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작파괴범-11화 (11/130)

11회

6

답장을 기다리면서 손 놓고 구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그리드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내가 거의 다 수습한 것 같았다.

잘못된 이야기를 고쳐주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지나가는 식으로 말하고, 해그리드의 수업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덕분에 여론은 '루베우스 해그리드가 교수가 될 자격이 있는가'에서 '드레이코 말포이가 단단히 미쳤다' 정도로 바뀌었다.

원작 유지 때문에 억지로 하던 일도 전부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잉크를 잔뜩 묻힌 깃펜을 성의 없는 태도로 끼적였다. 격식과 예의를 차리는 슬리데린은 사유는 물론 잉크의 색깔과 글자의 모양까지도 따질 것이 틀림없지만, 담당 교수에게 제출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드레이코, 어디 가?"

"슬리데린 사감실."

"거긴 왜?"

"퇴부서 내려고."

침대에서 누워 수영하듯 몸을 휘젓던 크레이브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크레이브의 사고가 다시 작동하기 전에 유유히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인 질문에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손에 들린 양피지의 두께가 꽤 두툼하다. 하나하나가 순수 혈통의 모임이라는 걸 고려하면, 꽤 살인적인 양이었다. 드레이코 말포이가 말포이 가문이기 때문에 생긴 모임이 반,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 모임이 반이었다.

쉬는 시간을 갈아 넣다시피 한 빡빡한 스케줄을 드디어 치워버릴 수 있다.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사감실은 슬리데린 기숙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에 차가운 음성이 답했다.

"들어와라."

"안녕하세요, 세… 교수님."

나는 혀를 깨물어서 세브라는 말을 겨우 멈췄다. 원작에서 드레이코 말포이가 스네이프와 친했기 때문에, 나도 세베루스 스네이프와 친하려고 노력했었다. 덕분에 그의 애칭을 부르는 건 물론이고, 같이 차를 마시거나 사소한 농담도 하는 사이였다. 나는 스네이프의 습관과 표정 변화까지 줄줄이 알았다. 지금의 스네이프와 그리 친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스네이프의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그는 채점에 몰두한 것 같았다. 기름진 머리는 무미건조한 시선보다도 더 고역이었다. 머리 좀 감고 다녀요. 세브, 몸이 청결해야 건강해진다는 말도 몰라요? 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온 힘을 다해 짓씹었다.

"무슨 일이지?"

죽죽, 성의 없이 그어지는 빨간 펜은 잠시 내가 온 이유를 망각할 정도로 냉정했다. 트롤 수준이 저렇게 받기 쉬운 점수였던 건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핀도르 애들의 성적일까, 애들이 시험을 절망적일 정도로 못 본 걸까. 스네이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퇴부서 제출하려고 왔습니다."

"퇴부서?"

아래위로 움직임을 반복하던 손이 그제야 멈추었다. 무감정한 눈은 두툼한 퇴부서와 덩그러니 서 있는 나를 흝고 지나갔다.

"…어째서?"

싸늘한 발언은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스네이프의 입꼬리가 일자로 다물어지고, 눈은 더 깊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게 퍽 심각한 표정이라는 걸 눈치챘다. 볼드모트에게 임무를 받아 덤블도어를 죽이려고 시늉할 때, 7학년이 되어서 항상 만날 때마다 짓던, 걱정이 담긴 표정이었다.

"별로 의욕이 안 생겨서요. 퇴부서는 여기에 내는 겁니까?"

"…그래."

"가 보아도 될까요?"

"드레이코 말포이."

뚝뚝 떨어져서 스네이프의 손에 정착하는 빨간색 잉크는 마치 피 같았다. 스네이프는 잉크가 흘렀다는 것도, 그게 양피지를 촉촉이 적신다는 것도 전부 모르는 것 같았다. 검고 깊은 동공은 나만을 뚜렷하게 응시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알겠습니다."

끼익, 나무문이 삐꺽 대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퇴부서를 제출하면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상쾌할 듯싶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고 이상하기만 했다. 원인을 찾으려 애쓰다가 엇, 하는 소리를 냈다. 고일이 날린 딱밤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지금은 3학년이었다. 스네이프와 친해진 건 7학년이었고 말이다. 나는 3학년 당시의 스네이프를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아니라 목석이었다. 해리 포터 옆에서만 반응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로봇. 스네이프는 그 정도로 나에게 무심했다.

한술 더 떠서 스네이프는 내 상태를 안다. 내가 드레이코 말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드레이코를 흉내 냈다며 역겨워해도 모자랄망정, 섬세하게 상태를 살피며 나를 걱정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던가?

'그' 스네이프가?

"오… 멀린…."

경악 어린 신음이 입에서 뛰쳐나왔다. 시발, 쟤 누구야.

변신술 시간에도 스네이프는 발랄하게 내 머릿속을 휘젓고다녔다. 시도 때도 없이 드는 생각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내 문제를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스네이프도 있다. 내가 드레이코 말포이가 아닌 걸 안다면, 그는 나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었다. 약점이 잡힌 격이라 삐딱하게 대해도 나는 아무런 말을 못 할 것이었다. 폼프리는 모든 호그와트생에게 친절하다지만, 스네이프는 그것도 아니었다. 스네이프는 오히려 학생을 싫어했다. 가끔 보면 혐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포이 군, 집중하세요."

"네…."

멍하니 이어진 대답에 맥고나걸은 인상만을 구겼다. 입술을 계속해서 씰룩였지만, 내 앞에는 이미 찍찍거리는 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회색의 칙칙한 쥐는 원래 흑 빛깔의 머그잔이었다. 할 일을 다 하고 노는데,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맥고나걸의 찐득한 눈총을 무시할 만큼, 내 머릿속은 온통 얽히고설켜서 복잡했다. 뇌를 꺼내서 몇 번 뒤집고 흔든 기분이었다. 어째선지 스네이프는 만날 때마다 머릿속에 폭탄을 뿌리는 것 같았다.

내가 1학년 때 스네이프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챙겨줄 정도였던가? 갑자기 친절해진 말투는 왠지 모를 공포감만을 조성해주었다. 설마 스네이프가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시한부라던가…? 죽을병에 걸려야만 설득되는 상황이다.

바르테미우스 크라우치 2세가 지금 탈출한 거라는 가설도 논리적이었다. 스네이프를 연기하는 크라우치 2세라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일부러 해리 포터 앞에서 나를 아끼면서 포터의 성질을 살살 긁어댔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스네이프가 날 좋아하는 거로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

이상하게 시야가 뿌얬다. 아이들의 얼굴도, 맥고나걸도, 교과서의 글자도 전부 흐릿한 윤곽만 잡힌다.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도리어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취된 것처럼 늘어진다.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는 파업을 선언했고, 맥고나걸의 음성이 알지 못하는 소리로 바뀌어 귓가에 웅웅 울렸다.

쿵….

묵직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제는 보게 해줄 생각도 없는지 무겁게 감기는 눈커풀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것과 차단된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정적이 주위를 휘감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생각만 하라는 건가.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은 갔다. 망할. 신새끼는 반드시 족치고 죽는다, 내가.

캄캄해진 시야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확 밝아졌다. 갑자기 변한 시야에 눈이 부실 법도 했지만, 그 빛은 눈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 상황이 세 번째인 만큼 나는 이 모든 것이 퍽 익숙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공간에서 더욱더 새하얗게 존재감을 증명하는 이를 발견하자, 순간적으로 나도 몰랐던 폭력성이 돋아났지만 말이다.

"죽고 싶어서 다시 부른 거지?"

- …하하.

"저번에 준비하고 있다던 그 선물? 잘 때 부르지, 왜 수업 중에 부르는 거야?"

- 선물이 완성되어서 조금 신났던 것 같구나.

신새끼가 새하얀 반지를 자랑하듯 코앞에서 흔들었다. 때 묻지 않은 고리는 표백된 것만큼 맑았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서 모든 게 비춰 보일 것도, 손톱보다도 얇아서 툭 치면 부러질 것도 같았다. 이건 반지라기보다… 하얀 실을 동그랗게 엮어놓은 고리였다.

- 네 친우들이 네게 남긴 말을 담아왔느니라. 꿈에 개입해서 대답을 유도하느라 고생 좀 했지. 대신 신의 권능이라, 쓸 때마다 몸에서 부작용이 일어날 것 같구나.

"무슨 부작용?"

- 피를 토하는 정도란다. 권능을 쓸 자리가 부족해서, 공간을 채우기 위해 그런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보이는 것과는 달리, 피만 토하고 끝날 것이니라.

그렇게나 가늘면서도 반지는 꿋꿋이 제 모양을 유지했다. 나는 조심스레 손가락과 반지를 맞추었다. 크기가 딱 맞아서 더 기분이 나빠졌다. 신새끼는 언제부터 내 손가락 크기를 안 걸까.

- 잘 가거라. 이젠 정말 안 부르겠느니라!

"잠깐, 물어볼 게 있-"

신새끼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머리 근처에서 손가락을 뱅뱅 돌렸다. 미쳤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 같아서 곱게 보이지 않았다. 사실 신새끼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짜증 나고 거슬렸다. 날 이곳에 떨어뜨려놓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만든 원인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욕이라며 혼자서 세뇌하고는, 침착하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주었다.

[작품후기]

2019. 2. 27. 수정완료.

스네이프: (나름 잘 대해주려 노력중)

디키: 세브가 왜 저럼...? (문화충격)(공포)

+) 세브 진짜 많이 노력했습니다.... 우리 겨슷님 성격 알잖아요.... 저 말은 정말 많이 고민해서 내뱉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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