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5 회: 최상급 능력자 혈마 -- >
“협회장님 말씀은…요약하자면 진선도인인지 뭔지 하는 그 무당파 돼지의 말을 들으라는 거군요?”
차라리 머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한국 무인협회에서 할아버지는 최고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절정의 끝자락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유일하게 무황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수연은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혐오감에 도리어 웃어 버렸다.
“무당파 고수 한 명에 여기 계신 분들은…한국 무인들의 자존심을 팔아먹자는 말씀이시잖아요. 지금 초절정 고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한국인을…무당파 고수에게 정리해달라고 한 거잖아요. 더구나 그 대가가….”
수연은 말을 잇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광길은 정부 기관 최고 고수였고, 그가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굳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일반인들에게 발표하기로 결정한 이상 한 명에 고수라도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결국은 강자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 역시 우리가 가진 것을 유지하는 방법 중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너 역시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수연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서 손녀를 팔아먹어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목에 차고 있던 요원카드를 이미 한 부분이 부셔져 있는 테이블에 살며시 놓았다.
펑-!
가볍게 기운을 일으키자 탁자와 함께 요원카드가 산산조각이 났다.
“실력 행사를 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이 시간부로 전 한국 무인협회에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 말고 예쁜 여자들은 많으니 진선도인에게 잘 진상하도록 하세요. 이기적이라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광길은 그런 수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기 계신 분들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같으니까.”
수연이 나가자 회의실은 단 번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광길이 가볍게 기세를 흘렸다.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크음, 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수연 앞에서야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지만 그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아주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광길은 레벨이 다른 것이다.
수연이 떠난 자리에 선 광길의 입이 열렸다.
“각하와 독대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광길은 그동안 마치 은거라도 한 것처럼 협회장이라는 이름만 달고 있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모두 수연의 손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고위층들은 수연을 입맛대로 다루려 했고, 실제로 그 것은 어느 정도 먹히기는 했다.
“강창현은 필히 정리해야 할 인물입니다. 그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의견이 같다고 할 수 있고…각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광길이 그렇게 말을 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연은 광길의 하나 밖에 없는 손녀이다. 유일하게 남은 핏줄이기에 애착이 갈 수 있었고, 그가 정말 실력 행사를 하며 전면으로 나선다면 골치가 매우 아파질 것이 자명하기에 의원들은 무척이나 안심했다.
“아마 진선도인은…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고, 의원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협회장님, 그 것은 무슨 말씀이시죠?”
광길은 여유롭게 조소를 물고 대답했다.
“그 돼지는 아주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강창현은 그 돼지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수이고, 저를 대어 보아도 마찬가지죠. 무황 역시 그리 많이 앞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무황이 그 보다 강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죠.”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수연이 그토록 역설했던 창현의 중요성을 그들은 이제 막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럼 섭외를 하는 것이?”
“권력에 단맛에 빠질 인물이 아닙니다. 물욕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고요. 그래서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한 겁니다.”
“이미 일반인들에게 발표를 하기로 결정했고, 그렇다면 각국의 무인들과 서양의 능력자들이 전면에 나설 텐데…한 명이라도 더 보유 하는 것이 이득 아닐까요?”
제법 날카로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 젊은 의원은 수연에게 유일하게 지지를 보내던 의원이었다.
“정리는 꼭 죽이는 것만 표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광길이 다시 진한 미소를 지었다.
“진선도인은 죽을 겁니다. 강창현의 손에. 자, 생각 해 보죠. 이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의원들의 머리는 벗겨졌지만 제법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
“정부의 표적이 되었어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창현의 모습에 수연은 열불이 터졌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당신이 고수인 것은 알지만, 정부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단일 단체로는 최강이라는 말이에요. 한 손이 열 손을 이길 것 같아요? 그리고…그 늙은이들이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발표한다는 것도 알았으니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우습게 알 걸요?”
그래도 창현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드렁했다. 수희는 대충 알아듣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럴 수 있었다. 수연도 수희도 창현이 아직까지 얼마나 강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본신의 무공, 영력, 그리고…그 외 잡다한 수많은 지식들은 그가 일인군단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들은 알 수 없었다.
무황의 존재 정도야 창현도 알고 있었다. 초절정에 이른 인간은 단 한 명이었고, 갈무리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운은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그가 정부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설사 그가 나선다 하더라도 적어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은 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자연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호프집 주인이나 지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초절정에 이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다. 그 때는 한 번 더 환골탈태를 할 것이 분명하고 거의 완전체나 다름없는 경지에 오를 테니까.
말 그대로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었다.
“좋아. 그렇다고 치자. 근데 너는 왜 나한테 달려와서 하소연이야?”
“….”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진선도인을 모시라고 했어요.”
“진선도인?”
“지난 번 언덕에서도 보았던 그 뚱뚱한 중국인이요. 무당파 사람인데 지금 속가 문파인 태극문파에 와 있어요. 절정고수이고…정부는 그에게 창현씨의 처리를 맡겼어요.”
수연은 창현이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진선도인을 약 반수 정도 높게 쳐주고 있었다. 하는 짓이 거지같고 경박스럽고 더러워서 그렇지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라는 사실과 무당파 동양 속가 문파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네 할아버지가 절정의 끝자락에 오른 고수라 그랬나?”
“…네.”
웃고 있지만 창현은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퍼즐을 하나 씩 짜 맞추어 보았다. 본래 기억을 토대로 권력의 습성과 기득권의 습성 그리고 고수들의 습성까지 하나 하나 생각하면서 지금 시대의 특성까지 곁들어 보았다.
‘간사한 노인이군.’
수연은 알지 못했던 광길의 속셈을 창현은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었다.
‘절정의 끝자락이면 그 돼지 새끼가 나한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굳이 나한테 맡겼다는 것은 그 돼지 새끼가 나한테 뒈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지. 어느 소속도 아닌 야인에 불과한 무인에게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가 죽어 버렸다? 시대는 곧 혼란을 맞이한다. 그 속에서 나를 지들의 권력을 위해 이리저리 뛰는 사냥개를 만드시겠다?’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창현은 뚜렷하게 목표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육체와 동화가 되면서 수희의 대학 문제와 그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무공을 자신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생각과는 전혀 달리 이 곳은 예전 자신이 살던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과학이 발전하고 절정고수조차 죽일 수 있는 현대식 무기가 있다는 점은 분명 다르지만, 어쨌든 큰 틀은 비슷하게 흐른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또 원래 먼저 건드는 것은 잘 못 참지.”
“네?”
“지난 번 약속은 유효한가?”
“…어떤?”
“수희말이야.”
수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난리법석을 피우고 왔으니 자신은 이제 아무런 권력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을 아꼈지만 결정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 것을 알기에 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라는 인간이 돼지 새끼에게 널 팔아먹었다. 뭐 결론은 그거고 나한테 요구하는 것도 그 돼지 새끼랑 몸을 섞지 않게 도와주세요.”
“….”
직설적인 말에 수희가 얼굴을 붉혔다. 불편한 모양인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창현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은 그거 아냐? 미래가 창창한 젊은 고수인데 늙은 돼지에게 왜 몸을 바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동안 내가 한 것이 얼마인데 그렇게 대우 할 수 있나, 뭐 그런 것이잖아.”
“…맞아요.”
창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 돼지가 지금 어디 있지?”
“태극문파로 잠시 돌아갔다 들었어요.”
“태극문파라…!”
창현은 대길을 떠올렸다. 아주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절정의 끝자락이면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경지이다. 물론 맞붙는다면 100%의 확률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 바보들은 내공의 진정한 의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 때 언덕에서 많은 고수들을 만나보고 느꼈던 것이었다. 똑같은 경지라 할지라도 자신이 효율적으로 상당히 앞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한 단계의 벽을 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소리!”
스산하게 외치며 영력의 그릇을 두들기자 곧 멀리서부터 오소리가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나가지.”
“…저기 그…창현씨.”
수연은 얼굴을 붉혔다. 선뜻 창현이 나서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
창현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지금 수연의 상태는 멀쩡해 보이지만 극도의 혼란과 분노가 점쳐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심리 상태는…사술이 걸리기 무척이나 쉬웠다. 더군다나 초창기 때가 아니라 지금은 영력도, 무공도 훨씬 발전한 상태였다.
“이름이 수연이라 그랬지?”
단발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며 말을 하자 수연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근데 수희가 있어서 집은 안 되고…지현이 집으로 가야겠군…!’
역시 이곳은 참 즐겁다. 새로운 육체도 즐겁고. 창현은 그 시절 느끼지 못했던…쾌감에 대한 의욕과 더불어 매끈하면서도 풍만한 지현의 몸과 그런 지현과는 조금 다르게 큰 키에 늘씬늘씬한 수연의 몸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네….”
“일단, 갈 곳이 있어. 그리고 그 돼지의 문제를 처리하자고.”
밑밥은 벌써 깔리고 있었다. 붉은 눈이 살짝 반짝였다.
============================ 작품 후기 ============================
집에 가는 막차에서 폰으로 올리는 성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