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멘토링-109화 (109/115)

0109 / 0115 ----------------------------------------------

Chapter 17. 지지부진(遲遲不進)

아브락사스가 에밀리를 겁탈했다는 소식은 양 가문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에드가는 곧바로 자초지종을 집안에 알리며 아브락사스는 몹시 파렴치한 족속이니 파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는 물론이거와―그는 결백을 주장했다.― 에밀리도 뒤집어져서 펄펄 뛰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겁탈 ‘하려고 했다’고 했지. 누가 겁탈을 했다고 했는데!! 난 그런 짓 당한 적 없단 말이야!!!”

이제 에밀리는 다른 의미로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에드가를 무섭게 닦달했다. 너 내 혼삿길을 막을 생각이야? 얘랑 파혼하더라도 다른 집안으로 시집은 가야할 거 아니야! 그 말에 아브락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그거 보라며 자신은 무고하다고 턱을 치켜세웠다가 에밀리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여야만 했다.

“이 발정난 짐승아! 내가 널 용서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윽, 에밀리……. 너…….”

“그리고 넌 거기서 그렇게 멍청하게 있으면 어떡하는데!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나,나를…….”

입에 담는 것 마저 부끄러운건지 에밀리는 얼굴을 붉히다가 빽 소리쳤다.

“이 바람둥이 자식! 네가 평소에 행실을 그따위로 하고 다니니까 다들 순순히 믿는 거잖아! 어떻게 너희 부모님까지 순순히 인정하시는 건데!”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며 아들 가진 집에서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기 마련이었다. 한술 더 떠서 그쪽 딸이 유혹한 게 아니냐는 기막힌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포이 집안 측에서는 아들의 평소 행실을 알기에 순순히 그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에밀리는 그런 게 아니라며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서며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쉽지 않았다. 그들은 에밀리의 마음씨가 착하다며 그렇게 약혼자를 감싸줄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얘야 우리는 겨우 그 정도 일로 너를 버리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다.]― 에밀리를 더욱더 분통 터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는 본인대로 곤란한 상황에 빠져서 호그와트로 당장 쳐들어올 기세인 어른들을 말리느라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정말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다 너 때문이야! 이래서 슬리데린이랑은 상종을 안 하는 건데! 애초에 너희 집안이랑 연을 맺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거였어! 후플푸프와 슬리데린이라니?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조합이잖아!”

이제는 아브락사스도 같이 화를 내려는 데 그것은 절로 무산되었다. 에밀리가 왈칵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 지 엉엉 우는 에밀리에게 깜짝 놀란 아브락사스는 달래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곧바로 내침을 당하고 말았다. 말포이가의 청년은 발만 동동 굴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또한 사정을 전부 전해 듣고 간신히 오해는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가는 여전히 아브락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어쨌든 저 카사노바 자식이 내 여동생 의사와는 관계없이 억지로 키스를 했단 말이지……. 그리고 거기서……. 만약 에밀리가 가만히 있었음 정말 끝까지 갔었다는 얘기잖아. 이를 부득 갈던 에드가는 여동생을 달래기 시작했다.

“에밀리, 울지 마. 넌 후플푸프가 아니라 래번클로잖아. 그래서 집안에서도 너를 내세워서 말포이 가문이랑 연을 맺은 거고…….”

슬리데린은 그리핀도르와 가장 사이가 나빴지만 후플푸프와는 다른 의미로 상극이었다. 후플푸프 집안과 슬리데린 집안의 결합이라. 그 소식은 한 때 순수혈통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처음에 맥밀란 가문 내에서도 말이 많은 사안이었다. 하지만 맥밀란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집안 간 결합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방계 가문을 뒤져보았지만 그 누구도 딸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가문이어도 그렇지 슬리데린 집안에 시집가서 어찌 살라고……. 그야 말로 죽은 듯이 살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들은 집안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직계가 희생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그 책임을 떠넘겼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직계 영애인 에밀리가 래번클로에 배정받았다. 그래서 그 혼사는 직계로 넘어가 에밀리에게 정착했다.

“마법의 모자는 후플푸프와 진지하게 고민했어! 내가 책이 좋다는 말만 안 했어도 난 후플푸프에 갔을 지도 모른다고!”

이제 에밀리는 기숙사 배정식 때의 일까지 끄집어내고 있었다.

“후플푸프의 피가 흐르는 내가 래번클로 성향이 짙을 리가 없잖아!”

“무슨, 넌 영락없는 래번클로야. 너도 그렇고 너희 기숙사 애들도 그렇고 아주 약아빠져서…….”

아브락사스는 아차하며 말을 뚝 멈췄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에밀리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야말로 태워 버릴 듯이 아브락사스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리브도 그를 못마땅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포이 네가 그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몇 번이나 사과했잖아! 대체 내가 언제까지……. 그리고 뭐? 겁탈을 하려고 해? 키스 밖에 안 했어!”

그 말에 에밀리는 당장에라도 아브락사스의 머리채를 잡아 챌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녀는 약혼자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렸다.

“네가 키스만 했어?”

그 말에 아브락사스가 움찔했다. 청년은 눈을 내리깔며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은회안에 죄책감이 담겼다.

“오,옷까지 벗긴 건 어디의 누구더라? 만약 내가 그대로 있었으면 넌 분명히 나를 그대로…….”

목을 조를 듯 멱살을 틀어쥔 에밀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옷깃을 탁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으르렁 거리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몹시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빛을 본 아브락사스는 옷깃을 정돈하던 손을 뚝 멈추고 말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데…….”

아브락사스는 항상 신사적이고 더없이 부드러웠다. 습관처럼 배어있는 여성에 대한 매너는 꽤 자주 에밀리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 친절이 자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걸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아브락사스의 스킨십이 도를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면 날카롭게 굴었다. 그리고 그가 종종 ‘네가 좋아.’, ‘잘 보니 너 예쁘다.’라는 말을 할 때면 그게 입 발린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설렘을 느끼는 자신을 채찍질 하고 옭아매었다.

어쩌면 오리온의 말처럼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 사이니 마음을 주는 게 더 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밀리에게 그것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브락사스에게 이별 선고를 받고 매달리는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혹자는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어쨌든 너의 남편이라 말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밀리는 보답 받지 못할 짝사랑을 하며 빈껍데기만 갖고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 여성 편력이 결혼 후에도 어디 가겠는가. 에밀리는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보며 가슴앓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순수혈통 가문에는 그런 부인들이 꽤나 있었는데 에밀리는 그 중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애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친구같이 평생을 지내는 게 낫겠지. 그것이 에밀리의 판단이었다. 그럼 아브락사스가 애인을 두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터. 하지만 그 결심은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리는 언젠가부터 아브락사스가 희대의 바람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매달리는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브락사스와 붙어있는 여학생들을 보며 에밀리는 약혼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졌다. 그녀들과 미모를 비교해보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다. 때로는 아브락사스의 취향에 정확히 일치하는 리브의 화려한 외모를 보며 그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다못해 저 아름다운 금발만이라도, 저 푸른 벽안이라도 가졌더라면. 흔하디흔한 브라운 색감에 아브락사스 본인도 갖고 있는 은회안은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심한 자기비하와 열등감에 빠지는 자신을 깨닫고 에밀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브락사스의 여자 친구들에 대해 관심을 끊으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브락사스가 연애사업을 그만 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의 취향이 묘하게 변한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꿈같은 날이 찾아왔다. 아브락사스가 고백을 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알았고, 얼마나 그 마음이 얕은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오늘 당장 달콤한 말을 내뱉다가도 다음 날 마음이 식어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는 남자였다. 에밀리는 도저히 아브락사스를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에밀리는 아브락사스가 자신을 절대로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기 비하와 열등감은 에밀리의 자존감을 하락시켰고 이는 아브락사스의 진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에밀리에게 그 고백은 종종 장난스럽게 해오던 스킨십처럼, 그런 가벼운 종류의 것이 되었다.

[거짓말 하지 마.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불신. 에밀리는 아브락사스의 마음을 믿지 못했다. 다른 여자애들에게 그렇듯이 한낱 가벼운 감정이리라. 에밀리는 그 가볍디가벼운 바람 같은 감정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원치 않게도 내 깊은 마음은 너에게 향해버렸을지언정 이 자존심까지 내려 놓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에밀리의 마지막 끈이었다.

[너 내가 유희거리로 보여? 네가 맨날 꼬시고 다니는 그런 계집애들로 보이냐는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아브락사스가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당한 이후로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던가,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여학생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재차 이어진 고백에도 에밀리는 여전히 아브락사스의 진심을 믿지 못했고, 이유를 묻는 그에게 평소 행실을 구실 삼았다.

[날 쉽게 보는 게 아니라면 이런 멍청한 짓은 그만둬! 날 좋아한다고? 이제 나와 즐겨보겠다 이거야? 그 표적이 나로 바뀌었어?  그리고 설사 진심이라고 해도 난 받아줄 생각 없어! 바람같이 가볍디가벼운 네 마음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다고?]

자신의 진심을 쓰레기 취급하듯 하는 에밀리에게 아브락사스는 눈이 뒤집혔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는 에밀리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욕정이 솟아 그 다음 단계로, 아니 아예 끝까지 가서 그녀를 강제로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에밀리는 처음 접하는 남자의 강도 높은 스킨십에 잔뜩 겁을 먹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아브락사스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나머지 에밀리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에밀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 채로 파삭파삭 굳어서 아브락사스에게 몸을 맡기고 말았다. 하지 말라는 미약한 외침은 아브락사스에게 닿지 못한 채로. 하지만 이를 극도의 위험한 상황으로 받아들인 에밀리의 몸은 지팡이 없이도 마법의 힘을 방출했고 기어이 아브락사스를 떼어놓았다. 그녀가 얼마나 공포에 질려있었는지 알려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덜덜 떨면서 울음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에밀리의 모습에 아브락사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채 그곳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내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애원했는데……. 한 마디도 듣지 않고 나를…….”

‘그래서 안했잖아.’라고 대꾸할 만큼 아브락사스는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만약 공포에 질린 에밀리가 무의식적으로 마법의 힘을 방출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브락사스는 정말로 그렇게 했을 지도 몰랐다. 그건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아브락사스는 자신의 진심이 시궁창으로 떨어진 것에 분노했고 그 분노는 강제적인 수단으로나마 에밀리를 가져 보겠다는 비뚤어진 양상으로 발휘된 것이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넌 미래의 내 부인이야. 결국은 내 여자가 될 거라는 뜻이야. 그리고 넌 말포이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우리 가문의 후계자를, 내 아이를 낳겠지. 너와 나의 아이 말이야.]

어쩌면 에밀리가 파혼을 입에 담은 것은 저 말에 대한 반발심일 지도 몰랐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친놈이야.”

후두둑 눈물을 떨구는 에밀리에게 아브락사스가 꺼낸 말이었다. 리브는 근처에 물러나서 헛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아브락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브락사스는 음울하게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염치 없는거 알지만…… 제발 용서해줘.”

그 말에 리브가 코웃음을 치며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또 그런 짓을 하면 그게 사람이야? 그리고 에드가가 쟤는 이미 사람이 아니기를 포기했다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브락사스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청년이 가까이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려는 시도를 했으나 그것은 금세 저지당했다. 에밀리가 그 손을 휙 쳐내며 뒷걸음질 친 것이다.

“손 대지마.”

미세하게 떨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에밀리는 품에 있는 지팡이를 꽉 쥐고 말했다.

“손끝하나라도 갖다 댄다면 주문을 쏠 거야.”

아브락사스는 살짝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지막지한 행동이 가져온 결과는 크디컸다.

“용서해 달라고 했지? 그럼 파혼해줄 거야?”

“…그건…….”

아브락사스가 에밀리를 겁탈했다는 소식에 맥밀란 가문은 식겁했다. 그 이면에는 에밀리가 꼼짝없이 아브락사스에게 코가 꿰였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혹 무슨 일이 있으면 들이대려 했던 파혼이라는 협박카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말포이 가문은 후계자가 난봉꾼 이미지에 확인 사살을 한 것과 이러다 정말로 파혼당하면 과연 어느 집에서 딸을 주려나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두 가문에서 나온 결론은 어떻게든 파혼은 안 되며 더욱더 둘을 결혼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처녀가 아닌(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에밀리는 흠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고, 아브락사스는 힘없는 여자를 겁탈했다는 끔찍한 이미지를 벗어야만 했다.(발 빠른 대처로 만천하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순혈가문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심지어 맥밀란 가문의 어르신들 중 일부는 분노하며 응징을 해야 한다는 이들에게 ‘남자 손 타서 이제 버린 몸, 이제 시집가기는 글렀으니 둘이 결혼 시키면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브락사스가 뻔뻔한 태도로 임했던 것은 이 같은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나랑 너랑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 말을 똑똑히 전해.”

“…….”

“그 번지르르한 혀로 무슨 말을 해서라도 납득을 시키란 말이야!”

*

리브는 에밀리와 아브락사스의 소문이 추문으로 번져 퍼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에드가가 문제의 돌발 발언을 뱉기 전에 리브는 복도의 학생들을 싹 해체 시켰고, 기억력 마법을 사용하는 강경책까지 벌였다. 그렇게 완벽한 수습을 했다고 생각 했지만 암암리에 에밀리와 아브락사스의 일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될 지도 몰랐다. 방금도 호기심 많은 저학년 생 두 명이 에밀리는 가리키며 무어라 속닥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란다. 특히 그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면 그 뒷감당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니. 그러니까 조심 하는 게 좋아.”

리브의 싸늘한 경고에 그들은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도망치듯 자취를 감췄다. 암암리에 돌던 소문은 점점 몸집을 키우고 더 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리브는 더 이상 방관만 해서는 안 되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학년 생이 알고 있을 정도면 더 이상 방관만 할 수준이 아니라는 거야.”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고 있던 참이야.”

오리온은 말을 하다가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둘은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살짝 사이가 껄끄러워진 것이다. 리브도 그걸 느낀 듯 멋쩍게 웃었다.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리들이었다.

“이런 사안은 입에 올리는 순간 더 일이 커지게 돼. 가라앉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좋아.”

“하지만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여서 그래요.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요. 이러다가 에밀리의 귀에 들어가겠어요. 아니 이미 알고 있을 거에요.”

리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본인들 일은 본인들이 수습하라고 해.”

리들의 냉정한 말에 리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겁탈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네 친구야. 이렇게 될 건 각오 했어야지.”

“하지만 에드가가 말을 제멋대로-”

“그런 변수도 각오를 했어야지.”

참으로 냉정한 말이었다. 리브는 불만스럽게 리들을 응시했지만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괜히 소문 키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게 네 친구를 도와주는 거야.”

“에밀리가 듣기라도 하면……. 이건 에밀리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브락사스 선배의 이미지도 걸려 있다고요.”

“본인이 자초한 거지. 그러게 왜 그런 책임 못 질 짓을 해.”

그 말에 바로 옆에 있던 아브락사스는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들, 너무한다. 리브는 잠깐 리들을 불만스레 응시하다가 아브락사스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러게 아브락사스 선배는 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어요? 이게 다 선배 때문이잖아요!”

“야, 나도 소문의 피해자…….”

“피해자는 무슨! 선배 평소 행실이 그 모양 이니까 아무도 이 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거라고요! 하여간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근데 에밀리가 엮일 건 또 뭐야.”

리브는 아브락사스의 마음을 푹푹 찌르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선배가 소문으로 이미지가 폭삭 망하든 말든 저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제 친구 에밀리가 껴있는 이상 말은 달라져요. 어떻게든 수습을 하세요! 에밀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정도 머리는 있겠죠?”

리들에게 멘토링을 하면서 독설의 기술도 물려받았나 싶을 정도로 그 솜씨는 발군이었다.

“하여간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어쩌다 에밀리는 이런 인간이랑 약혼을 해가지고 이렇게…….”

아브락사스를 한심하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제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아브락사스 선배는 그 아랫도리 간수 좀 잘하고 다니세요. 언젠가 패가망신하고 말거야!”

*

리브는 점점 심해지는 아브락사스와 에밀리의 추문에 대한 수습을 위해 전면으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리들이 도와주지 않아 슬리데린 쪽은 어떻게 하기가 힘들더라도 래번클로와 후플푸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다행히 그리핀도르에는 소문이 거의 퍼지지 않았다고 한다.) 후플푸프는 학생회장인 에드가 맥밀란이, 래번클로는 리브가 맡을 생각이었다. 학생회 주요 임원에 반장이라는 직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그와트 내에서의 탄탄한 입지는 리브의 발언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었다. 6,7학년도 아닌 5학년이었지만 나름 고학년이었고 애초에 문제되는 것은 가십에 관심이 많고 옮기고 다니기에 여념이 없는 리브 밑의 학년들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단 우리 기숙사는 주의를 줬어. 애들 성향이 성향인지라 금세 가라앉을 거야. 내가 한 명 한 명 찾아가기까지 했다구……. 근데 리브 너는?”

“아직.”

에드가는 자신의 실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여동생의 문제인지라 곧바로 행동에 나선 듯 했다. 아마 후플푸프의 특성 상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한 명 한 명 찾아간 에드가의 노고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정말이지 후플푸프 다웠다.

“그런 언제 할 건데? 어서 어떻게 좀 해봐. 기껏 주의 줬는데 소문이 사그라들지 않으면 꼴이 우습게 된다구……. 솔직히 가장 말 많이 옮기고 다니는 게 슬리데린이랑 너희 래번클로거든.”

“알아. 그래서 신중하려는 거야. 무엇보다도 래번클로는 에밀리의 기숙사이기도 해. 내가 일을 허투루 할 것 같아?”

리브는 에밀리의 행동반경 안에서 만큼은 소문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다. 에밀리가 티는 내지 않아도 그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리브는 이를 갈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슬리데린은 어떻게 못하더라도 래번클로 만큼은…….

“대체 리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기다려봐. 난 한 방에 처리할 거야. 나는 에드가 너처럼 한 명 한 명 찾아가는 수고스러운 짓은 안 해. 그리고 그런다고 들어 먹을 애들도 아니고……. 우리 애들은 후플푸프처럼 착하지 않거든.”

그리고 리브는 정말로 한 방에 처리했다. 래번클로 휴게실에서 아브락사스와 에밀리에 관련하여 입방아를 찧는 4학년 생 하나를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준 것이었다. 그 학생은 말을 찧고 까부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서 리브가 눈여겨보며 언제 한 번 한 소리를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리브는 참으로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게도 시간대를 래번클로 학생들 대부분이 휴게실에 있을, 저학년 생들이 막 기숙사로 들어오는 때로 잡았다.

“4학년씩이나 돼서 한심하기는. 이제 이런 말옮기기 따위는 접을 때가 되지 않았나? 그것도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나 지껄이다니 참 가관이네.”

리브는 시니컬하게 독설로 선빵을 때렸다. 고운 얼굴에 맺힌 싸늘함에 수다를 떨던 이들이 잔뜩 긴장하며 리브의 눈치를 보았다. 독설세례를 받은 여학생이 무어라 반박을 하자마자 리브는 무섭게 그 학생을 몰아세우며 잔뜩 장전한 독설을 무수히 발사했다. 그 독설은 훈계를 빙자하고 있었지만 지독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순하고 착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여선배의 불호령은 상당히 무서웠다.

“하,하지만 이 얘기는 저희만 하는 게 아니에요! 까놓고 말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 얘기를 알고 있을 걸요! 선배도 알고 계시잖아요.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하세요?”

“헛소리를 옮기고 다니는 애치고는 태도가 꽤나 당당하네. 네가 지껄이고 다니는 말에 사실이 있기는 하니?”

많은 학생들이 리브에게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리브가 화를 내거나 후배를 족치는 모습은 입학 이례로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항상 관대했고 잘못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넘겨주는 쪽이었던 것이다.

“저,전 그냥 들은 것뿐이에요!”

“들은 것뿐이라……. 그러면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를 이리저리 옮기고 다녔다는 거네? 경박하긴.”

아마 그 여학생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입을 봉하는 것이 현명했을 지도 몰랐다. 래번클로임에도 불구하고 현명함을 제때 발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는 꽤나 컸다.

“다들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너희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런 상스럽고 더러운 일은 일어나지 조차 않았다고 말해두지. 그럼 왜 지금 학교에 그런 추문이 떠도느냐 묻는다면. 그 범인은 바로 너 같은 입 가벼운 애들이라고 말해주겠어. 입이 가벼운데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망상을 보탰으니 일이 이 지경이 된 거지. 이래도 할 말이 남아있어?”

리브는 꽤나 독살스럽게 그 학생을 몰아세웠다. 죄송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리브는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독하게 혼을 낸 리브는 주변을 휙 돌아보며 그동안 눈여겨본 몇 몇 학생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한 번만 더 이런 헛소리들이 내 귀에 들어온다면 좌시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리브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였다. 그 모습에 리브의 시선을 받은 학생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눈길을 피했다. 리브에게 걸려 호되게 대가를 치른 해당 학생은 다음날 래번클로 휴게실에 헛소문을 옮겨서 기숙사 분위기를 흐린 것과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해서 죄송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며 반성하고 있다는 사과문을 붙여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는 말을 옮기지 다니지 않겠다고 에밀리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이후로 래번클로 내에서 에밀리에 대해 쑥덕대는 말들은 쏙 들어갔다. 감탄하는 이들에게 리브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한 놈만 족치라는 말이 있지.”

리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입을 쩍 벌리는 이들을 뒤로 하고 오리온이 불쑥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개망신을 준거야? 참 대단하다.”

“그새 그게 소문이 났어?”

“그럼. 너희 기숙사에 붙은 사과문이며 에밀리한테 직접 사과한 것 까지……. 걔는 타 기숙사에서도 살 붙여서 소문 옮기고 다니기로 유명했거든. 요즘 조용해졌더라.”

오리온의 말에 리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네가 그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 뭐야. 왠지 슬리데린스러워서 말이야…….”

“너 내가 슬리데린에 배정받을 뻔 했다는 걸 또 잊었구나. 그리고…….”

리브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툭 뱉어냈다.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슬리데린 중의 슬리데린이잖아. 그한테 배웠어.”

리브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리들에게로 쏠렸다. 당연하게도 리들은 당황 한 조각 없이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번 일에 협조해주면 참 좋을 텐데.”

리브의 혼잣말에 리들이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내가 슬리데린의 입을 막아주면…….”

잠깐 뜸을 들이는 리들의 태도는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뱀 같은 혀가 제 노릇을 할 태세를 하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무얼 해줄래?”

리들의 은밀한 거래 제안에 리브가 눈을 깜박이며 청년을 응시했다. 사파이어 같은 벽안에 리들이 오롯이 담겼다. 청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리들은 이 순간이 좋았다.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자신을 믿지 못해서 베리타세룸까지 먹인 괘씸한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리들은 리브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꿍꿍이가 뭘까 탐색하며 머리를 굴리는 저 모습도. 이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제가 뭘 해드리길 바라나요.”

“글쎄.”

리들의 애매한 대답에 리브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리들의 표정을 읽어보고자 했으나 리브는 알 수 없는 그 미소에 백기를 들어야만 했다.

“말씀 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올리비아 너만 할 수 있는 거야.”

리들의 미성이 은밀해졌다.

“오직 너만이.(Only you.)”

그 말과 함께 리들은 아찔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리들은 꽤나 달콤해서 리브는 하마터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말할 뻔했다.

“찬찬히 생각해봐.”

사실 리들은 리브가 이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요즘 뒤숭숭한 슬리데린의 분위기를 다 잡을 생각이었다. 말마따나 가장 친한 친구가 연루된 일이었다. 리들은 아브락사스를 모른 척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이지 리브는 다루기 힘든 듯 하면서도 이런 면을 파고들면 꽤나 다루기 쉬운 여자였다. 예전같으면 마냥 경멸했던 종류의 것이었으나 리들은 리브의 그런 감정적인 어수룩함도 좋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리브와의 관계가 이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우선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그리고 리들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슬리데린 내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리들에게 이는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요즘 슬리데린 분위기가 참 지저분하던데. 더러운 촉새가 더러 껴있어서 말이야.”

운을 떼는 리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미성에 담긴 말은 조금도 그렇지 못했다. 강도 높은 독설에 싸늘함까지 담고 있어 저학년 생들은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만약 리들의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 학생은 사교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눈치가 더럽게 없다는 뜻이므로.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사실인 마냥 떠벌떠벌……. 언제부터 슬리데린이 그런 천박하고 경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됐는지. 참으로 한심하군.”

이제 리들의 목소리는 차디찬 경멸을 담고 있었다. 리들과 눈을 마주친 몇 몇 학생들은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며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특히 아브락사스와 관련한 가십을 신명나게 떠들고 다닌 여학생들은 잔뜩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톰 리들은 여자라고 해서 봐주거나 눈감아 줄 만큼 관대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또 다시 이런 추잡스러운 말들이 내 귀에 들어온다면…….”

리들의 흑안이 싸늘하게 빛나며 경고는 정점을 찍었다.

“그때는 슬리데린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쥐죽은 듯 조용한 슬리데린 휴게실에 리들의 낮은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난 누구랑 달라서 사과문이나 어쭙잖은 사과 따위로 끝내지 않아.”

리브가 래번클로 여학생 하나를 족쳐서 개망신을 준 일은 꽤나 퍼져있었다. 슬리데린 고학년 생들은 순한 얼굴 뒤에 숨겨져 있는 올리비아 브릴리언트의 무서움―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타 기숙사생도 공개적으로 밟을 수 있다는 것, 과거의 경험(파킨슨 사건)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을 알았기에 철저히 언행을 조심하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철없고 눈치가 부족한 저학년 생들이었다.

“하나하나 전부 색출해서 철저하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리고 슬리데린 학생들은 저학년 가릴 것 없이 모두 올리비아 브릴리언트보다 톰 리들이 훨씬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브가 이런 말을 한다면 순한 얼굴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리들은 충분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빈말을 하는 성품이 절대 아니었고 한 번 눈 밖에 나면 톡톡히 그 처지를 주지시켜 주었다. 뼈저리게.

“그러니까 조심하도록 해.”

*

한편 리브는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슬리데린의 입을 막아주면 너는 나에게 무얼 해줄래?]

리브는 그간의 경험으로 거래를 청해오는 리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멘토링을 시작하고 상금을 목표로 거래를 했을 때, 리들은 리브에게 마법 약 과목 특출함을 걸며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거래를 받아들인 리브는 그야말로 리들에게 속박돼서 숙제의 노예가 됐고, 그걸 어기자마자 톡톡히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약속을 어긴 리브의 자존심을 밟아놓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눈물까지 쏙 빼놓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리브는 아직도 진저리가 처질 정도였다.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그 당시의 리브에게 나기니를 만지라는 것은 큰 공포였다. 하여간 사악한 인간.

[올리비아 너만 할 수 있는 거야.]

[오직 너만이.(Only you.)]

“대체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뭐야.”

리브의 한숨 섞인 말에 에밀리가 작게 웃었다.

“사실 그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난 의아해.”

“리브, 어째서? 리들 선배도 사람인데 원하는 게 있겠지.”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그 원하는 것을, 굳이 누군가와 거래를 하면서 까지 얻어낼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어. 그게 무엇이 됐든 말이야.”

에밀리가 책을 덮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리브. 소문도 없어졌고……. 덕분에 편해졌어.”

“어차피 언젠가는 없어질 소문이었어.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그래도 더 추문으로 번지기 전에 잡아줘서 고마워. 리들 선배한테도 따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어.”

“그럼 그때 네가 살짝 물어봐주라.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지 말이야.”

리브의 말에 에밀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혈통 치고는 꽤 격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에밀리 역시 순수혈통 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귀족 영애답게 눈치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었다.

“리들 선배가 원하는 것은 뻔하잖아.”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리브의 표정에 에밀리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 그는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난 정말 모르겠다구.”

“넌 정말이지 눈치가 빠르면서 이런 쪽은……. 아니지, 혹시 모른 척 하는 거 아니야? 그래, 모른 척 하는 거야.”

오리온이 그렇게 말했는걸. 언젠가 오리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에밀리는 리브에게 훈수를 두기로 했다. 속내를 들키는 것을 꺼려하는 리브의 성향을 알기에 에밀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왔다.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 답답하지 않은가. 이 지지부진한 관계가.

“난 네가 아직도 리들 선배와 사귀지 않는 게 참 의아해.”

에밀리는 돌직구를 던졌다.

“너와 리들 선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겨야만 했어. 아직도 이 지지부진한 관계를 끝내지 않는 이유가 뭐야? 서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리브, 솔직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친구의 핵폭탄 급 돌직구에 리브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이성적인 것은 알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있어서까지 이성적일 필요는 없는 거야. 가끔 보면 넌 참 이상한 데서 감정적이야. 쌓아두고 폭발하고……. 리들 선배와의 관계도 그럴 생각이야? 그랬다가는 파경으로 끝날 수도 있어.”

에밀리는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리들 선배와의 관계를 아예 청산하지 않는 이상, 이 지지부진한 관계를 어떻게든 할 필요가 있어. 더디고 더딘 관계는 결국 멈추고 마니까.”

“에밀리.”

리브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설마 리들 선배가 아직도 고백을 안 한 거야? 내가 볼 때 그렇게 아둔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면 네가 그를 거절 한 거야? 헐, 정말? 하지만 그랬다면 그의 성격상 네 옆에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거절당한다면 단칼에 잘라 버릴 것 같거든.”

“에밀리, 그만해.”

에밀리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친구에게 똑바로 일러주기로 했다. 오리온과 아브락사스에게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에밀리에게는 리브가 우선이었지만 이쯤 되니 리들도 조금 가여워질 지경이었다. 특히 리브가 리들을 좋아한다는 게 분명한데. 에밀리의 눈에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도와주리라. 리브가 솔직하게 다가서면 해결 될 문제였다. 리들 선배가 강하게 다가가면 좋겠지만 리브가 방어벽을 쳐대니 그것도 힘들지 않겠는가.

“혹시 너도 리들 선배의 마음을 못 믿는 거야? 하지만 오리온이랑 아브락사스가 말하기를 리들 선배가 누군가를 그렇게 챙기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댔어. 그토록 신경 쓰고 챙겨주는 것은 너 뿐이래. 이쯤 되면 답은 나온거 같은데……. 그리고 나 역시 네가 리들 선배가 아닌 다른 남학생에게 그토록 각별한 것을 본적이 없어.”

에밀리의 말은 정점을 찍었다.

“너와 리들 선배는 진작에 연인이 되었어야 했어. 너도 리들 선배를 좋아하고, 리들 선배도 너를 좋아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리브, 정말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넌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정말로. 리들 선배는 아주 네가 좋다고 온 몸으로…….”

“그러는 너야말로.”

리브의 뾰족한 목소리에 에밀리가 말을 멈췄다. 본래 기습을 당하면 공격적인 태도가 나오는 법이었다. 속마음이 전부 까발려진 것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 리브의 목소리는 날이 섰다. 고운 얼굴은 당황이라는 감정에 이어 이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제 서야 에밀리는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쏟아낸 말을 주워 담기에는 늦은 후였다.

“에밀리,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돼? 내 걱정 말고 너야 말로 네 마음에 솔직해 지도록 해.”

“무슨…….”

에밀리는 리브의 깊은 내면을 전부 까발리고 훈수까지 둔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리브는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에밀리의 속도 끄집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지부진한 관계라면 너랑 아브락사스 선배도 만만치 않잖아. 약혼이네 정혼이네 따질 때부터 되게 웃겼던 거 알아? 그리고 뭐? 서로의 사생활 존중? 서로에게 어떤 이성이 붙어있나 족족 꿰고 있더만. 뭐 미래에는 결국 이뤄지게 될 테니 여유를 부린건가 싶기도 해. 하지만 그래서는 끝이 안나지.”

리브의 깊숙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악질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에밀리가 자신과 아브락사스는 그런 게 아니라고 반박하자 리브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에밀리, 너야말로 솔직해 지도록 해. 네가 아브락사스 선배를 오래 전부터 짝사랑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솔직함이 필요한건 너야. 그리고 아브락사스 선배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는데 더 이상 매몰차게 굴 필요는 없다고 봐. 물론 도가 지나친 행동이고 마음에 안 들지만 넌 이미 그를 용서했잖아. 이제 그쯤이면 받아줘. 솔직히 너 정말로 파혼할 생각은 없잖아.”

당한 것을 그대로 되갚아준 리브는 밤이 늦었으니 먼저 자러 가겠다며 학생이 거의 없는 기숙사 공동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제대로 크리티컬을 당해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에밀리를 보며 오리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부터 상황을 보고 있던건지. 아무래도 주요 내용은 전부 들은 듯 했다.

“그러게 리브는 왜 건드렸어.”

리들을 도와주고 싶지만 리브에게 그 얘기를 꺼내며 종용하지 않는 이유였다. 당한 것을 되갚아 주는 리브의 면모는 상당히 악질적이어서 오리온도, 아브락사스도 피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정말이지 리들 선배랑 닮았다니까. 그것도 배운 건가. 리들 선배, 그런 건 왜 가르치셨어요. 오리온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너무 잘 맞아서 리브가 저렇게 날을 세운 거니까 기분 풀어.”

문제는 리브의 말도 너무 잘 맞다는 것이었다. 오리온은 멘붕에 빠진 에밀리에게 ‘너 정말로 오래 전부터 아브락사스를 좋아했어?’라고 물을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았기에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다들 시험은 잘 보셨.. 아니요. 우리 시험 얘기는 하지 말도록 해요. 기말고사 화이팅^^!

* 성장아이템 주신 피터패니님, 토마토ii님, 그리고 예쁜 그림 그려 주신 클라미님, neperure님, 상똘긔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 서브인 아브엠은 됐고 메인인 리들리브를 내놓아라!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릴게여.. 아브엠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끝납니다! 리들리브 멀지 않았어요^.^

* 종종 문의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아예 뜰에다가 블로그 주소를 올려놓았습니다. 블로그를 활발하게 하는 편이 아니지만 뭐.. 차기작이 될 '골든 스니치' 구버전이 일부 올라와있답니다. 전에 모 커뮤니티에서 연재했던 해리여체물인데 멘토링이 완결나고 나면 리메해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아, 루트는 드레이코에요!

* 골든 스니치보다는 일단 멘토링부터 완결을.. 그러려면 비축분 모아야 되는데 너무 졸리네요.. zZZ... 시험은 끝이 났지만.. 끝나지 않는 과제, 과제 그리고 또 과제... 부엉부엉시부엉

독자님들 선추코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럼 좋은밤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