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120
나는 5초 정도 뒤에 가출한 정신을 회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난 기억력 수정 마법을 할 줄 알았고, 블랙은 아직 탈옥수였다. 잡아서 기억 조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중요한 건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냐는 거지…."
쿵쿵, 방어막에 성실히도 머리를 들이박는다. 지팡이를 까딱여 쩌적 금이 간 푸른 막을 수리했다. 원 모양으로 둘러싼 동물들은 하나같이 위협적이었다. 침을 뚝뚝 흘리거나, 부리부리한 눈을 핏발이 설 정도로 떴고,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게 발을 굴렀다.
손을 눈가에 가져다 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들이 안 오니 동물들이 쫓아온다.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는 상황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
"드레이코, 여기 앉아!"
"……."
수업마다 아무 말도 안 하는 이와 있는 게 그리도 좋은 걸까. 매번 생각하지만, 파킨슨의 심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파킨슨은 내가 기괴한 소리를 내도 특별한 목소리라며 손뼉을 칠 것 같았다.
평판이 깎여도 내가 하는 일을 성심성의껏 도와준다거나, 아프면 저가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병동으로 데려다준다거나,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나시사와 같은 눈빛을 보낸다. 그녀는 내게 과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이번 수업은 어둠의 마법 방어술이잖아. 제발 제대로 된 교수였으면 좋겠어. 뭐, 옷차림을 보아하니 순수 혈통은 아니겠지만.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잡종일 수도 있겠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평하는 내용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말이었다. 파킨슨이 이런 발언만 하지 않았다면 나와 친했을까? 쓸데없는 가정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잡종이 아니라 머글 혈통이고, 실력과 출신은 상관없잖아."
"어쩜!"
파킨슨이 조그마한 입술을 움찔 떨었다. 찬양을 쏟아낼 준비를 거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질리지도 않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파킨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마음마저 착해, 드레이코! 얼굴도 성격도 실력도, 뭐 하나 빠진 구석이 없는-"
"죄송합니다. 조금 늦은 것 같군요."
잔뜩 헤지고 덧대 입은 옷 위로 흉터 자국이 군데군데 자리한다. 꼬질꼬질한 얼굴은 2일을 씻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인 리무스 루핀이었다. 교실이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고, 탐색하고 평가하는 듯한 눈빛은 주위를 내리눌렀다. 루핀은 날카로운 아이들의 태도에도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오늘은 교재가 필요하지 않아요. 실습할 겁니다. 모두 절 따라오세요."
교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학생이었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아이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럼 처음부터 말해주면 되잖아. 지금 누구 놀려? 소문대로 그리 좋은 교수는 아니네. 파킨슨이 악의 섞인 조롱을 속닥였다. 루핀이 하는 모든 것이 아니꼬운 것 같았다. 나는 꽤 다양한 비꼼을 들으면서 루핀의 뒤를 따라야 했다.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가세요."
루핀이 나긋하게 웃으며 휘적휘적 손짓한다. 우리가 애야? 파킨슨의 불퉁한 물음에는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13살짜리가 그럼 어른일까.
교실 안에는 루핀의 옷차림처럼 낡은 장롱만이 존재했다. 쿵, 덜거덕…. 아이들의 불안함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장롱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쾅, 쿵, 발길질하는 것과도 같은 소리였다.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아이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며 딱 굳었고, 데이비스와 벌스트로드는 문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하하, 그리 위험한 건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있는 것이 교수랍니다."
"그럼 신비한 동물 돌보기 교수는 교수가 아니라는 건가?"
자비니가 웃음기 섞인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아이들의 경계심은 하늘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가 버릴 듯했다. 히포그리프의 사건을 아직 잊지 못한 건가. 소문을 잠재우려는 노력은 유독 슬리데린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쾅!
"꺅!"
"저 장롱에는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건가요?"
"우, 움직였어!"
파킨슨이 꾸역꾸역 내 팔을 잡아 쥐었다. 장롱 안의 물체는 더욱더 과격하게 움직였다. 쿵! 구웅-! 발길질이 울릴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범벅 된다. 아이들은 새하얗게 질려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내, 내가 지켜줄게! 걱정 마!"
파킨슨이 작은 손을 힘차게 쥐면서 입매를 꾹 다물었다. 쟤는 또 왜 저럴까. 굳이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아서 떨떠름히 고개만 주억였다. 병동의 신세를 진 후로, 아이들은 자주 맥락 없는 반응을 보였다.
"교수가 동행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자, 안전하죠?"
루핀이 다급하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덜컥거리는 장롱이 잠잠해지자, 아이들은 숨을 돌린 것 같았다. 괜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거나, 누가 보아도 어색한 헛기침을 한다. 루핀이 쿡쿡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3학년의 교육과정에도 있는 생물이에요. 여러분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저 안에 들어있는 건 보가트고요. 다들 보가트가 무엇인지 아나요?"
아이들이 머뭇머뭇 서로를 쳐다본다. 대답을 해도 될지 확인받는 것 같았다.
"다프네 그린그래스? 대답해보겠니?"
"보가트는 상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으로 변해서 상대에게 겁을 줍니다. 어둡고 닫힌 곳을 좋아하고요."
"훌륭하구나. 슬리데린 5점이란다."
한층 격양된 톤은 연극을 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기숙사 점수를 올려주어서 호감을 살 작정인 듯했다. 보답으로 얼음보다 서늘한 아이들의 눈길이 돌아왔다. 루핀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무슨 연애 시뮬레이션이냐.
"아직 보가트는 형체가 없어요. 하지만 이것이 나오면 우리들 각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거로 변하겠죠.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유리하답니다."
루핀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긴장이 풀린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루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우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무엇으로 변할지 알 수 없거든요. 보가트를 대할 때는 이런 점이 중요하답니다.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게 이점으로 작용하죠. 보가트가 무엇으로 변할지 망설일 테니까요."
루핀은 슬리데린에게 질문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깨달은 것 같았다. 혼자서 속사포로 내뱉는 수업방식은 이상하게도, 슬리데린에겐 익숙했다. 머글 혈통의 교수님을 만날 때마다 반복하는 수업 방식이었으니까.
"보가트를 물리치는 방법은 아주 쉬워요. 그들은 웃음소리를 싫어하거든요. 조금의- 정신력이 필요하지만요. 리디큘러스, 그게 주문이에요. 모두 따라해봐요. 리디큘러스!"
"리디큘러스."
담담하고 작은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속살거리는 수준의 목소리였지만, 루핀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것 같았다. 그가 한층 밝아진 안색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시범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한데, 지원자 없나요?"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루핀이 입술을 잘근 물어뜯으며 후, 한숨을 토해냈다.
"드레이코 말포이? 시범 좀 보여주겠니?"
드레이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파킨슨이 가시가 돋은 것처럼 뾰족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아이들이 맞추기라도 한 듯 루핀을 노려본다. 마법을 쏘기라도 할 기세여서, 나는 다급히 대답을 내보냈다.
"네."
"고맙구나. 정신을 집중하고 두려워하는 게 재미있는 다른 무언가로 변하는 상상을 해보렴. 네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니?"
"엄…."
이번 생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머릿속이 백지인 마냥 새하얗다. 전생의 일도, 드레이코 말포이를 연기하는 것도, 큰 나비효과도 보가트가 되지 않는다. '신의 권능'이 그걸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 외에 딱히 두려운 일은 없어서, 나는 애써 눈알을 굴렸다.
"그건 사생활 침해 같은데요, 교수님."
파킨슨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 머뭇거림을 오해한 듯싶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 보가트도 모두가 볼 건데, 뭔 사생활 침해야.
"그럼,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니? 최대한 자세하고 구체적이어야 해." 루핀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좋아."
루핀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슬리데린의 수업에서 처음 보는 밝은 미소였다. 고작 이런 일로 기뻐하다니. 어쩐지 측은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루핀이 끊이 닳아서 해진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준비되었니?"
"…네."
"좋아, 주문은 리디큘러스야. 드레이코, 앞으로 나가렴!"
부드러운 손길이 몸을 떠민다. 나는 재빠르게 장롱 가까이 다가섰다. 쿵쾅대는 소란이 콩콩거리는 심장을 감추어 주었다. 보가트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하며 지팡이를 쥐었다. 땀이 맺힌 손이 지팡이와 맞닿았다. 불쾌한 감촉이었다.
"알로호모라!"
끼이익, 조금 전의 소란은 거짓말이었다는 듯, 조용하게 문이 열렸다.
[작품후기]
2019. 3. 27.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