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재밌는 세상이야.”
도심으로 들어올수록 창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맨 처음 자동차가 곁을 스쳤을 때도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지금은 매우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시대 자동차는 너무나 획기적인 기계였다.
웬만한 경공보다 훨씬 빠르고,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경공을 펼칠 때보다 체력 소비를 훨씬 적게 하는 것 같다고 창현은 짐작하고 있었다. 본래의 몸이라면 그들의 몸에 흐르는 기와 그 이외의 잡다한 것을 전부 보고 느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것이 불가능 하니까 대충 어림짐작으로 알았다.
딱히 틀림 짐작은 아니었다.
“거의 다 왔군.”
도심 속을 가로 질러 결국 창현은 집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래 창현의 많은 기억들을 정리 할 수 있었고, 칠흙과도 같은 의식의 머나먼 저 끝에서 창현의 영혼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창현은 그 영혼을 섣불리 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혼 역시 어쩐 일인지 깊이 잠이 들어 있는 듯, 몸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본래 소멸 되었어야 할 영혼이 남아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남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의식 끝에서 머물러만 있는 것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상관은 없어. 성불은 시켜 주도록 하지. 어쨌든 새로운 삶을 줬으니까.”
강세찬…아니 이제는 강창현이지만, 어쨌든 그는 굉장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절대자였으면서 파괴자라는 호칭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었다. 무자비했고, 잔인했다. 정복한 곳에 결코 인내를 베풀지 않았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풀 한포기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재밌어.”
연신 미소를 방긋방긋 짓는 창현이 높게 솟아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런 건물은 이미 수도 없이 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가 지난 시대보다 적어도 건축과 과학이라 표명되는 여러 가지 것들에서 훨씬 뛰어난 시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현의 기억을 많이 정리 하기는 했지만, 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천재였다고는 하지만 전혀, 개념조차 다른 지식들을 단 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육체와의 동화가 이뤄지지 않고 영혼의 상태에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창현의 기억을 받아 들였다면 그의 천재성이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 인간사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마저 꿰뚫어 보던 그의 그 날카로운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재미가 있는 것이지. 이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으니까.”
창현은 제법 익숙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중얼거림 역시 모두 한국말이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그가 혈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띵동-!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창현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현은 그제야 자신의 생김새를 알 수 있었다.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본래 자신보다 훨씬…못생겼다고 느꼈다. 미의 기준이 다른 것처럼 남자의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도 다르지만 시대가 지나도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그 기준에서 창현은 전의 자신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명석한 두뇌에 이어서 본신의 능력 그리고 생김새까지도.
“뭐 나쁘지는 않지.”
큰 눈망울이 순진하고 나약하게 느껴졌다. 그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상이야 사람의 성격과 평소 짓는 표정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무공 수련과 잡귀들의 영력을 빨아들이다 보면 몸도 많이 변할 것이 분명했다.
“계집처럼 가느다란 팔 다리에도 근육이 제법 붙을 테고.”
띵동-!
다시 문이 열렸다. 창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따뜻한 기운이었다. 마치 아주 오랜 시절 누군가에게 느꼈던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가슴을 채우는 것 같았다.
“…좋지 않군.”
고개를 저어 그 느낌을 떨쳐 내버리고는 문을 열었다.
****
“지금이 몇 신데 이제 들어 와?! 그리고 오늘 일 안 갔어? 나한테 전화가 몇 통이나 왔는지 알아?”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계집애가 이 따뜻한 느낌의 주인은 아니었다. 지금 서 있는 이 공간! 이 공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천재적인 자신의 두뇌에서조차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잡귀는 물론 요괴 또는 특유의 포근함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귀신이나 괴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닥쳐라 계집.”
“….”
어안이 벙벙한 계집을 뒤로 두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녀석의 영혼이 처음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 아파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공간의 기운과 녀석의 흔들림이 내부를 뒤흔들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지끈 거렸다.
천하의 혈마가 머리가 아프다니. 정말 별 어이없는 녀석의 몸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게 되었다.
“강창현!”
나의 이름인 듯 했다. 하긴, 성씨는 똑같군. 설마 후손은 아니겠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던 시절이 몇 세대 전인지 세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정말로 내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의 동화는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대법을 행할 때, 늙은이들의 얼굴을 짓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최후의 힘을 쓴 것이지만 나 역시 그 효과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혼대법을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산 사람에게 쓰는 경우는 사술을 곁들인다 해도 내가 금지 시켰기에 교에서조차 잘 행하지 않던 일이었다.
“정확히 이혼대법이 아니라 영혼의 이식이지만!”
입맛을 다셨다. 이 공간이 주는 따뜻한 느낌, 그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표독스런 계집의 눈빛에 자꾸만 흔들리고 있는 녀석의 영혼의 울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야, 강창현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진짜 미쳤어? 나 오늘 저녁도 안 먹고 그냥 왔어 멍청아! 그리고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기에 나한테까지 니 사장들이라는 인간들한테 전화를 받게 만들어!”
“한 번만 더 시끄럽게 주둥이를 놀리면 찢어버리겠다 계집.”
“….”
기억 속에 저 어린 계집은 녀석의 동생이 분명했다. 친동생도 아니고 이복동생도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철저한 남남이었지만 녀석은 표독스러운 계집을 세상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젠장, 이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았다.
“그렇군.”
어안이 벙벙한 계집을 뒤로 하고 나는 녀석이 살던 방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가지 ‘일’ 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놈이었다. 빈약한 근골에도 제법 체력이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이 육체는 너무나 허약했다. 뼈도 얇았고, 근력도 형편이 없었다. 녀석의 기억 속에서 녀석의 삶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괴력을 발휘한 것은 오로지 녀석의 의식 깊숙이 박혀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죽은 이후 표독스런 계집을 위해 살았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위한 삶은 단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재밌는 녀석이야.”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었다. 난 가족이 있는 지도 몰랐고 남을 위해 살아 본 적은 결단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나를 배교에 데려다 준 늙은이가 죽었을 때 잠시 감상적인 생각이 들긴 했었다. 딱히 아쉽거나 고맙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늙은이 역시 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교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높게 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었으니까.
“모두가 신기 한 것들 뿐이야.”
이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법 많은 잡귀들과 요괴들이 눈에 띄었다. 잡귀들이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요괴는 달랐다. 잡귀처럼 영혼 형태로 존재하는 요괴들도 있었고, 동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요괴들도 있었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있었고, 그들 역시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살던 인간들이 변해버린 것처럼 그들 역시 변한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부모인가?”
유독 이 집에만 잡귀들과 요괴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야 대부분 인간의 영력을 잡아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당연히 인간과 가까이 밀접하며 살았고, 때로는 한 번에 때로는 천천히 영력을 갉아 먹으며 살아간다. 방법도 제 각기였지만, 어쨌든 인간의 주거지에는 늘 요괴나 잡귀 한 명쯤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천천히 영력을 갉아 먹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주거지만큼 적합한 공간이 없으니까.
이 곳에 들어오면서 느꼈던 그 따뜻한 기운!
“녀석들의 부모가 무공이나 술법을 익혔을 리 없고…기억에는 그런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일종의 한과 같은 걱정이 묻어 나와 저절로 결계 비슷한 것을 생성 했다는 말인데…저 계집의 어미는 아닌 것 같고…역시 내 후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의념!
그래, 의념이다. 영혼의 의념이 인간의 영력을 빨아먹고 사는 존재들의 접근을 애초에 차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행운이다. 그 의념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 녀석의 육체 자체에 빙의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소멸 당하는 것은 오히려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지에 강력하게 쳐진 의념은 녀석의 몸이나 표독스런 계집의 몸에 남아 있는 양을 조금이라도 적게 한 것 같았다.
“재밌는 세상이야…그리고 정말 재밌는 녀석의 몸에 깃들어 버렸고. 이제는 나지.”
후손이건 아니건 그딴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강창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했고, 녀석이 살던대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정말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은 나중에 생각 하고…정말 쓰레기 같은 시대야. 이토록 기가 약한 곳이라니!”
잡귀들이나 요괴들이 날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연의 기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인간의 영력 역시 약해진다. 그에 반면 그들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음습한 기 즉, 사기가 강해지고 인간들은 그 사기의 영향을 받아 영력이 점점 음습하게 물드는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힘의 원천이 차고 넘치니 그들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예전처럼 흰수염을 휘날리며 도사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녀석의 기억에 근거하면 신이라는 존재를 믿는 것들도 잡귀나 요괴에 대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것으로만 믿고 있는 것 같으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영력을 제공하는 인간이 자신들을 볼 수조차 없으니 그들은 서로가 적이었고, 내가 살던 시절과는 달리 영력을 갉아 먹는 방식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차차 적응 하면 되니까. 귀력이 10년도 안 된 놈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체력을 다 소진 했는데 지금 섣불리 귀력을 흡수하려 들면 잡아만 먹힐 뿐이지.”
옅게 웃었다. 남들이야 이 것을 조소 또는 비웃음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웃음 밖에 짓지 못했다.
배교로 처음 오고, 무공이라는 것을 접한 이후 무섭게 성장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개념 자체를 난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하다는 느낌…따뜻하다는 느낌!
“그런 면에서 내 후손이라 짐작되는 놈의 의념은 굉장한 것이야. 포근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으니까.”
침대라는 곳에 몸을 던진 내가 푹신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몸에 흐르는 땀은 내일 씻기로 결정했다.
경공술을 사용하지 않고 실로 오랜만에 긴 시간을 걸었더니 꽤 피곤한 것 같았다.
그 때, 문이 열렸다.
“야, 강창현 나 배고프다고! 저녁 안 먹었다니까 나?”
하아,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저 표독스런 계집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할 것 같았다.
난 나지막하게 중얼 거렸다.
“…김수희라!”
내가 썩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가면서 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