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복수에 희망은 좀 더 커지겠죠.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요.”

“네, 나미코를 믿어요.”

실비아의 미소는 여전히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들은 부산으로 오자마자 곧바로 일을 벌였다.

하지만 나미코가 이끌고 온 잔존 무인 중 한 명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아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들이 아닙니까?”

“지금 이 시각에도 10대 가문의 남은 무인들이 그 괴물 같은 인간에게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요괴들을 이용해 피와 영력을 취하고 있다더군요.”

“……그렇지만.”

무인끼리의 전쟁이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아냈다. 창현은 적어도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절대 건들지 않았다. 가문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추후에 무공을 익힐 수 없게끔 기를 모으는 하단전을 폐하는 것뿐이었다. 하단전을 폐한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자신의 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허약해지기야 하겠지만 그건 추후 다른 운동과 같은 단련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단지 영약의 힘이 아니면 하단전이 죽을 때까지 폐쇄되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나미코는 앙칼지게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꺼림칙하면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가 관할 행정 기관에 신고를 하세요. 그리고 지니고 있는 무공을 버리시면 그만입니다.”

“……술법문이 한국의 고아들을 납치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늘 이런 식으로 일을 벌였습니까?”

나미코의 안색이 붉어졌다.

“한국의 고아들을 제물로 이용한 것은 나뿐이었습니다.”

‘고아들’을 이용한 사람은 나미코뿐이라는 건 맞는 말이었다. 다른 술법문의 인원들은 무인들을 제물로 사용했으니까.

남자는 알 것 같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 나미코는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곧 잔인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도 실비아의 미소는 여전히 눈부셨다.

그녀는…… 전(前)세계 랭킹 1위 실비아였다.

적어도 그녀는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비춰지는 모습을 바꿨을 뿐이었다. 그것도 외모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일루젼 마법을 걸어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바꾼 것이다. 실로 무서운 마력의 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지난 일을 떠올렸다.

론즈 가문과의 인연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를 론즈 가문은 진즉에 알아보았다. 과연 미국 최대의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대통령보다 더욱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실버론즈는 그 세력이 전 세계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주인 론즈 역시 상당한 경지의 검사였다.

그런 가주를 뛰어넘는 것은 실비아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20살이 되기 전에 6서클 마스터가 된 실비아는 5년 후에는 7서클 마스터가 되었고 다시 5년이 지나자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8서클 마법사가 되면서 국제적 발표 이후 전 세계 랭킹 1위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S급 괴수를 홀로 가볍게 잡은 동영상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토록 그녀의 힘이 강해지면서 론즈는 불안해질 만도 했지만, 그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실비아에게 자신의 가문을 쓸어버릴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비아는 언제고 자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리의 맹세.

그것은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맹세였다. 자신의 고리를 걸고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그 약속을 어기게 되면 고리가 두두둑, 하고 끊어지면서 지금까지 이뤄 왔던 모든 경지가 허물어진다. 그 이후 마나가 역류를 하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큰 규모의 클랜이나 가문들, 또는 국가는 마법사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리의 맹세를 받았다.

실버론즈 역시 마찬가지였고, 실비아도 거기에 속했다.

‘히힛! 멍청한 인간 고리의 맹세 따위나 믿고 있다니.’

실비아는 이미 그 맹세에서 자유로워진 지 오래되었다. 8서클 마스터가 되면서 고리 전체가 다시 새롭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8서클 마스터 마법사가 없기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실비아 역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실버론즈는 꽤 편한 가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지원에 대해 모든 것을 들어 주었고, 그 가문은 곧 전 세계를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 빠뜨릴 것이 분명하니까.

론즈는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실비아 자신도 고리의 맹세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진즉 그의 정액받이 노릇으로 전락했을 것이니까.

그 멍청한 인간을 생각하면서 실비아는 히죽 웃었다. 그 비릿한 미소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미소로 비치고 있었다.

창현은 론즈에게 지독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젊은 나이, 전인미답의 경지, 그리고 거대한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여인들 역시 론즈가 데리고 있는 여인들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그 능력도 출중했다. 자신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 그가 한혈문에 대한 혼란과 창현의 생포를 지시했다.

실비아는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창현을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자신의 힘을 계산에 넣어야 그들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가 혼란에 빠지면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마음껏 학살을 즐길 수 있었다.

나미코를 만나고 나서 그녀를 선택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근본적인 영력의 기운은 한국의 무인들과 비슷했다. 그래서 실비아는 실버론즈의 정보력을 동원해 그녀가 일본이 전쟁을 벌였을 때 희생된 여인과 술법문 가주 사이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아으, 그 순간을 생각하니 싸 버릴 것 같아.’

남자를 받아들여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절정의 쾌감은 가져 본 적이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날 믿고 의지하는 거야. 그리고 최후에 진실을 알게 되고 경악과 절망의 눈빛으로 날 바라봐 줘. 그때 목을 썰어 버린다면 지금은 싸 버릴 것 같지만 그때에는…… 정말로 쌀 거니까.’

실비아는 다시 나미코를 향해 아름답게 웃었다.

잔혹한 표정으로 고아들을 제물로 사용하고 있는 나미코의 모습은 한 마리의 악귀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시각,

창현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 한 명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뭔가 달라졌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