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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꿈의 고백(2부 完)
맥밀란 가문과 말포이 가문의 혼사 파기는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에드가는 파혼만큼은 막아야 한다며 에밀리와 아브락사스를 설득해보려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에밀리의 분노를 직격탄으로 맞아야만 했다. 그날 이후로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분하게 굴던 에밀리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닥쳐! 넌 그날 내 꼴을 보고도 걔랑 파혼하지 말라는 말이 나와?”
에드가는 여동생을 아꼈지만 에밀리의 오빠임과 동시에 한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이 파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에드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분명 큰 파장을 불러오겠지. 양 가문 모두 타격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맥밀란 가문은 회복하기 힘들리라. 그러므로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파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아브락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혼서를 가져왔다. 공식적으로 둘의 약혼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서였다. 그렇게 아브락사스가 에밀리에게 파혼서를 건넴과 동시에 둘의 관계는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둘의 파혼은 에드가의 우려대로 양 가문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다. 표면적으로는 에밀리가 파혼을 당한 것처럼 포장이 되어 있었으나 사실은 아브락사스가 파혼을 당한 것이라는 말이 암암리에 떠돌았다. 호그와트에는 보는 눈이 많았고, 에밀리가 아브락사스의 구여친에게 끔찍한 모욕을 당했으며, 견디다 못해 파혼을 선언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두 가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맥밀란 가문은 에밀리가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파혼을 당한 것처럼 비춰진다는 것에 분노했고, 말포이 가문은 금지옥엽 귀하게 자란 하나뿐인 후계자가 고작 후플푸프 가문에 파혼을 당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예비 며느리를 예뻐하기 여념이 없던 말포이 가문에서는 이제 태도를 돌변해 에밀리처럼 흠 있는 여자는 대가문의 안주인의 자격이 없다고 퍼뜨리고 다녔다. 그렇다고 맥밀란 가문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말포이 가문의 후계자는 여성 편력이 난봉꾼과 같으며 결혼도 하기도 전에 어린 약혼녀를 겁탈한 천하의 파렴치한이라며 맹비난했다. 두 가문의 신경전은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두 남녀는 침묵했다. 집안에 그만하라 제동을 걸 지도 않았고, 본때를 보여주라고 부추기지도 않았다.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정혼 전의 사이로 돌아갔다.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더 이상 서로에게 아는 척을 하지도, 반갑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중간에서 리브와 오리온은 몹시 곤혹스러워 해야만 했다. 하지만 둘은 아브락사스와 에밀리는 다시 붙여줘야 한다고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
“에밀리! 어쩌면 좋아…….”
화장실 안에서는 계속해서 토악질과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리브는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병동이라도 가서…!”
“그럴 필요 없어.”
병동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에밀리는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병동에 너무 들락거리면 자신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양 가문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은 지금 에밀리의 조그마한 태도 하나가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에밀리는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고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대외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모습을 고수했다. 전처럼 밝게 웃으며 학교생활을 했고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에밀리가 지나치게 밝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리브 뿐이었다.
파혼의 후폭풍은 컸다. 사교계에서는 연일 둘의 파혼이 화제로 올랐고 두 남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혼서를 건넨 것을 기점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아브락사스의 모습은 그들에게 충분한 먹잇감이 되었고 현재 그는 신나게 물어뜯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브락사스 뿐만이 아니었다. 겉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에밀리 역시 사실은 잔뜩 망가져 있었다. 이를 아는 것은 리브 같은 친인뿐이었다.
에밀리는 음식물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조차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밀어 넣고,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흘리며 억지로 친구들과 재잘거려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식사를 하지 않거나 내내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면 이 태도는 사교계에서 입방아를 찧기에 충분한 소재이기에. 차라리 그런 일을 겪고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며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나았다. 그러면 소문이 조금 더 빨리 사그라질테니까.
그런 그녀에게 리브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에밀리를 대신해서 약을 받아다 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 뿐. 에밀리는 병동에 조차 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병동에 자꾸 드나들면 실연을 당해서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 것을 염려했다.
“에밀리, 기다려. 내가 병동에 다녀올 테니까.”
병동에 가서 에밀리의 약을 받아 나온 리브는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아브락사스는 어떤 편지를 구기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리들이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사교계에서 연일 입방아를 찧어댈 만큼 파혼 후의 아브락사스는 거의 폐인이나 진배없었다. 여성들에게 버릇처럼 흘리고 다녔던 꽃미소는 자취를 감췄으며, 오히려 치근덕거리는 여학생들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막말을 내뱉어 주변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또한 항상 반짝반짝하던 외모는 추레할 정도로 빛을 잃었다. 그런다고 본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래 외모 관리에 치중을 한 자라 그 변화는 꽤 크게 느껴졌다.
파혼 후에 급격하게 추락한 아브락사스의 모습은 맥밀란 가문에게 잔뜩 구실을 쥐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본인도 지은 죄를 아는 모양이라며 말포이 가문을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에 열을 받은 말포이 가문은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후계자를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잔뜩 편지를 보내왔다. 이럴 때일수록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며 전(前) 약혼녀는 전과 다름없이 몹시 잘 지내고 있다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그리고 에밀리를 독하디 독한 계집애라 욕하며 아브락사스에게 그런 인간미 없는 여자는 안주인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며 폄하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아브락사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그 반대였다. 이렇게 편지를 구기다 못해 태워버리고 있었으니.
“안녕, 리브.”
리들에게 무어라 소리를 듣고 있던 아브락사스는 표정이 몹시 좋지 못했는데 리브를 보자마자 힘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리들은 리브의 손에 들린 약봉투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리들은 리브가 요즘 병동에 부쩍 드나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년은 휘적휘적 다가가 소녀의 약봉투를 빼앗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청년은 최근 소녀와 심한 갈등을 빚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은 그날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빼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서 달래지는 못할망정 막말까지 뱉었지. 왜 참지 못했을까. 아무리 리브가 그런다고 한들 자신은 조금 더 어른스럽게 대처했어야 했다. 거기서 베리타세룸 얘기는 꺼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리들은 베리타세룸의 일이 자신뿐만 아니라 리브 역시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체 내가 얼마나 더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용서를 빌어야하죠?]
그녀 역시 이 일을 깊게 담아두고 있었다. 리들이 잊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의 그 불신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요. 너 따위 용서하지 않겠다고. 사실은 그게 당신의 본심이 아니던가요?]
거기서 용서했다고 말해야 했는데. 확신을 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리들은 자조하고 말았다. 나부터 역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 대한 너의 불신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오히려 또 다른 의문만 배가되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리들이 리브를 놓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리들 선배, 그거 주세요…….”
난데없이 약봉투를 뺏긴 리브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며 돌려달라는 의사를 표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리들은 리브를 잠깐 응시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예민했다. 그때 자신과의 일이 정신은 물론 신체까지 악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리브가 최근 병동에 드나드는 이유를 추측을 한 리들은 잠깐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청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거야?”
그 미성에는 걱정의 기색이 깔려 있었는데 리브는 약봉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리들이 리브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리들과 리브가 한차례 부딪힌 그날 이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리들과 리브의 사이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몹시 불안하여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았으나 둘은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썼다. 리들은 더 없이 사려 깊게 굴었으며 리브는 더 없이 예의바르게 굴었다. 하지만 그 태도들은 서로에게 더욱 더 불안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리들은 리브의 바짝 예의 바른 태도와 마주할 때마다 벽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고, 리브 역시 리들이 실제 감정을 숨기고 사려 깊게 굴면 언제든 이 관계가 끊어질지 모른다는 것에 겁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그렇게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뿐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리들은 진심이었다. 요즘 내내 보이는 가식적인 사려 깊음과는 철저히 달랐다. 간만에 맛보는 진심에 리브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리브는 그 따스함을 조금 더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로 가서 쉬는 게 좋겠다. 데려다 줄게.”
“아,아니에요! 저보다는 아브락사스 선배가…….”
리브의 말에 아브락사스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힘없이 웃었다. 그런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어요. 리브는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들이 병든 닭 마냥 맥없는 친구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며 독설을 내뱉었다.
“머저리 같이 굴지 마. 너희 집안 어르신들 말 대로 해. 그런다고 맥밀란이 알아줄 것 같아?”
“리들, 그러지 마. 나 너무 힘들어.”
정말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건만 리들은 냉정했다.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살을 깎아먹을 필요까지는 없는 거야.”
“나는 그녀에게 지은 죄가 많아. 이렇게 해야 그녀가…….”
“이런다고 걔가 용서해줄 것 같아? 천만에. 네 입지만 곤란해져.”
그리고 리들은 촌철살인을 내뱉었다.
“올리비아가 맥밀란에게 이 얘기를 전해준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 텐데?”
“최소한 흔들리기는 하겠지.”
“…멍청한 짓은 이쯤 해, 아브락사스.”
리들은 리브의 손목을 잡고 친구에게서 돌아섰다. 둘은 래번클로 기숙사로 향하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리브가 간신히 자신의 손목을 놓아달라는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사실 리들의 얼굴이 굳어 있어서 리브는 그 말을 하기 까지 몇 번이나 망설여야만 했다. 그리고 리들은 잠깐 그 손목을 응시하다가 놓아주었다. 붉게 부은 손목을 보며 리브가 살짝 찡그리는데 청년이 툭 내뱉었다. 그 말투에는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난 네 친구 싫어.”
뜬금없는 말에 리브가 손목에서 눈을 떼고 리들을 응시했다. 내내 굳어 있던 안색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리브는 살짝 안심이 되었다.
“난 그녀석이 우는 것을 처음 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매달리고 애원해 봤다더군.”
하지만 운 것은 아브락사스 뿐만이 아니였다. 말포이가의 청년이 약혼녀에게 무릎 꿇고 파혼만큼은 물러 달라 애원하던 그날, 맥밀란가의 소녀는 돌아와서 내내 울었다. 난 그를 좋아해. 하지만 난 그 비참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 울음에 섞여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에밀리는 용서하면 되는데 그것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리브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아직도 그를 좋아한다면 그를 용서하라는 말은 더욱 더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므로. 에밀리가 받은 모욕, 그리고 부서진 자존심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단번에 치유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표면적인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겹겹이 쌓여있으리라. 리브는 친구의 선택을 존중했다. 이해한다고, 나는 너를 지지한다고. 그렇게 친구를 달래며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결국 용서받지 못했고 파혼을 했는데도 네 친구를 위해 저런 머저리 같은 짓을 감내하고 있어.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더군. 멍청한 놈.”
리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리브를 응시했다. 방금 툭 말을 내뱉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에 리브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나는 네 친구도 아브락사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흑안과 벽안이 얽혀 들어갔다. 리들의 흑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서 리브는 섣불리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의미심장했다.
[너 역시 나를 좋아하잖아.]
그날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아브락사스 나름대로 맥밀란을 기다린 거라고 생각해.”
[나는 널 기다려 줄 수 있어. 내내 참았는데 기다리는 것 정도를 못할까.]
“고백도 했다고 했어.”
[날 좋아해요?]
[그래.]
[정말 날 좋아해요?]
[그래, 네가 좋아, 정말 진심이야.]
결국 또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네가 좋아, 이런 내가 낯설고 두려울 만큼.]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거야.]
[네가 떠난 후로 지금까지,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 마음은 지옥이었어.]
[그러니까 올리비아, 제발.]
그 고백은 절절했고 더없이 솔직했다. 마치 애원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것은 간신히 마음을 감추던 리브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인(情人)의 고백은 리브의 불신보다 강했다. 하지만 리브의 불신도 만만치 않았다. 기어이 베리타세룸을 쓰고 말았으니.
[대체 나야말로 너한테 뭐야? 우리가 함께한 시간과 쌓아온 신뢰는 겨우 이 정도였어?]
불신이란 참으로 무섭다. 눈앞에 펼쳐져도 믿지 못하니. 그래서 리브는 정인(情人)을 상처 입히고 말았다.
[네가 정말 미워, 하지만 난 너 없이는 안 돼.]
자신을 미워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에 대한 마음이 더 깊다는 것에 리브는 순간 환희를 느꼈다.
[이제는 너란 존재가 정말 질리려고 해, 하지만 너란 여자를 못 놓는 내가 더 혐오스러워.]
[이젠 나도 널 믿을 수가 없거든.]
상대방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제서야 리브는 리들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도. 그래서 용서를 빌었다. 당신은 나를 정말 용서했을까.
“올리비아?”
리브의 멍한 표정을 본 리들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그제서야 리브는 정신을 차린 듯 멍하니 눈망울을 깜박였다. 하지만 금세 얼굴이 흐려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리브의 벽안에 서린 진지한 빛에 리들은 무어라 섣부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요.”
실은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사실 리브는 말하고 싶었다. 청년과 마주할 때마다 소녀는 고민했다. 그냥 내 마음을 밝혀 버릴까. 하지만 그것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브는 리들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좋아해요. ‘당신을.’ 이 한 마디만 더 뱉으면 되는데. 그것은 몹시 힘들었다.
“좋아해요.”
재차 나온 말에 리들이 눈을 깜박였다. 잠깐 청년의 흑안이 어떤 감정을 머금었다.
“……선배 말대로 에밀리는 아브락사스 선배를 좋아해요.”
하지만 리브가 다음으로 뱉은 말에 곧바로 그 감정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때로는 그 좋아한다는 감정보다 다른 감정이 더…….”
리브는 잠깐 어떤 표현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른 감정이 더 크고 강할 수도 있는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리브는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서 리들을 마주본다면 속을 전부 내보일 것만 같았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자신 역시 당신을 좋아하노라 고백할 것 같아서 리브는 두려웠다. 리들에게 품은 연정보다 더 크고 강한 감정이 공존했다. 리브는 무서웠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두려움이 함께 휘몰아쳤다. 그래서 리브는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나중에. 아직은…….
“에밀리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리들은 묻고 싶어졌다. 너도? 너도 그래?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저 작은 입술에서 새어나올 말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하면? 사실 당신에 대한 불신이 더 깊다고 하면? 리들은 그것이 두려웠다. 부딪히고 어떻게든 끝을 내버리고 싶었지만 그 끝이 극과 극이기에 리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소녀는 청년에게 소중했다. 그리고 리들이 남몰래 품은 리브에 대한 깊은 연정(戀情) 역시.
“그래, 그렇구나. 그래…….”
결국 둘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모래성을 유지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언젠가 모래성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그 날이 멀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지금의 평화에 매달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아피아체레입니다.
독자님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연재를 쉬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결국은 제 만족에, 제가 좋아서 쓰는 글인데 저도 모르게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이제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정성어린 위로와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무어라 이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댓글 남겨주신 분들, 쪽지 보내주신 분들, 성장 아이템 보내주신 분들... 한 분 한 분 쪽지며 답장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그러지 못했네요. 이렇게 후기로 크나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독자님들이 믿고 기다려주신 만큼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글쓰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연재 1주년이네요. 멘토링이 끝나는 그날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