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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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팡이를 쥐며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고민했다. 공중부양 마법 말고도 혼동 마법이나 투명화 마법 같은 걸 거러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검정색 머리와 마주칠 때까지의 시간이 1초도 되지 않았다면, 아마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잠시만, 왜 이렇게 빨리 나오는 거냐.
"…여긴, 왜?"
"아, 벌베이지 교수님께 물을 게 있었습니다."
"……."
스네이프는 입을 벌렸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갈 깊게 생각하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스네이프를 선두로 다른 교수들도 하나 둘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무슨 소개팅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쭈뼛거리는 거지.
"들… 었느냐?"
"네, 네? 안 들었는데요? 스네이프 교수님께서 감사인사 하는 거 못 들, 었…"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내가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어쩐지 불편해진 난 어색하게 손을 꼼지락 거렸다. 스네이프도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창백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보다 못한 벌베이지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나한테 물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니?"
"아, 그게… 나중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크라우치 2세가 섞여 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말한다면 그를 찾는 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솔직히 다이애건 앨리를 잘못 말해 녹턴 앨리로 들어갈 가능성만큼이나 적었지만, 뭐, 변수는 언제나 존재했다.
스네이프는 벌베이지와 내 대화를 듣고는 반쯤 넋 나간 정신을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눈가를 덮던 손을 내리고는 침착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들은거지?"
"대화 내용을 다 듣지는 않았습니다. 스네이프 교수님이 말하시는 것만 들었어요."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교수들이 하는 회의야 뻔했다. 전달사항이나 지시사항같은 걸 말했겠지. 그 중에 학생이 알면 안 되는 사안이 있었나? 그런 거라고 해봤자, 위즐리 쌍둥이의 O.W.L. 성적을 두고 푸념하거나 시험의 문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러든 저러든 나에겐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교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는 걸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이라면, 말하지 않을게요. 그보다 저 기숙사로 가 봐도 됩니까?"
나는 일부러 끝 쪽에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되도록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스네이프가 정신을 차리면 다음 수업 시간을 말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성 뭉고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스네이프와의 수업은 어영부영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래, 가 보거라."
스네이프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눈으로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도대체 뭐지. 난 뭔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며 빠르게 뒤를 돌았다. 약간은 가벼워진 마음이기도 했다.
스네이프가 까먹은건지 이제 특별 수업은 없었다.
"아, 수업은 내일부터다."
스네이프가 다급히 말하기 전까지만 없었다. 다시 생겨난 특별 수업에 조금은 올라가던 입꼬리가 다시 바닥을 기었다. 귓가에 이명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장점 500개 적어오기, 장점 500개 적어오기, 장점 500개……시발.
* * *
Side, Severus Snape
"들은걸까요?"
"항상 무표정이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세베루스, 알겠나요?"
"아뇨."
세베루스는 드레이코가 간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는 검정색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며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반응에, 다른 교수들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블랙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못마땅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스네이프, 뭐하자는 거야? 너 혼자 생각하고 말겠다는 건가? 드레이코의 병을 고치려면 작은 거라도 필요하거든?"
블랙은 요즘 세베루스의 말에 시비를 걸고 싶어 안달난 것 같았다. 루시우스와 카르카로프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블랙은 가끔 혐오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곤 했었으니까. 아즈카반에서 갇히며 잊고 있었던 증오가 서서히 피어나는 듯 했다.
아예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아즈카반으로 쳐 넣었어야 하는건데. 세베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랙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눈은 블랙을 보는 것 보다는 무생물이나 한심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의 집합체가 시리우스 블랙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모든 생각을 일일히 너한테 보고해야 할 의무라도 있나? 게다가 이렇게 넓은 복도에서 말하는 건 모두가 들으라고 외치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그와트도 잘 기억하지 못하다니, 디멘터한테 뇌를 다 빼주고 왔나보지?"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블랙이 짓씹듯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그의 분노서린 말에도 세베루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드레이코가 있으면서 학창시절의 증오는 조금씩 옅어졌지만, 깊숙히 박힌 감정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세베루스는 도리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물었다.
"디멘터가 뇌를 가져갔냐고 말했다. 아니면 원래부터 뇌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스니벨리, 그러는 넌-"
"너와 수준에 맞는 변명 밖에 부르지 못하나? 벌써 내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한가?"
가소롭다는 듯한 눈빛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말투가 블랙의 화를 더 돋구어주었다. 비꼬기도 재능이라면 세베루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건 블랙도 마찬가지였다.
"하, 멍청한 건 네가 아니라 너겠지. 방금 방음 마법을 건 것도 못 봤냐? 이제는 그 기름진 머리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맛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둘 모두 그만-"
"말은 잘 하는군."
세베루스는 사실 반쯤 화가 나 있기도 했었다. 블랙이 3할 정도 더 기여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드레이코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의 일부와도 같았던 증오감이 분노와 똘똘 뭉쳤다. 세베루스는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이었으나 마루더즈와 릴리, 드레이코에 한에서라면 달랐다.
세베루스는 일부러 단어 하나하나를 알아 듣도록 느릿하게 말했다. 블랙한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진심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블랙이 지팡이를 세베루스에게로 겨눴다. 아마 폭발 마법도 블랙이 건 거겠지. 세베루스도 빠르게 호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둘 모두 주위에 교수들이 있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여기가 어딘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세베루스와 블랙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그들 뿐이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세베루스, 조금 진정해요. 시리우스, 당신도 좀-"
"리덕토!"
"엑스펠리아르무스!"
"프로테고!"
세베루스는 무장해제 마법을 막으며 다시 미소 지었다. 덕분에 블랙이 더 화가 난 표정이 되었다. 세베루스는 그걸 노리고 웃었던 거였다.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의 마법은 강력했지만 꽤 난잡했다.
그는 포터 패거리를 보면서도 참아왔던 짜증과 분노, 깊으면서도 얕게 남은 마루더즈에 대한 증오,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서도 드레이코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었던 자기혐오를 블랙에게 다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화풀이 대상인 셈이었다.
"임파다멘타!"
"프로테고!"
블랙은 분노에 빠져 생각나는 주문을 닥치는 대로 외우는 것 같았다. 주문을 불처럼 쏟아놓고 조금 화가 진정된 세베루스는 침착하게 무장해제 마법의 모션을 취했다. 블랙은 거기에 속아 푸른 막을 주위에 둘렀다.
"실렌시오!"
블랙의 입술이 조개처럼 닫혔다. 아즈카반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나온 사람과 계속해서 마법을 써 왔던 사람의 마법실력 격차는 명백했다. 세베루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간단한 손짓에 방어막은 먼지라도 된 듯 바스러졌다. 세베루스가 또다시 지팡이를 휘두르자, 블랙의 지팡이는 저 멀리로 내팽겨졌다.
세베루스는 승자의 여유라도 즐기는 마냥 느긋하게 블랙의 머리에 지팡이를 겨눴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경악섞인 표정을 짓는 블랙에게 비죽 비웃어주었다.
"방어 마법은 '물리적인' 공격만 방어하지. 그런 기본지식도 이제는 다 잊은건가? 정말 멍청하-"
"인카서러스!"
"인카서러스."
"인카서러스…!
동시에 세베루스와 블랙이 같은 밧줄로 포박되었다. 세베루스는 블랙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해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교수들을 발견했다.
스프라우트는 무언가를 상기하는 것 마냥 아련한 표정으로 부서진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플리트윅은 시한폭탄이 드디어 터졌구나- 정도의 표정이었다.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맥고나걸만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세베루스가 잠시동안 자신이 학생이 아닌 지 착각할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곳곳에 낭자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천장의 전등은 달랑거렸고 벽은 여기저기에 금이가거나 부러졌으며 다른 교수들도 자잘한 상처를 달고 있었다. 현실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세베루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이성을 놓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걸 자각한 건 블랙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옆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웅성대는 소리도 똑똑히 들었다. 이제 곧 몰려올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맥고나걸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의 이를 갈며 물었다.
"뭐 할 말 없나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싸움의 끝이었다.
* * *
나는 스네이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까지 써 가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내가 다급히 기숙사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인 시어도르와 다프네, 팬시가 휴게실 중간에 앉아있었다. 쟤들은 휴게실에서 사는건가. 어째서 맨날 휴게실에 보이는거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휴게실 문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셋의 윤곽이 더 자세히 잡힌다. 아니, 잠시만
"…셋이 아니야?"
"아, 왜 쳐? 드, 드레이코? 아, 안녕?"
"그럼 난 기숙사로 올라가볼게."
"네, 파울리 선배."
다른 슬리데린 학생들과 래번클로 학생 하나가 기숙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난 다른 무리의 학생인 줄 알았는데, 방금 전까지 이야기 하고 있었던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래번클로 학생 하나를 빼고 다른 슬리데린 학생들은 분산하듯 각자의 기숙사로 들어갔다.
"파울리 선배, 저번에 팬시한테 시비 걸었던 선배 아니야?"
"화해했어."
팬시의 담백한 말은 신뢰성이 바닥이었다. 팬시 파킨슨은 꽤 성격이 더러워서 당한 일을 두고두고 갚았다. 자존심이 세서 잘못을 잘 인정하지도 않았었고, 사과도 먼저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과를 잘 받아주는 편도 아니었고.
"…드레이코, 표정에 다 써져 있는데, 나도 화해 같은 거 잘하거든?"
"그렇다면 그런거고."
"아, 선배가 드레이코 말포이예요?"
방금 전의 래번클로 학생이다. 그 학생은 조금 앳된 티가 났는데, 찬란한 금발과 조금 진한 녹색 눈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누구지. 여학생은 싱긋 웃으며 허리를 굽힌 다음 두 손으로 교복 치마를 늘어뜨렸다.(드레스를 입었다면 잘 어울릴 법한 동작이었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이 안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포이 가의 장자를 뵙습니다. 전 아스토리아 그린그래스라고 해요. 다프네의 동생이죠. 혹시 방금 전의 말이 실례였다면 사과 드릴게요."
"…아, 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뵈어요. 그럼 전 이만."
다프네의 동생이었나? 특유의 고고하고 오만한 분위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는데, 꽤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린그래스는 다프네와는 거의 딴판이었다. 그래서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순수 혈통 귀족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예법에 철처하게 맞춘 말솜씨가 칼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프네가 평소답지 않게 조급한 말투로 외쳤다.
"아스, 내가 부탁했던 건?"
"알겠어-"
그린그래스가 여전히 나긋하게 말하며 슬리데린 기숙사를 나갔다. 이제 진짜로 세 명 남았군. 나는 묘하게 조용한 셋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장점 500개 적어오기 숙제는 머릿속에서 내팽겨쳐진 상태였다.
"왜 모인거야? 슬리데린 애들은 왜 저렇게 모인거고?"
"슬리데린 퀴디치 시합을 이기기 위해서. 같이 작전을 짠 거지."
다프네의 한 발짝 늦은 대답이 꽤 미심쩍었다. 하지만 셋은 다그친다고 말할 기색이 아니었다. 뭔가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게 서운함이라는 걸 인지했다.
"…알았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급하게 온 거야?"
"다 못 끝낸 숙제가 있어서."
"참 너답다."
시어도르가 상황을 환기하려는 듯 특유의 어조로 비꼬았다. 다프네는 당연한 듯 그런 시어도르를 타박했다. 팬시는 나를 흘깃 바라보며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드레이코, 삐진 건 아니지?"
"음… 서운했다면 미안해."
난 다프네의 말에 약간 누그러진 마음을 자각했다.
나는 꽤 생소한 감정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제는 곁에 셋이 없으면 당연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들과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도 생소했다.
우르릉-
"……?"
"무슨 소리지?"
"위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데?"
지하까지 울려대는 천둥같은 소리에 생각을 잠시 멈췄다. 난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위쪽을 투시 마법으로 살펴보았다.
"…나이 먹고 잘하는 짓이다."
"뭔 뜻이야? 위에 무슨 일 있어?"
"교수들이 싸우고 있어."
"뭐?"
감수성이 몇 초만에 박살났다. 아니, 학교에서 꼭 싸우고 싶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