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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꿈의 고백(2부 完)
“리들 선배!”
리들의 뒷모습이 보이자 리브는 숨을 가쁘게 쉬며 청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리브는 더욱 더 보폭을 크게 해서 리들의 뒤를 쫓았으나 그와 함께 청년의 보폭도 커졌다. 심지어 속력을 높이기까지 한다. 명백한 거부의 몸짓에 리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들 선…….”
급히 발을 놀리던 리브는 그만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그 소리에 리들은 움찔했으나 잠깐 멈칫할 뿐,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모양을 보였다. 그 모습이 리브는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다 못해 서러움이 몰려왔다. 돌바닥에 무릎이 세게 부딪혀 피가 맺혀 아프기 까지 하나 리브는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를 쫓는 모습은 몹시 가련해 보인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랑 얘기 좀 해요. 전부 오해에요.”
“…….”
“리들 선배!”
리브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리들은 참으로 꿋꿋했다. 아예 리브의 존재를 깨끗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냉정한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그 추측에 도달하자 리브는 야속함과 서운함이 맞물려 이제 원망감까지 들었다. 왜 나를 봐주지 않아. 내가 이토록 부르는데. 왜.
“리들 선배!”
이쯤이면 한 번 쯤 뒤 돌아볼 만도 했지만 리들은 미동도 없었다. 이런 독한 놈. 리브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리들과 거리를 좁히려 했으나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그게 자신과 그의 관계 같아서 리브는 비참해졌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리브는 빽 소리쳤다.
“야! 얘기 좀 하자니까! 톰 리…….”
리브가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리들이 휙 몸을 돌려 소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뭐?”
리들을 반응을 바랐지만 그가 순순히 반응을 해올 줄 몰랐던 리브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절뚝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내딛어 리들과 거리를 좁히는 것은 여전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던 리들은 리브 쪽으로 다가와 말을 툭 내뱉었다.
“할 말 있으면 해.”
아까까지는 상대를 안 하다가 갑자기 리브에게 용건을 말하라는 리들의 태도는 조금 갑작스러웠다. 리브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무 말이나 뱉어버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기도 했다.
“미,미안해요.”
“뭐가.”
리들의 태도만큼이나 리브의 사과도 대뜸 다가왔다. 그에 리들은 건조한 음성과 메마른 태도로 대응했다. 뭐가 미안한데. 리브는 입술을 달싹 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오해라고 말하고 찬찬히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은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몹시 힘들어서 그 시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리브는 차라리 리들이 레질리먼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반면 리브의 불투명한 태도에 리들은 온갖 생각이 들고 있었다. 상상력과 불안감이 맞물려 얼토당토아니한 생각까지 미친다. 내 마음을 못 받아줘서 미안하다는 거야? 하지만 리들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현실이 될까봐. 그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대체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지?”
리들의 불안한 심경은 같은 단어를 두 번 말한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리브가 입을 열기도 전에 리들의 미성이 소녀의 귓가에 카랑카랑하게 박혔다.
“멘토와 멘티? 파트너? 선후배?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남매 같은 사이?”
지금까지 리들과 리브가 대외적으로 서로에 대해 규정지었던 모든 단어들이 리들의 입술에서 튀어나와 둘 사이를 수놓았다.
“네가 하려던 말이 이 딴것들 이라면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내내 잔잔함을 유지해오던 리들의 말투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리브는 당장이라도 넘칠 것 같은 리들의 기세에 더욱더 입이 막혀버렸다.
“하나만 대답해. ‘난 너한테 뭐야?’”
이제 리브는 리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 태도에 리들은 더욱 더 불안감이 증폭될 뿐이었다. 이제는 분노가 꿈틀대며 점점 위험 수준까지 차올랐다. 참담한 절망까지 함께. 그녀를 그토록 원했지만 자신은 절대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그걸 다시 한 번 깨닫자 리들 내면의 소유욕이 잔혹하게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서라도 움켜쥐리라. 강제로라도 가질 것이다. 지금껏 품어온 마음이 오갈 곳 없어진 리들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치밀어 올랐다. 평소 같으면 곧바로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자각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다.
“리,리들 선배는……. 선배는…….”
하나씩 차례대로 틀어지자 이제는 별거 아닌 것 까지 리들의 극한 감정을 하나씩 보태고 있었다.
“그놈의 선배 소리 좀 집어 쳐!”
리들이 분노를 쏟아내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사소한 것에서 인내심을 잃고 분출되었다. 깜짝 놀란 리브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리들의 무시무시한 얼굴과 마주했다. 리들의 분노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맞닥뜨리자 당황과 함께 겁부터 먹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리브는 오늘처럼 당황스러운 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 대처 하나 못하는 자신이 이토록 멍청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정신이 멍하고 아득해서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게 순서지만 그 생각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들어주지도 않을 테지. 더 화만 낼 거야. 무서워. 리브는 더 이상 리들의 격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뭘요?”
혼란한 마음에 결국 헛소리가 튀어나가 버렸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을 보며 리브는 그의 분노가 한계까지 솟아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극도로 감정적인 분노에 차있는 리들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뭐냐고?”
하지만 폭발할 듯한 분노와는 달리 허탈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몰랐다. 리브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증폭하며 심장 박동소리가 빨라졌다.
“전에도 너는 내게 물었지.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정녕, 모르겠단 말이지.”
리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 짙은 원망과 함께 희미한 증오를 비치고 있었다. 그 감정을 읽어낸 리브는 쿵하고 마음이 급격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마치 그날, 별장에서의 일이 되풀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베리타세룸을 썼던 그날처럼 지금 이 상황도 자신 때문이었다. 리브는 울고 싶어졌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니 전…….”
“됐어, 필요 없어.”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리들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들끓던 흑안은 이제 단념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리들은 더 이상 부질없는 짝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짝사랑이라 규정하고 인정하는 것은 리들에게 굴욕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리들은 그보다도 거절당한 마음이 더 괴로웠다. 청년이 내내 참고, 배려하고, 기다려온 것은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나도 이제 지쳤어.”
자신을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본심이었다. 어리석게도 자신은 분명한 사실을 부정해왔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정말로 네가 날 좋아한다면 이럴 수는 없어! 전부 자신의 헛된 기대이고 망상이었다. 리들의 새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 너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겠어.”
리들이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리브가 뻗은 손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음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항상 자신을 부드럽게 응시하던 눈이 마치 예리한 칼날 같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빛이 차디차다. 평소 자신과 싸우고 화를 낼 때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리브가 리들을 향해 다시 손을 뻗자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따라오지 마.”
여기서 더 그녀와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마리라. 리들은 자신의 성정을 잘 알았다. 정말로 그녀를 망가뜨리고 마리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끓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막돼먹은 행동을 할 것이 분명했다. 불과 방금 전에 그녀를 단념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흑안이 깊게 일렁이지만 이내 어긋난다.
“이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난 분명히 말했어.”
리브는 지금 리들의 말이 경고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이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가버리면 다시는 자신을 보지 않으리라. 리브는 리들이 그럴 거라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그건 싫어!”
리브는 다친 무릎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리들을 쫓아갔다. 그녀는 여기서 리들을 놓치면 영원히 끝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러자 마음이 터질 것처럼 다급해지며 아까의 우물쭈물한 행동이 자취를 감췄다. 무슨 말이든 해서 그를 붙잡아야 했다. 리브는 간신히 리들의 망토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내 얘기를…….”
다시 대화를 하고자 하는 리브의 의도는 이루어지 못했다. 리브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악력이 덮쳐왔다. 순식간에 손목을 잡혀 벽으로 밀쳐진 소녀는 악소리를 내며 고통을 호소했으나 리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비록 말하는 모양새는 무심하고 차가웠어도 대하는 행동에 있어서는 꽤나 세심했던 리들이기에 그 변모는 리브에게 서글픔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나를 또 때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리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고통 대신 귓바퀴에 무언가가 스치듯 하더니 뜨거운 기운이 닿았다. 리들이 리브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난 분명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
청년의 음습한 목소리가 소녀를 에워쌌다. 눈을 뜨고 본 리들의 얼굴은 일촉즉발과도 같아서 리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리들의 살벌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잡혀있는 손목의 고통도 잊은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내 경고를 어긴 건 너야.”
청년의 입술이 소녀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덮었다. 그와 동시에 리브의 벽안이 커졌다. 무지막지한 기세인 만큼 입맞춤은 배려 한 조각 없었다. 낯선 감각에 부르르 떠는 소녀를 다루는 것은 꽤 쉬웠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안달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소녀의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뜨겁고 말캉한 것이 침투하더니 순간 치열을 훑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리브는 반사적으로 눈앞의 이를 밀어냈다. 그리고 청년은 무서운 기세와는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리브는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눈앞의 이를 응시했다. 하지만 리들의 몸이 다시 가까워졌고 리브는 두려움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입술도, 그 어디에도 아무 느낌도 없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리들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속삭였다.
“나를 떠나겠다고? 끊어내겠다고?”
기세는 더없이 거칠고 포악했으나 얼핏 상처 입은 짐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천만에. 나는 너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어!”
그 목소리에는 깊은 집착과 어두운 욕망이 가득하다 못해 들끓어 넘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의 끝이 나를 떠나겠다는 말이라고. 절대로……. 용납 못해…….”
리브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려하자 리들은 상대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도록 종용 했다. 떨리고 있는 푸른 벽안을 보며 리들은 역시 그녀를 단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갈증이 나는데.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눈이 오로지 자신만을 보게 하고 싶었다. 자신을 증오하게 되더라도 옆에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질 수만 있다면 그 무슨 대가든 치르리라. 설사 자신에게 원한을 갖게 되더라도…….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망가뜨릴 것이다. 이제 멈출 수 없었다. 리들은 끈질기게 잡고 있던 이성을 놓고,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면서도 변명을 뱉는다.
“전부 네 잘못이야. 나는 너를…….”
널 소중히 여겨왔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잠깐 리들의 얼굴에 아픈 표정이 스쳐지나갔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이제는 네 의사 따위 상관없어.”
그리고 청년은 다시 무지막지스럽게 입을 맞춰왔다. 리브는 두려움과 공포가 맞물려 아까와는 다르게 거센 저항을 시도했다. 방금 밀어낸 행동이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이번에는 달랐다. 하지만 리들은 잠깐 움찔할 뿐 이번에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리브의 반항이 거세질수록 입맞춤은 더욱 더 거칠고 광폭해졌다. 짐승도 이리 비신사적이지는 않으리라.
리브는 절대로 입술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리들을 거부했다. 그를 좋아한다 해도 이런 식의 취급을 받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평소 소중히 여길 때와는 정 반대의 대접에 리브는 너무나도 서러웠다. 입술이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그리고 이런 리브로 인해 리들은 이성이 돌아올 새도 없었다. 마치 진저리를 치는 것 같은 모습에 리들은 오기가 들었다. 잠깐 입술을 뗀 리들이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네가 이런다고 내가 멈출 것 같아? 이 빌어먹을 계집애. 또 나를 거부하면 가만두지…….”
흑안에 가득 핏발이 섰다. 한 맺힌 울분도 함께 담겼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리들의 모습에 리브는 부르르 떨었다. 단단한 보석 같던 벽안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리들은 정말로 더 이상 개의치 않기로 했다. 진심이니, 마음이니, 배려하는 것 따위 전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자신은 오늘 이제까지 줄곧 참고, 지켜왔던 선을 넘을 것이었다. 예상을 못한건 아니었지만 자신을 진저리치며 거부하는 그녀는 리들을 더욱 더 자극했다. 리들은 더욱 더 어설프게 끝낼 생각이 없어졌다. 강제로 그녀를 취해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각인 시키리라. 리브가 리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수록 청년은 더욱 더 악에 받쳤다.
“넌 끝까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이 독한 계집애.”
“…….”
“진심? 마음? 이 가증스럽고 끔찍한 계집애야. 네가 감히 나한테 그걸 운운해? 넌 그럴 자격도 없어!”
리들은 리브를 상처주기로 굳게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붉은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들이 리브의 마음을 사정없이 할퀸다.
“너에게 그런 마음이 한 조각이라도 있기나 해? 그럴 리 없지! 넌 나를 기만하고 모욕했어. 넌 정말 최악이야.”
“…….”
“너처럼 지독한 계집애는 자근자근 씹어 먹어도 시원찮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리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제대로 열이 뻗쳤는지 폭언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전해지지 못할 변명을 뱉어 내고 있었다.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원망감이 그 간극을 메운다. 다 너 때문이야. 리들은 다시 짐승처럼 입을 맞췄다. 그 무시무시한 폭언에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리브의 반항이 약해지자 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안을 유린했다. 하지만 갈증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청년의 손이 소녀의 가는 목을 조를 듯이 잡았다. 참으로 가냘퍼서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다. 그 손은 이내 아래로 내려가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풀었다. 하지만 다음 단추로 손이 간 순간 리들은 칼날 같은 아픔을 느끼며 하마터면 리브를 놓칠 뻔했다. 이제 포기하고 몸을 내어주는 가 싶더니 이를 세워 리들의 세게 혀를 깨문 것이었다. 이런 독한 계집애. 그렇게 속으로 욕을 읖즈리면서도 리들은 절대로 리브를 놓아주지 않았다.
쓰라린 고통과 비릿한 피맛이 리들을 더욱 더 자극해 감정을 극한까지 치몰았다. 눈이 뒤집히자 그 행동은 포악한 양상으로 드러나 소녀의 머리칼을 잡아채기에 이르렀다. 머리채가 붙잡혀 리브의 고개가 강제로 젖혀졌다. 정면으로 마주친 벽안이 처연하게 빛난다. 그 얼굴 위로 리들은 입술을 떨어뜨리고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온 리브를 기어이 함락시켰다. 줄다리기처럼 격렬하던, 저항이 시든 꽃처럼 멈추었다.
그리고 리브는 리들에게 이리저리 유린당하며 그 험악한 대접에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슬픔보다 상처가 더 컸다. 잡힌 머리채나 접문의 고통보다는 마음의 고통이 더 컸다. 무엇보다도 리들의 무시무시한 폭언과 마치 범하는 듯한 이 행위는 리브에게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떨어지기 시작했다.
리들의 뺨에 뜨거운 것이 가득 닿았다. 리브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리들은 이제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고 속으로 외쳤으나 몸은 그와 다르게 소녀를 압박하고 있던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체념과도 같았다. 하지만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갖고 말겠다는 의지는 크디컸다. 어느 순간부터 리브는 한 조각의 저항조차 하고 있지 않아 그 과정은 훨씬 수월했으나 욕망을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갈증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다. 사실 이런 성적 행위로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 이건 단지 마지막 발악이며 고집이었다.
그리고 리브는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리들의 죄책감과 회한은 점점 커져갔다. 그와 함께 사나운 기세도 눈에 띄게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눈물은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방울은 리들의 죄책감을 한계까지 자극해냈다. 그리고 청년은 이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녀를 휙 밀어내듯 놓아주었다. 리브는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토해냈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건만 리들은 더 이상 개의치 않을 수가 없었다. 함락당한 것은 리브가 아니라 리들이었다. 리브의 눈물과 마주한 순간부터 리들이 비뚤어진 결심은 서서히 무너지고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의 사투를 증명하듯 청년의 양 뺨은 리브가 흘린 눈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리브의 고운 얼굴도 눈물로 가득 젖어서 형편없었다. 점차 이성이 돌아오자 리들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청년은 자신의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우는 리브를 멍하니 응시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끅끅 거리는 모습은 리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로 너를 망치고 있어. 자신이 그리 만들었다는 생각에 리들은 죄책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졌다. 방금까지 망가뜨려서라도 가지겠다고 그리 마음먹었건만 리브의 눈물 앞에서 그것은 한 가루의 재가 되었다.
“눈물을 흘릴 만큼 싫다 이거지.”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리들의 입술은 제멋대로 비뚜름한 헛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끔찍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리들은 리브에게 미안함과 함께 미움이란 감정이 공존했다. 마지막이라고 받아주기라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나. 그렇게 진저리를 치며 밀어낼 만큼 싫었나.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네 마음은 듣지 않아도 뻔하겠구나.”
리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어냈다.
“앞으로 절대 내 눈 앞에 띄지 마.”
리들은 더 이상 울고 있는 그녀를 지켜 볼 수가 없어 돌아서버렸다. 정말로 망치기 전에. 이것이 리들의 마지막 배려였다. 자신은 절대로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강제로 가지려 했으나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욕보이고 망칠 수가 없었다. 리들은 방금 저질렀던 무지막지한 행위를 생각하자 자신이 추악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정말로 나는 이대로라면 너를 망치고 말거야. 사실은 너에게 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아.
“……마요.”
작고 여린 목소리는 리들에게 닿지 못했다. 소녀는 재차 입을 열어 목에 힘을 주었다.
“가지 마요.”
그 말에 리들은 순간 발걸음을 멈췄으나 다시 움직였다. 리들은 두려웠다. 저 작은 입술에서 나올 거절의 말이, 그리고 비난의 말까지. 그럼 정말로 멈출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후에는 지금보다 더 후회하겠지.
“가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리브의 간절한 외침은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리브의 벽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해를 풀기는커녕 더 틀어져버렸다. 사실 리브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룬 리들을 무작정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이 무엇으로 인해 비롯된 지를 알았기에. 단순히 아까 자신이 뱉은 말로 인한 오해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알았다. 그건 그저 기폭제에 불과했다.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어 리브는 비참함만 가중되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나약한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울고만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매번 이런 류의 과정을 거치며 그와 자신은 흐지부지한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좀처럼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울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리브는 리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와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리브는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까 당신이 들은 말은 오해야! 끊어내겠다고 수도 없이 생각해도 결국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어!”
리들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매번 내 마지막 결론은 톰 리들, 당신이었단 말이야!”
너란 여자는 항상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 리들은 한편으로는 차라리 돌아가서 매달리고 싶었다. 그게 오해라면 내 옆에 있어. 나를 봐줘. 나를 거부하지 말아줘. 나를 좋아해줘.
“좋아해요.”
리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청년은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게 꿈이거나.
“당신이 좋아요.”
이건 환청이야. 그럴 리 없어. 리들은 자신이 그녀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꿈이리라. 그만큼 리브의 고백은 꿈만 같았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주는 달콤함은 리들을 옭아매었다. 부질 없더라도 평생 꿈에서 깨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하지만 환청도, 꿈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을 붙잡은 리브의 손길을 느끼자마자 리들은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울음이 가득 섞여있었지만 리브의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좋아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건 헛것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야?
“그러니까 가지 말란 말이야……. 나를…….”
버리지 말란 말이야. 뒷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채로 리브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리고 리들이 아무런 반응을 해오지 않자 리브는 참담해졌다. 정말 이제는 늦어 버린 걸까. 이제 리브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맞잡은 리들의 손을 적셨다. 이제 리들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고 폭언을 퍼부으리라. 전과 같은 사이도 될 수 없으리라.
솔직하지 못한 대가는 크디컸다. 뒤늦게 마음을 전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이 아니라 리들이 믿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의 마음이 벌써 떠나 감흥이 없어졌거나. 리브는 서러움과 슬픔에 계속해서 울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랑에 대한 불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사랑이라는 건 이렇게 한 순간에 변해.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벌써 나를 버려. 이래서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이제 리브는 주저 앉아서 엉엉 울고 있었다.
하지만 리브의 생각과는 달리 리들은 리브를 버린 것도, 마음이 그새 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리브의 고백은 너무 꿈같아서, 그런데 자신의 손을 잡은 이 온기는 현실 같아서. 현실과 꿈 사이에서 어느 쪽이 지금 이 순간인지. 혼란스러워 그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리들은 꿈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깨지 않으면 계속 될까. 하지만 리브의 뜨거운 눈물이 툭툭 떨어져 자신의 손등을 적셔오자 리들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설렘과 기쁨으로 가슴이 가득 벅차올라 단숨에 리들을 나락에서 끌어올렸다.
리브의 고백은 리들이 항상 꿈꿔오고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그것은 리들이 단념하려 하자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의 괴리는 컸다. 리들이 염원하고 꿈꿔 온 리브는 저렇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상상하던 리브의 고백은 좀 더……. 최소한 저렇게 울고 있지는 않았다. 리들의 죄책감은 떠날 생각을 못하고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리들은 심호흡을 하며 입술을 달싹 거렸다. 한 마디 입을 여는 이 순간이 긴장돼서 숨 막히게 느껴졌다. 리들은 자신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떨리기까지 한다.
“올리비아.”
리브의 눈물은 예나 지금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방금도 송두리째 무너지지 않았던가. 리들은 이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까의 광폭한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안절부절 못하는 이만 있을 뿐이었다. 일렁이는 흑안이 자책이라는 감정을 가득 담았다. 리들은 리브와 눈높이를 맞추며 그녀를 달래려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평소에 내가 올리비아를 어떻게 달랬더라. 리들은 참으로 멍청한 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책에 이어서 이 이기적인 마음은 그녀의 마음을 재차 확인하고 싶어 했다. 또다시 그녀에게 최악이라고 비난 받을 지라도 리들은 확신을 얻고 싶었다.
“정말이야? 나를…….”
흑안과 벽안이 얽혀 들어갔다. 리들을 담은 벽안에서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리브의 입술에서 가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요, 당신이 좋아요.”
항상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 심장 박동 소리가 리들의 귀를 왕왕 울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지경이 되었다. 청년은 리브의 말 한마디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리브의 푸른 벽안에 원망이 담기며 순간의 감정을 확 분출해냈다. 그와 함께 희미한 증오도 엿보인다. 리들을 눈앞에 두자 리브는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아까 리들이 영영 가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리브는 한 번 부서졌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가 미웠다.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떤지 모르죠!”
인내심이 바닥난 리브는 속엣말을 전부 쏟아낼 요량인 듯 참는 것을 포기했다. 여기서 재차 고백을 하면 더 좋았을 테지만 불행히도 리브는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맞잡고 있던 손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그 말에 리들의 얼굴이 굳으며 내뱉는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이대로 있자고? 그 불안한 관계를?”
리들의 흑안이 무섭게 번뜩였다. 이제는 리들도 언성을 높이며 속엣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런 관계를?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더 이상은 그런 위태로운 관계이고 싶지 않아! 너야말로 내 기분을 알기는 해? 네가 언제든 나를 끊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얼마나 내게 끔찍한지. 리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는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친 무릎 때문인지 비틀거렸고 그런 그녀를 청년이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리들은 이번엔 리브가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게 꼭 붙잡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리브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리들은 리브에 대한 섭섬함에 양어깨를 붙잡고 윽박질렀다.
“이 나쁜 계집애야, 나는 내 판단을, 아니 네 마음을 믿었어! 너는 나를 믿지 않았지만 나는 너를 믿었어! 그런데 어떻게 너는…!”
“두려워요!”
그 말에 계속해서 윽박지르던 리들의 행동에 순간 제동이 걸렸다.
“나는 무섭다고요! 너무나도…….”
리브는 그 말을 뱉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잔뜩 뭉쳐 응어리가 진 그 감정을, 결국 입 밖에 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리들은 또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소중히 대해왔어. 그래서 끊임없이 배려하고 기다렸어! 그런데 너는 뭐? 두렵다고? 내가 무섭다고?”
“나는…….”
“차라리 그냥 내가 싫다고 해! 그런…….”
리들이 계속해서 무어라 쏘아 붙였지만 리브는 이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악몽 같았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 우리의 관계는 항상 이 모양일까. 끊임없는 오해와 갈등뿐이었다. 지금까지 뭐 하나 속 시원하게 푼 것이 없었다.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를 놓을 수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것이 리브가 내린 결론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수렁과도 같았다.
“그런 게 아니야, 아니라고!”
리브가 리들의 말을 끊고 빽 소리쳤다.
“내가 당신이 싫다고 했어? 좋다고 했잖아! 당신이 좋다고! 대체 얼마나 더 말을 해야 해! 나는…….”
리브가 울부짖었다.
“당신이 아니라 이 마음이……. 내가 품은 이 마음이 무섭단 말이야…….”
그 말을 마친 리브가 눈을 질끈 감았다. 리들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자 리브의 벽안이 드러나며 동시에 날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이 나쁜 놈아.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매번 오해만하고,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데…! 왜…!.”
리브는 횡설수설하다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서러움이 복받쳐 다시 울었다.
“당신은 정말 내 기분을 하나도 몰라! 나는 무서워. 이 마음이 무서워서 감당하기 조차 힘이 든데 왜 당신까지!”
“대체 뭐가 문젠데!”
리들 역시 이 상황이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금. 말을 한 마디 얹으면 얹을수록 오해는 겹겹이 커져갈 뿐. 우리는 이 상황을 예견했기에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피해 온 걸까. 하지만 이제 그런 지지부진한 관계는 싫었다.
“당신은 언제든…….”
“…….”
“당신이 언제든…….”
리브는 그 말을 하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 보였다. 리들은 말하지 말라고 멈춰 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들은 이제 알고 싶었다. 계속해서 석연치 않고,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점을 전부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그녀가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이젠 자신이야 말로 그녀를 믿고 싶었다.
“당신의…….”
리들은 인내심 있게 리브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어서 말을 하라 다그치고 재촉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하지만 다음으로 리브가 뱉은 말에 리들은 또다시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고 말았다.
“당신의 그 마음은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은…….”
“너란 여자는 도대체 왜!”
리브를 노려보는 흑안에 또다시 핏발이 섰다. 사랑스럽게 보았던 그녀였건만 이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끝까지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구나. 리들은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전히 눈앞의 이를 원한다는 건 확실했다. 불신의 끝을 드러내는 그녀였으나 리들도 도저히 리브를 놓을 수가 없었다. 더욱 더 갖고 싶었고, 사실은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의 여자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덮쳐왔다. 리브의 벽안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울음소리에 리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울지 좀 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왜 네가…….”
리들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나도 너에 대한 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 쉽게 생각하지…….”
“쉽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랬다면-”
“넌 말만 아니라고 하지! 항상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차라리 내가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 사실 너에게 나와 같은 감정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잖아! 무섭다고? 두렵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리들의 외침과 리브의 절규 섞인 외침이 섞였다. 리브는 피를 토하듯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히려던 그 말을 뱉어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왜냐고?”
리브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내 부모가 그랬으니까!!”
씩씩거리며 언성을 높이던 리들이 숨을 멈췄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에 리들은 멍하니 흑안을 깜박였다.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를 버렸고, 내 어머니는 나를 버렸지!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부모들조차 나를 버렸는데 당신이라고 그러지 않는다는 법 있어?”
피를 토하듯 그 말을 뱉어낸 리브는 몹시 괴로워보였다. 부들부들 떠는 모양새가 참으로 안쓰럽다.
“나는…… 내 부모가 나를 버렸듯이 당신도 나를 버릴까봐-”
결국 말해버렸다. 리브가 리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불안감에서 출발했다. 언젠가 리들이 자신을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소녀는 눈앞의 청년을 끊임없이 밀어냈다. 그래서 애초에 시작하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했다. 리들이 사랑을 가치 없다 여기는 데에서 그쳤다면, 리브의 사랑에 대한 불신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게 무섭단 말이야…….”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건 기억조차 희미한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태어났을 때 리브는 부모라는 존재를 바라며 온전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갈망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조차 리브는 그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럴수록 부모에 대한 집착은 점점 깊어져가며 그것은 이내 자신 역시 어머니처럼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되었다. 그래서 리들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끊어내려 애쓰며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리브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래서 사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어. 상대가 당신이라는 건 더욱 더 싫었어.”
리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두려워 리브는 그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리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어깨를 들썩였다. 상처임과 동시에 치부임과 같아서 리브는 이 같은 마음을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말해버렸고 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할수록 두려움만 커져갈 뿐이었다. 벌써 식어버렸으리라. 영원하기는커녕 이제 잔뜩 질렸겠지. 자신 같은 계집애는 꼴도 보기 싫을 게 분명했다. 또 버림받고 마리라. 그 생각에 미치자 멈추려 했던 눈물이 또다시 쏟아내기 시작했다. 리브는 또다시 소리 내어 울면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떠났어도 항상 당신만을 생각했어! 끊어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설사 볼드모트라고 해도. 내가 바꿀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지금 눈앞의 당신이 좋으니까!”
말은 점점 울음소리와 얽혀 형태를 잃어갔으나 전하는 메시지만큼은 확실했다. 그것들은 전부 리들이 속으로 내뱉었던 말들이었다. 그녀는 이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쓰러질 것 같은 리브를 리들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서 파르르 떠는 리브를 느끼며 리들은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내 어리석게 굴었던 자신에게 잔뜩 마법을 쏴주고 싶어졌다.
“미안해. 올리비아, 미안해…….”
리들은 처음으로 자신이 미숙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적인 미숙함이 그녀를 울리고, 그녀를 이리 괴롭게 만들었다. 리브가 자신을 싫어할 리가 없는데. 왜 빨리 깨닫지 못한 걸까. 그녀에게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야 말로 그녀를 믿어야 했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기다릴 것을. 조급함과 불안감은 결국 이렇게 리브의 상처를 헤집고 말았다. 리브가 부모님의 얘기를 꺼내며 속으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지 생각하니 리들은 자신을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리들은 리브를 끌어안은 채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알고 보니 불안함은 자신에게만 통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저리같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한술 더 떠서 보답 받지 못하느니 억지로 가지겠다는 생각이나 했다. 차라리 망가뜨려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은 최악이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절대 안 버릴게. 언제까지나 영원할 게. 그러니까 언제든 네 옆에 있어줘.”
이게 순서였는데. 그녀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그리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리들은 자신의 행동들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청년은 자신의 품속에서 부들부들 떠는 리브를 더욱 더 힘껏 끌어안았다. 리들은 차라리 리브가 자신을 욕하고 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번처럼 독설과 막말을 뱉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는 리브의 모습은 리들의 마음을 잔뜩 짓눌러 엉망으로 만들었다.
“올리비아 제발……. 내가 전부 잘못했어.”
리들은 리브를 끌어안은 채로 빌고 또 빌었다.
“내가 미안해. 올리비아, 그만 울어……. 정말 미안해. 네 말대로 내가 나쁜 놈이야. 내 잘못이야. 울지 마…….”
이제 리들의 목소리에 애원의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네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라. 너를 좋아해. 진심이야. 결코 변하지 않아. 네가 두려워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리들의 사과와 구애가 번갈아가며 이어졌다. 청년은 리브를 달래고 또 달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은 리들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올리비아. 그러니까 이제 나를 받아줘. 나도 너에게 확신을 줄 테니 너도 나에게도 확신을 줘. 이제 나 좀 봐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리브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청년의 목소리와 말에 취해 소녀는 점점 진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리브의 벽안과 리들의 흑안이 얽혀 들어갔다. 푸른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항상 바라왔던 순간이 손에 쥐어졌다. 자신이 저 푸른 눈동자에 오로지 담기는 이 순간.
리브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며 리들은 부드럽게 웃었다. 목소리도 상냥하기 그지없다.
“끝이 두렵다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우리에게 끝은 없어.”
리들은 조심스레 리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리들의 이니셜이 새겨진 연갈빛의 손수건이 부드럽게 리브의 눈가를 감쌌다. 리브는 손수건의 감촉보다 눈앞의 리들이, 품의 온기가 더 따스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리브의 입술에서 무어라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정말로……. 나를……. 정말…….”
“좋아해. 너보다 내가 더 좋아해. 그러니까 괜찮아. 올리비아, 나는 믿어도 돼.”
리브의 푸른 눈에서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버림받을 거라고, 자신의 마음은 이제 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너무 나약하고 미숙해서 그의 마음을 눈앞에 두고도 잡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을 절대 버리지 않을 거라고, 영원하겠다고.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항상 차갑고 냉담하던 눈동자는 진심과 마음이 가득했다. 리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많이…… 조금…… 문제가 있다는 거 알아. 나는 너처럼 착하지 못하고. 네 말대로 못돼 처먹기만 해서 널 실망시키고, 울리고, 힘들게 했지. 네가 믿지 못할 만 해. 네가 나를 마냥 싫어해도 할 말이 없어.”
“싫어하지만은…!”
리들은 리브의 입술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알아. 네가 나를 싫어하지만은 않는다는 거.”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말했잖아요.”
잠깐 리들이 흑안을 깜박였다. 억지로 강요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정말로 자신이 몹시 어리석었다. 왜 그동안 그런 오해를 하며 불안해하고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우리는 대체 왜 그랬을까. 이리 쉬운 것이었는데.
“알아, 나도 그래.”
그렇게 말하며 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그것은 리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완전히 불안감을 떨쳐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사실 둘은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둘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있었으므로.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네가 정 못 믿겠다면…….”
잔뜩 날서 있던 공기는 이제 나른해져 있었다. 잠깐 생각하던 리들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해 ‘깨뜨릴 수 없는 맹세’라도 할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내가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아요!”
깨뜨릴 수 없는 맹세라니! 식겁한 리브가 창백한 얼굴로 빽 소리쳤다. 이러다가 호크룩스를 하나 만들어서 선물해주겠다고 할 기세다. 사실 리들은 정말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리브가 기겁할 것을 알기에 넣어두었다. 물론 정말로 할 생각도 없고. 가정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잔뜩 찡그리며 몸서리치는 리브를 보며 리들이 투덜대듯 말했다. 내가 누굴 죽이기라도 한댔나.
“나는 너에게 내 생명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렇게 말하며 리브는 리들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금빛 머리칼이 리들을 간질이며 순식간에 가라앉은 공기가 바뀌었다. 연모하는 이의 온기와 은은하게 끼쳐오는 꽃향기에 청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빼꼼 고개를 든 리브의 얼굴이 수줍다. 그 어느 것도 담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흑안에 소녀만이 오롯이 담겼다. 리들은 멍하니 마음에 품은 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목소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스하다.
“올리비아.”
대답을 하듯 리브의 고운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말갛게 웃었다. 항상 얼굴에 미세하게 깔려 있던 어둠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새하얗고 고운 얼굴이 머금은 것은 진실로 행복한 기쁨의 미소였다. 그리고 리들은 그 꽃 같은 미소에 잠깐 넋을 잃었다. 청년은 품안의 소녀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꿈의 고백> 마침.
2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