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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 현대 재림기-9화 (9/170)

< -- 9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기세라는 것은 굳이 내공을 일으켜 밖으로 뿜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른 살 시절이었나? 배교에는 진작 상대가 없었고, 이미 그 당시 교주의 후계자로 철저하게 자리를 잡은 내가 홀연히 중원으로 사라지자 교가 난리가 났었다. 천마의 호칭을 붙이는 것조차 부끄러운 놈에게 밀려 중원의 변방의 변방까지 쫓겨났던 교도들은 내가 교주가 되면 천마교를 몰아내고 감숙을 넘어 기름진 중원의 땅에 입성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교주가 된 이후 충분히 정파 놈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었지만 너무 귀찮았다.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잘 찾아와 심심함을 덜어 주었으니까.

뭐 어찌되었든, 그 시절에는 나 역시 여느 젊은 교도들과 다르지 않게 그 작은 곳을 답답해했던 것 같았다. 중원으로 나가고 싶었고, 교주조차 경시하지 못했던 내 무공이 얼마나 되나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실망만으로 가득 찼었지만. 간단한 사술조차 이기지 못하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그 때 허영심 강한 정파 나부랭이 놈들의 특성이 싸움을 하기 전 기세를 내공을 이용해 끌어냈던 것이 너무나 우스웠다. 기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 특유의 기운은 누구나 다르고, 그 기운의 고하 역시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특유의 기운을 뿜어 낼 수 있었다.

굳이 내공을 사용하지 않다 하더라도.

‘일종의 영력이지!’

도사들은 그 것을 도를 닦는 표현 했지만, 나를 만난 이후 그들의 가치관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입이야 사술이니 어쩌니 떠들지만 그렇게 따지면 도술도 사술과 그 맥락이 같거든.

뭐 옛날이야기는 지루하니 이쯤 하기로 하고, 지금 이 표독스런 계집 앞에서 나는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다. 영력을 사용하는 것은. 익숙지 않은 육체이지만 상관없었다. 녀석의 육체가 허약의 표본이라 할지라도 이미 혈마 강세찬의 영혼이 깃든 이상 그 육체는 더 이상 허약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의 영력은 이미 인간의 것을 뛰어 넘은지 오래이니까.

숨을 몰아 쉬웠고, 차가운 눈빛을 흘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서 입 꼬리만 살짝 올려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표독스런 계집 뒤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수정하기로 했다. 녀석의 외모는 나와 동급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너, 너 아까부터 자꾸….”

“한 번만 더 떠들면 주둥아리를 찢어 버리겠다고.”

“!!!”

지독히 차가운 나의 목소리에 표독스런 계집이 몸을 움찔 떨었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듯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계집이 지금까지 어떤 대우를 받아오며 살았는지 난 전혀 모르지만…아, 머리가 지끈 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새로웠다. 이 고통이라는 느낌은! 늙은이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긴 했었다. 내 마지막 심득이 담긴 무공서와 배교 술법을 낱낱이 해부 해 놓은 것을 내 놓으라고.

처음부터 그딴 것은 없었다. 그저 내가 너무나 뛰어 났을 뿐. 난 대답 대신 비웃음을 던져 주었고, 열흘 밤낮으로 고문이 이어졌다.

단연코 지금보다는 훨씬 아프지 않았다.

“…꺼, 꺼져.”

“가, 강창현!”

표독스러운 계집의 놀란 얼굴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색이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드니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어느 정도 사태는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주둥아리를 찢어 버리려고 손을 들려 했을 때, 미친 듯이 무의식 속에서 날뛰던 녀석의 영혼이 내 머리를 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이어졌고, 난 결국 침대라는 곳에 몸을 앉혔다.

“하아.”

“…왜, 왜 그래 강창현, 역시 오, 오늘 이상하다니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지?”

표독스러운 계집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녀석의 눈보다 더 큰 눈망울에 작은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날 붙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감싸기 시작하자 녀석의 영혼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아!”

겉돌던 내 의식과 육체가 어느 정도 좀 더 동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표독…아니 수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 느꼈던 짜증도 대부분 가라앉아 있었다. 난 범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느낌이 녀석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심성이 어느 정도 나에게 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체적인 인품이 아니라 눈앞에 걱정을 가득 물고 울먹이고 있는 김수희라는 계집애에 관한 감정, 느낌, 그리고 생각들이 말이다.

“후우!”

“…가, 강창현.”

“말 더듬지 마.”

여자들은 늘 내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여자를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역시 남자였고, 성욕 따위야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었지만 그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 것까지 포기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등선 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난 제법 여자를 많이 두었고, 그 것은 교의 여자들이나, 정파의 여자들이나, 일반 양민들이나 가리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기 우습지만 그들은 날 연모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려워했다.

“뭐 내가 정파 계집들을 그냥 가진 적은 없으니까.”

“…뭐?”

“아니다. 됐어. 나가 봐.”

“…강창현 진짜 어디 이상한 거 아니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여전히 김수희, 큭 이상하군, 어쨌든 김수희 뒤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비릿한 조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나가 봐라 김수희.”

“…뭐야 역시 이상해. 늘…수, 수희야 이렇게 부르곤 했잖아.”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나?”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녀석의 기억 속 김수희라는 이 여동생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다. 아직 모든 기억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분명 둘은 꽤, 아니 아주 많이 친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표독스러운 계집…이 아니라 김수희가 차갑게 변하면서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김수희 혼자만. 녀석은 오히려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하고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

19살…그리고 지금은 여름, 수능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김수희를 대학이라는 학문 기관에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았다. 다시 조용히 잠 든 녀석의 영혼이 그 기억을 떠올리자 움찔 떠는 것을 보면. 어쩌면 좀 재밌는 일이다.

녀석이 이 육체의 소유권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힘을 조금 씩 잃어가다 결국에는 소멸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의식 어둠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공부해라 김수희.”

“….”

공부라는 것이 여러 가지를 뜻하지만 역시 이 시대는 웃기다. 어쨌든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대답 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는 수희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바보 같이 웃지 마 강창현.”

“오빠라고 불러라. 기억 속에 네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있더군.”

“응?”

“오빠라고 부르라고 김수희. 내가 네 오빠잖아.”

수희의 표정이 처음 방에 들어 왔을 때라 비슷해졌다. 그 미색이 자못 경국지색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근처까지는 가기에 눈여겨보았지만, 여러 가지 표정이 각각의 미를 뽐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소위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큰 눈망울과는 다르게 속눈썹은 가지런하게 곱게 뻗어 있었고, 그 밑을 따라 솟은 코는 뭉텅하지 않고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다. 두툼하지 않으면서도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입술은 앵두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탐스러워 보였다.

이 시대에 19살이면 아직 성인은 아닌 것 같은데…그 것도 이상했다. 난 15살에 여자를 처음 안았는데, 여기는 이상한 것들만 빠르고 정작 자연의 섭리 중 최고인 음양을 합하는 것에 있어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덮여 쓰여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시대 기준으로 아직 성인은 아니지만 수희는 제법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교복? 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것으로 추정 되는 옷을 입고 있어도 확실히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골반과 더불어 그 것을 받치고 있는 발목은 얇았고, 그 위로 뻗어 올라가는 종아리 역시 늘씬 했다. 하지만 허벅다리는 제법 탄탄해 보였고, 풍만함을 상징하는 가슴은 확실하게 큰 것 같았다.

결론은 김수희라는 이 여자는 꽤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너, 너 따위가 왜 내 오빠야! 밥이나 줘 이 멍청아!!”

쾅-!

계집들은 늘 알 수가 없다. 천재적인 머리로도 내가 그 시절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면 바로 계집들의 심성이었다. 두려움에 떨다가도 간혹 나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계집들이 있었고, 또 달콤한 말을 속삭이다가도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계집도 있었다.

물론 그런 계집은 질릴 때까지 안은 이후…그 뒤는 생략하는 것이 좋겠군. 이 시대에 적응을 하려면 시대에 맞는 사상을 가져야 하는 법이니까!

“알 수 없는 계집애군.”

그 때라면 19살 여자가 유부녀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난 이 시대의 맞게 사고를 고쳐 나가기로 했으니 수희를 계집애로 결정했다.

애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씻어야겠어. 몸도 한 번 확인 해 봐야겠고.”

짧은 고통이었지만 많은 땀을 흘렸다.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었다. 방문을 열자 소파라는 의자에 팔짱을 끼고 있는 수희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은 어느새 다 말라 버렸는 지 다시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배고프다고!”

“밥 처 먹어라.”

“….”

“아, 나도 배가 고프니 내 식사도 준비 좀 하도록 해. 난 씻을 거니까.”

“너, 너….”

“오빠.”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빠라 불러라.”

움찔 몸을 떠는 수희를 보면서 나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윗도리부터 벗기 시작했다.

“야, 야, 뭐, 뭐하는 거야!”

“식사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이다. 오빠라고 불러라.”

“….”

나는 수희 따위는 어떻게 보던 내버려두고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욕실로 향했다.

“호오!”

역시 이 시대는 신기한 것이 무척이나 많다. 저절로 이렇게 물이 나오다니!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따지고 보면 난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단지 그 아이와 다른 점은 난 많은 것을 경험한 인간이었고, 새로운 것을 배울 필요는 없지만 알아갈 필요는 있다는 것 정도? 이미 머릿속에는 전부 들어 있지만 해 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쏴아아아-!

“…물이 꽤 차갑군.”

쏴아아아-!

“…뜨겁자나!!”

와락 짜증이 났다. 제대로 잘 조절 한 것 같은데 이상한 뭉텅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좀처럼 온도를 맞추기기 힘들었다. 예전 내 몸이라면 물의 온도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는데 역시 허약한 신체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완전 쓰레기구만!”

말라 비틀어진 몸을 보면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아직 내공을 사용 할 수 없는 몸이고, 내공을 담을 수도 없는 몸이다.

“그 잔망스러운 계집을 이용하면 되겠어.”

내공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쉽다. 그러려면 일단 잡귀 한 마리가 필요했다. 귀력이 100년 쯤 되는 잡귀가 필요했고, 그 잡귀를 끌어 들이는 것은 녀석을 그 덩치 놈들에게 데려 갔던 그 여자가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잡귀들도 죽기 직전에는 인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동물이나, 또 다른 사물에 깃든 영력이 점점 자라나 귀력을 품게 되어 귀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흔한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 본래 가지고 있던 영력의 순환이 잘 못 되어 성불 하지 못하고 귀신이 되는 경우였다.

“이 녀석도 멍청하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수법에 넘어가고.”

최근의 기억은 확실히 선명했다. 바로 새벽에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창현은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뭐야 이 새끼 동정이잖아?”

그 새끼는 녀석이었고, 또 어떻게 말하면 바로 나였다.

“잔망스러운 계집…처음이고 아니고는 중요치 않지.”

일그러진 얼굴을 펴며 나는 비릿하게 조소를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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