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작파괴범-86화 (86/130)

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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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피가 나오던 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몸이 잠잠하기만 하다. 그 피도 내 피는 아니었지만. 이건 다 블러드 프루트인지 뭔지 하는 빌어먹을 과일 때문이었다. 그것도 농축해서 만든거라고 했지.

"진짜 괜찮은건가?"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 것도."

시어도르가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책을 펼친다. 진짜 넌 책만 읽는거냐. 나는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시어도르를 바라보았다.

"뭘 봐?"

"…아니, 아무 것도."

"넌 그렇게 말하는게 특기냐."

시어도르가 입술을 내밀며 계속 투덜거린다. 그러는 넌 불평을 하는게 특기인건가. 물론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어디 가?"

"래번클로 기숙사."

"…? 왜?"

"토론하러."

"……?"

어쩐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어도르를 놔둔채로 슬리데린 기숙사를 나섰다. 뒤에서 팬시가 외친다.

"점심은?"

"괜찮아."

애초에 시선이 그렇게 몰리는데 밥이 잘도 넘어가겠다. 빨리 가서 침입자가 있는지 알아도 봐야하고. 나는 대충 손을 휘젓고는 래번클로 기숙사로 향했다.

* * *

다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머리는 어지러워서 뱅뱅 돈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독수리 석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기로 이야기가 된건지, 독수리 석상은 당연한 듯 문제를 냈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게 뭐지?"

"빛."

"이유는?"

"약 초속 30만 킬로미터니까."

"그게 이유인가?"

독수리 석상은 약간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맞는데. 나는 빨리 열라는 눈짓을 보냈다. 독수리 석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설마 수학 못하냐.

"…이건 상식 아닌가."

"나를 납득시켜라."

어째서 새면서 짜증나는 표정을 짓는거지. 하긴 새대가리한테 뭘바라겠어. 나는 독수리 석상을 반쯤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뭐 이렇게 탑이 높은거야? 다리가 부들거려서 죽을 것 같다.

"그럼… 빛보다 빠른 걸 말해봐."

"……예를 들어 생각같은-"

"빛은 약 초속 30만 킬로미터 인데, 1초에 빛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럼 1초에 30만 가지의 생각을 해봐. 참고로 1초에 30만 킬로미터니까 1분에는 1800만 킬로미터고 1시간에 108000만 킬로미터. 1년에는 946080000만 킬로미터인데, 넌 1년에 946080000만 킬로미터를 갈 수 있어? 아니면 1년에 946080000만 가지 생각을 해? 그것도 아니면 빛보다 빠른 걸 알고 있는건가?"

"……."

"문, 열어."

독수리 석상이 눈을 확 찌푸리며 문을 연다. 그렇게까지 진게 기분이 나빴던거냐. 숨도 차는데 말까지 길게 했다. 어째서 살면서 가장 길게한 말인 것 같지.

나는 독수리 석상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래번클로 기숙사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마침 나가려던 참인 남학생과 마주쳤다. 그 시비걸던 남학생인가. 남학생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들어온거야?"

"……?"

남학생은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남학생이 다시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래번클로의 반장인 골드스틴이 미소지으며 말을 가로챘다.

"아, 말포이. 온거야? 독수리한테 문제 좀 쉽게 내주라고 했는데 풀만했니?"

"네."

"조금 일찍 왔네? 점심연회는 이제 막 시작했을거야. 래번클로 휴게실에서 기다릴래? 아니면 연회장에 내려갈거야?"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래, 고마워."

골드스틴이 웃으면서 남학생의 목을 움켜잡았다. 구석진 곳으로 가서는 억눌린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다 들렸지만.

"레이븐, 놀란 기색이다?"

"……."

"너 문제 어렵게 내라고 저 새대가리한테 말했지?"

아, 그건 남학생이 한건가. 레이븐이라고 불리는 남학생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변명하는 어조로 중얼거린다.

"그래서 나가려고 했-"

"왜 나대는거니, 그것도 말포이 가문 앞에서. 순수혈통을 싫어하는건 알겠지만 그걸 다른 애한테 풀지는 말라고. 억울한 애 잡지 말란 말이지. 쟤는 죽음을 먹는 자도 아니고, '그 자'의 숭배자도 아니잖아? 게다가 말포이 가문은 위험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고."

골드스틴이 여전히 이를 악물면서 말한다. 입을 안움직이고 저렇게까지 작게 말할 수 있다니. 조금은 존경스러웠다.

남학생은 그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을 팍 구겼다. 표정에서부터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저학년 시절에는 엄청 시비 걸고 다녔었대. 순혈주의자 일거야. 그리고 말포이 가문이라면 틀림없이 그 자-"

"후배님, 제발 말 좀 끝까지 듣자. 내가 하려는 말은 지금부터니까. 아픈 애한테 이러는거야? 정신 나갔어? 머리가 어떻게 된거니? 아니면 조금 아파? 폼프리 부인한테 가볼래? 정신교육 한 번 더 해줄까? 혹시 맞고 싶니? 아, 나중에 제대로 사과 해."

"……."

"레이븐, 대답안하니?"

"미안… 사과할게."

래번클로는 다 또라인줄 알았는데, 제이콥 골드스틴만 또라이 였구나. 나는 반쯤 납득하고 의자에 앉았다. 아까부터 후들거리던 다리(계단의 부작용이다)가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과자 좀 먹으면서 기다려."

"네."

골드스틴이 싱긋 웃으면서 남학생을 데리고 나간다.

나는 둘이 기숙사를 나간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게실에 있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 점심 연회에 간건가.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휘둘러서 기숙사를 살펴보았다. 적어도 여기에는 쥐가 없고, 다른 침입자도 없다.

"래번클로는 아닌건가."

"뭐가 아닌데?"

뒤를 홱 돌아보니 눈이 크고 귀에 지팡이를 꽂은 여학생… 루나 러브굿인가. 아니,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온건지 모르겠다. 러브굿은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 말포이."

"…그래, 안녕."

"혹시 토론 할거니?"

"어."

"그래, 그렇구나."

러브굿이 수긍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수긍이 빠르다. 러브굿이 잡지를 보면서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여전히 몽롱한 목소리였다. 약간 자다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몸은 괜찮아?"

"……어."

"골드스틴이 토론 규칙은 알려줬니?"

그건 또 뭐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러브굿이 뚫어져라 보던 잡지에서 눈을 뗐다. 그러고는 대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대용품 인거냐.

"알려줄까?"

"그러던지."

"좋아."

러브굿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외로 의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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