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일 안가…요?”
존댓말이 여전히 어색한 수희는 창현의 눈치를 슬쩍 보곤 시선을 돌렸다. 어제 너무 놀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에 눈 밑까지 내려 온 다크서클이 무척 신경이 쓰이는 것도 있었다.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창현은 그런 수희의 심정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귀찮은 듯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분간은 좀 쉴 생각이야.”
“…아침은….”
“네가 좀 해. 그동안 얻어만 먹고 다녔으면 할 때도 있어야지.”
“….”
역시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수희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낯설지만 창현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딱히 그럴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성격이 바뀌어 버린 이유가 행여나 그동안 자신이 너무나 차갑게만 대해서 그런 것일까봐 수희는 오히려 전전 긍긍하고 있었다.
물론 그 것 역시 창현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살부터 불리는 것이 편하니까.”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드는 것은 창현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육체가 안 따라 줄 수 있는 변수도 있지만, 영력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생명력이자 의지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영력을 다룰 수 있는 창현은 당연히 육체에 대한 컨트롤이 남보다 훨씬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수희가 학교를 가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에 창현은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녀가 어제의 충격을 딛고 자신을 피할까 걱정이 됐었다. 육체와 동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본연의 창현의 기억과 성격 역시 점점 스며들고 있었기에 수희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창현은 처음으로 식탁이라는 것을 차려보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물건이야. 이런 냉기가 계속 흘러나오다니.”
냉장고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창현이 대충 반찬을 꺼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그대로 있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을 더듬으며 가스레인지를 켜자 불꽃이 튀어 나오는 것을 보곤 깜짝 놀랐다.
“…이런!”
수희가 보았을까 괜스레 걱정이 되어 거실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냉기…열기 장난이 아니군. 정말 대단한 세상이야.”
어떤 원리로 작동을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기에 창현은 빨간 불꽃을 보며 신기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수희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하라고 했잖아…요.”
“오늘까지만.”
수희가 얼굴을 붉히고는 금세 팔팔 끓고 있는 국을 보며 불을 껐다. 자연스레 의자에 앉는 창현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밥을 퍼 앞에 다 놔 주었다.
“고마워.”
“…응.”
조심스럽게 편안하게 말을 한 수희였지만 창현은 딱히 타박을 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그동안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군.’
수희에게는 영양까지 맞춰가며 식사를 준비 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쪽잠이라도 자는 것이 더 편했기에 식사 시간마저 아껴가며 잠을 잤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창현은 스스로가 여러모로 굉장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와는 또 달라.”
“…응?”
“아니다. 밥 먹어.”
예쁘게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피식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끼는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저를 다시 들었다. 역시 의념이 남아 있는 이 집은 괜스레 포근한 느낌과 함께 사람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다시 한 번 받았다.
“좋은 사람들이었어.”
“….”
창현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수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창현이 딱히 대답을 바라고 말을 한 것도 아닌 정말로 혼잣말에 불과 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 같이 먹는 거…오랜만인 것 같아.”
“네가 아침을 안 먹고 다녔으니까.”
그 정도는 기억이 있었기에 창현은 웃으며 말했다. 수희가 얼굴을 붉히곤 어제와 비슷한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밥을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을 더 좋아했잖아!”
“존댓말. 오빠.”
“…차려만 놓았지 늘 잠만 잤으니…까요.”
“그건 피곤했으니까.”
누구 때문에 피곤한지, 왜 피곤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수희였기에 반박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서러움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되요.”
“말 붙여서 하고.”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서 당분간 쉰다고 했잖아. 몸도 살필 겸.”
“어디 아파?”
수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존댓말을 한 번 더 강조했던 창현의 말을 벌써 잊은 듯 싶었다. 잠시 창현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수희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지 못하고 좀 더 높은 톤의 목소리를 쏟아 내었다.
“그렇게 밥도 안 먹고 다니면서 맨날 일만 하고 다니니까 몸이 축나지!!”
“…작게 말 해.”
“…아!”
굳은 표정으로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수희가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오를 듯 붉게 얼굴을 붉히는 수희가 창현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창현은 어느새 전부 비운 밥그릇에 물을 담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모의고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번에 하는 것은…전국 모의고사인가?”
역시 말투부터 딱딱하게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수희였지만 어제 폭풍처럼 했던 약속이 떠오르자 고개를 숙였다.
“응.”
응, 이라는 대답은 타박 할 생각이 창현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같잖게 까불고 다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뭐가요.”
“요새 네 걱정을 많이…하더군. 벌써 애가 여럿 있을 나이이지만 기준이 아직 성인이 아니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창현 때문에 수희는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아, 실수. 걱정이 많이 된다는 소리다. 이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놀고 다닐 거야.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와. 네가 나 일 나간다고 집에 늦게 들어왔던 거 알고 있으니까.”
“…걱정을 해요? 날?”
“당연하지. 계집이 밤 늦게 싸돌아 댕기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야. 더구나 중요한 시기이잖아.”
적당히 기억과 수희에게 느끼는 감정을 섞어 가며 창현은 제법 부드럽게 말을 하고 있었다. 수희가 다시 볼을 발그레 붉히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집에 있을 거니까.”
“…저기 그…모의고사가 일주일 뒤인데….”
“근데?”
“갖고 싶은 거 말고 부탁 들어주기로 한 거….”
“안 까먹었어. 걱정하지 마.”
환하게 웃는 수희의 모습은 확실히 예쁘다고 표현 할 수 있었다. 창현 역시 기억 속에 있는 많은 여자들보다 수희가 거의 독보적으로 외모 측면에서는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가 걱정을 하는 이유를 하나 더 알 수 있었다.
가뜩이나 어린데 예쁘기까지 하니 밤늦게 늘 혼자 두는 것이 미안하고 불안 했던 것이다. 여기는 그리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라는 점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데리러 가야겠군.”
“응?”
“아니다. 얼른 학교 가.”
다시 배시시 웃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뒷정리는 창현의 몫이었다.
“참 별거 다 하는 군.”
생각지도, 상상지도 못했던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창현은 도리어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이 전혀 따분 하지 않다는 것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운동화를 신고 나가던 수희가 다시 창현을 향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몸을 돌렸다.
“왜?”
“…아니야.”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반말을 했지만 창현이 지적하기도 전에 수희는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파에서 무섭게 울리는 진동을 들으며 창현이 걸음을 옮겼다. 가장 신기한 물건이었다.
“냉기와 열기를 뿜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 요상한 물건은 더 신기하군.”
어제 집으로 돌아 와 그동안 일을 하던 곳에 모조리 전화라는 것을 걸어 보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적응 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척이나 신기하긴 했었다. 전음과는 전혀 다른 오로지 기계의 힘만으로 목소리를 주고받는 것은 창현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 군데, 한 군데 휴직이라는 것을 요청 할 때마다 도리어 걱정 가득한 그들의 목소리를 기계로도 느끼며 제법 인간관계가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바보들을 제외 하면.”
모처럼 비릿한 웃음이 번졌다. 창현 스스로야 늘 그런 웃음을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경수를 어떻게 요리 할까, 고민을 했지만 차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몸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릇의 크기를 키울 필요가 있어.”
어제 지현의 혼탁한 귀력은 이미 모두 영력으로 바뀌었고, 역시 예상대로 1년 정도의 수련으로 쌓을 수 있는 영력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수련조차 엄두도 못내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창현의 기준은 그랬다.
“10년 정도는 받아 들여야 해. 그래야 잡귀들을 이용할 수 있지.”
그 전에 지현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는 생각에 창현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이미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전화가 끊긴 뒤였지만 마침 전화를 하려고 했었던 지현이 건 전화였다.
뚜우-뚜우-뚜우!
신호가 세 번 정도 울리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아!”
“반말 하지 마라 계집.”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일단은 음….”
그 시대의 호칭은 어색한 것 같고 창현이 고민에 빠졌다.
“일단은 호칭은 생략하고 반말은 하지 마.”
간단한 결론에 마치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그녀에게 창현의 말은 어떠한 법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몸이 개운 하지?”
“…네 신기 할 정도로 개운해요.”
“다른 이상한 점은 없나?”
“그…원래 가슴 밑에 멍울이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어요.”
무척이나 놀란 듯 지현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아마 잡병 하나가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한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에게도 꽤 좋게 작용한 것 같았다. 이론만 실제 했지 사실 창현 역시 그런 사술들을 직접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이 아니라 선물이었군, 나와의 섹? 스는.”
“….”
“뭐 좋아 일단 알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가, 가게에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경수 오빠가 저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
소식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고, 몸을 만들기 전에 벌써부터 그 바보들이 설치기 시작했다는 것도 창현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당분간 너도 집에만 있어라. 그 바보들이 집까지 찾아 오나?”
“…바보들이요?”
“경수인가 명수인가 하는 자식들.”
움찔 몸을 떠는 지현이었지만 창현은 그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저희 집만이 아니라….”
창현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상관없었다. 꼭 힘만으로 그들을 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제물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1년 정도의 영력으로도 그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근처에 산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음…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내일까지는 집에서 나오지 마. 아마 며 칠 정도까지는 그 바보들도 기다릴거니까.”
그들 역시 그 날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는 않을 것이 분명 했기에 창현은 약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현은 불안했지만 창현이 기다리고 했기에 바로 납득했다.
“저…무서운데 같이…있으면 안 돼요?”
다른 생각이 드는 것도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