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 회: 집 주인 혈마 -- >
창현을 만나고 넌지시 던지는 몇 마디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무황은 그 경지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상태였다. 무공이란 것이 본디 처음에는 쑥쑥 성장하기 마련이지만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성장이 멈춘 것과 같이 느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어떤 무공이라도 우주 만물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한 명의 인간이 하나의 무공을 깨닫는 것 자체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그런 무공을 바로 ‘인간’ 이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무공을 만드는 사람을 종사라 칭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무황은 나이를 잊을 만큼 호승심이 들끓고 있었다. 무공이라는 것이 본디 또 그런 것이다.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경지와도 상관없이, 한 단계 발전을 이룩하고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높은 상대가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느끼게 된다면 손속을 나눠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무공을 익히고 검을 잡게 된다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치도이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한 편으로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작은 반도에서 끊임없이 인재가 나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네. 자네가 성장해 오는 것을 늘 지켜보기는 했지만…여기까지 성장 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거든. 오지 않는 주인이나 기다리고 있는 바보들이라 생각했거늘!”
무력은 물론 일본 10대 가문은 전쟁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점점 커지고 공항이 북적해지기 시작하자 무황은 잠시 주위를 둘러 본 이후에 말했다.
“방문하고 싶은 곳이 한혈문이라 들었고. 그렇다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가지요. 이곳은 일반인들도 있는 곳. 그대 역시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그거 고맙군. 사실 자네의 기세로 보아서는 굉장히 쏘아 붙일 줄 알았거든.”
윤미가 먼저 나서며 코웃음 쳤다.
“흥, 너희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딴 인자한척하는 웃음 뒤에 비열함을 언제나 숨기고 있었지. 이 땅 위의 인간들이 네 말처럼 바보였지. 그런 너희들의 비열함을 모르고 지금껏 당하면서 살았으니까.”
무력문 제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은 물론 대충 상황을 짐작하는 일반인들마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계집,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면….”
윤미는 남자의 말을 듣지 않고 벌써 공항을 나가고 있었다.
“저 아이의 말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지. 적어도 우리는 보지 못한 그 사람들의 모습을 저 아이는 보았을 테니까.”
곱절은 더 오래 산 윤미에게 아이라 칭하는 것이 오히려 좀 어색해야 했지만 외모 때문인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열 명 남짓한 무력문 사람들과 무황 그리고 동이각 제자들은 일반인들을 헤치고 공항 밖으로 나섰다.
“그럼 앞서 가도록 하겠소.”
무황이 먼저 가볍게 신형을 날렸고, 뒷짐을 지고 마실을 나가는 것처럼 치도이는 부드럽게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교통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 했으니까.
빠르게 스치는 주변 풍경들을 보면서도 치도이는 그 풍경들을 마치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에서 부드럽게 경공을 펼치는 호위에게 말했다.
“놀라움의 연속이야. 어린 시절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폐허였어. 민족끼리 상잔이라는 최악의 바보짓을 저질렀을 땐, 대제국이 무너뜨리지 못한 미개한 나라가 결국에는 상잔으로 끝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일컫는 것 같았다. 중년의 남자야 그저 역사 속 한 페이지로 알고 있었지만 치도이의 나이는 이미 백수를 넘었고, 그 때의 현장을 눈으로 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뿐이랴, 한국전쟁만이 아니라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패전국이 되면서 우리 역시 무척이나 어려웠네. 시간이 오래 걸렸지. 이곳은 더욱 오래 걸릴 것이라 생각했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변했어.”
“문파들은 더욱 쇠퇴했습니다.”
치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저 앞에 나가는 아이들을 보게.”
무황을 가리키며 말을 하는 치도이의 목소리에 중년의 남자는 살짝 안색을 굳혔다.
“정말 놀라운 곳이야.”
경복궁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감상을 말하기도 전에 느껴지는 성지의 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
“결계가 풀리니 더 대단하군.”
치도이는 감상에 젖어 경복궁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천천히 들어가는 관광객들이 호기심의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공항에서 일어났던 일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공항에서 경복궁까지 그들은 거의 30분 정도 만에 도착했으니까.
“…크르릉!”
적대적인 기운이 느껴지고 성지가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자 기운 자체 민감한 용신이 낮게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치도이를 제외한 호위들은 잠시 몸을 떨었다. 술법문에서 용신만큼이나 대단한 괴생명체들을 만나본 적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을 적대하지 않았기에 용신과는 많이 달랐다.
“…혹시 그는 어디에 갔는가?”
치도이는 창현의 존재를 무황에게 언급했지만, 곧 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본좌의 집에 온 걸 환영한다.”
수연과 솔 그리고 지현, 대길, 피콜로, 오소리까지 모두 대동하고 나타난 창현은 치도이를 보면서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분명 내 아래일 텐데.’
치도이는 가늘게 떨리는 눈빛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외모, 꽤 잘생기긴 했지만 수수한 느낌을 주는 외모였다. 정장을 차려 입고 있는 것은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그 옷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네는 괜찮은 것 같지만, 저들은 아닌 것 같은데?”
창현이 호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중년의 남자가 다시 발끈했다.
“같은 가주 입장이긴 하지만 미개한…!!!!”
크르렁 거리던 용신이 붉은색 기운으로 중년의 남자를 감싸 안았다. 남자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고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지만 치도이는 그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창현의 말에 치도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인정하네.”
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붉은색 기운이 남자의 몸에서 떨어졌고, 남자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살짝 컥컥 거렸지만 남자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문주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저 아이는 나와 무척 겨뤄보고 싶은 것 같아. 비록 오기 전에 그대와 손속을 나눠보고 싶어 이곳으로 온다고 했지만, 저 아이의 호승심을 채워주고 싶은데 가능한가?”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창현은 그 속에 숨겨진 가시들을 읽어냈다. 뒤에 있던 설난이 피식 웃으며 나섰다.
“무황님을 죽이겠다고 대놓고 협박하는군.”
비단 마치 무황이 호승심 때문에 자신과 겨루고 싶어 했고, 그래서 자신이 자비로 그와 대결을 해주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속을 드려다 보면 그 것이 아니었다. 무황은 동이각의 각주이다. 그리고 한혈문에서 동이각은 무력을 대표하는 각이었고, 창현 이전에 무황은 한국 최고의 고수였다.
그의 영향력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성지라 불리는 경복궁에서 패한다?
아마 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치도이는 무황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 것도 아주 비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이미 관광객들은 모두 모여 있었고,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무인간의 비무에서 죽음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미 비무가 들어가는 순간 사고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 국제법 중 하나였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두 사람의 대결에 끼어들 수 없다.
오로지 한혈문과 무력문과의 일이었다.
무황이라는 큰 전력을 깎고, 한국 한복판에서 성지라 불리우며 한국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창현이 가장 총애하는 부하 중 한 명인 무황이 죽는다면?
그 여파는 비단 한혈문의 전력이 깎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본디 창현과 대결을 하면서 기회가 되면 죽일 생각이었던 치도이는 그 경지가 파악 되지 않자 공항에서 눈빛을 주고 받았던 무황으로 목표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포장은 마치 고수인 내가 하수인 너를 배려해준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을 설난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군.”
무황은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하지 않았다. 창현에게 기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황은 자신이 치도이의 암계 따위에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어쩌면 무뚝뚝해 보이지만 창현은 그 누구보다 수하를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문주도 알고 있듯 이곳의 기운은 나를 밀어내고 있네. 이들이 내 호휘가 아니고 가문의 일반 무인들이었다면 아마 서 있기도 힘들겠지.”
“이 곳에서 직접 피를 묻혔으니 더욱 적대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저지른 그 후한무도한 짓을 성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윤미의 말에 치도이는 빙그레 웃었다.
“너는 그 것을 보았느냐 아이야?”
“느끼긴 했지. 추악한 욕망이 이 땅의 기운을 더럽히는 것을.”
한국인들은 그 말에 짐작하는 것이 있다는 듯 치도이를 보는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뭐…그렇다면 할 수 없네. 하지만 문주 이것은 알아주게. 분명 난 저 아이보다 고수이지만 이곳의 기운은 가주도 알고 있듯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네. 난 그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저 아이와 대결을 해준다는 것이야.”
“허락하지.”
무황이 나섰다.
“주군….”
성지의 기운을 창현이 거둬들일 수 있다. 성지는 창현의 의지를 거역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창현은 무황의 말을 듣지 않고 용신에게 말했다.
“일반인들을 보호해라. 가주의 아이들도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군.”
창현의 말에 치도이도 호위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도 여파에 대비해라.”
“하지만 가주….”
“명령이다.”
창현도 그 말을 받았다.
“용신.”
투명한 막이 근정전 뜰 앞에 퍼지고 있었다. 창현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저자를 죽인다.’
치도이는 창현의 미소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살짝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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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은 배교 출신 후후후후후
경지에 대해선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