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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지지부진(遲遲不進)
“밤이 늦었어. 조심해서 들어가.”
평소 같으면 리브에게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겠노라 하면서 어떻게든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들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학생회실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여전히 욕정은 들끓었고 그걸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동시에 양립했다. 이제 리들은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티 없이 깨끗한 그녀를 더럽히고 망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자신이란 놈은 미친 게 틀림없었다. 기다리겠다는 말을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자제력도 없어서 무얼 하겠다고!
리들은 무작정 욕심을 채우려 했던 아브락사스가 지금 어떤 꼴이 됐는지 알면서도 똑같은 짓을 할 뻔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크루시아투스 저주라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분을 못이긴 리들은 왼손을 말아 쥐고는 벽을 쾅 들이 박았다.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잘못 됐는지 리들은 고통으로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리들은 다시 한 번 손을 벽과 마찰시켰다. 리들이 세심하게 관리해온 새하얀 손은 이곳저곳 까지고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 무식하고 상스러운 짓이라 규정했던 그런 행동을 한 자신에게 리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손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르고 나서야 리들은 들끓는 욕정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만약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면 리들은 다시 한 번 손을 혹사시킬 생각이었다.
그래도 리들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이 더 깊었다. 어쩌면 자신은 더 심한 짓을 했을 지도 몰랐다. 분명 리브를 무릎 꿇리고 빌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없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 작디작은 몸을 탐하고 추악한 욕심을 채웠으리라. 그렇게 성역을 짓밟고 그녀를 정말로 망쳐버렸으리라. 마치 욕망의 노예가 된 듯한 기분에 리들은 더 없이 강했던 프라이드가 다시 한 번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리들은 피가 흐르는 손을 잠깐 응시하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충 감쌌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리들의 피투성이 손을 보고 아브락사스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식겁했다. 심지어 오리온은 치료 마법을 잘 쓰는 학생을 깨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둘 다 리들이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한마디 하자 곧바로 풀이 죽었다.
“내일 아침에 병동에 가볼 테니까 둘 다 호들갑 떨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
새벽같이 병동에 간 리들은 젤러 부인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대체 뭘 한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마디뼈가 골절 됐단다. 이걸 밤새 참고 있었던 거니?”
“책상에 손을 부딪혔는데 그 때 이렇게 된 모양이네요.”
다른 학생 같으면 거짓말로 치부하고 대체 누구와 주먹질을 했냐며 들들 볶았겠지만 눈앞의 학생은 톰 리들이었기에 치료사는 금방 수긍했다. 톰 리들이 머글식 싸움이라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붕대를 감고 있어야겠구나. 너도 손에 흉터를 달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들이 순순히 대답하자 치료사는 흡족한 듯 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붕대 따위 걸리적거린다며 투덜거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강한 약을 썼으니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한숨 자다 가렴.”
리들은 피로했기에 순순히 침대에 누웠고 치료사는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급하게 병동 문이 열리며 리들이 알고 있는 두 여학생이 들어오고 있었다. 커튼 틈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학생은 얼굴이 몹시 창백했는데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리들은 그 여학생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올리비아?”
그녀는 에밀리에게 끌려오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자세히 보니 잔뜩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리들은 치료사가 완전히 쳐버린 커튼을 살짝 열어 바깥 상황을 보았다.
“젤러 부인, 리브가 많이 아파요!”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다며 두통으로 끙끙거리는 리브를 데려왔노라 말하는 에밀리는 잠옷 바람에 대충 망토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건 리브도 마찬가지였다.
“난 괜찮아. 단순한 두통일…….”
“단순한 두통이 아니야! 너 요즘 잠도 못 자고 있잖아!”
불면증과 두통은 리브의 고질병이었다. 사실 주기적으로 꾸는 악몽이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치료사는 곧바로 리브를 앉히고 두통약을 선반에서 꺼내왔다. 일단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리브에게 약을 먹이는 게 급했던 것이다. 상태를 보니 전에 처방받은 약이 잘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강한 약을 가져왔으니 이번에는 잘 들을 거란다.”
리브는 약이 너무 쓴 지 인상을 가득 찌푸렸지만 금세 한결 낫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쉬었다 가거라. 그 약은 효과가 강력한 대신 부작용으로 현기증을 동반하니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브는 에밀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어지럼증이 몰려왔던 것이다.
“리브, 내 이야기 잘 들으렴. 더 이상 네 증세는 약물로 의존할 수 없는 상태란다.”
리브 역시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특정 약을 반복 복용함으로써 내성(耐性)이 생긴 탓이었다.
“정식으로 치료를 받길 권하고 싶구나. 아니 꼭 그래야만 해.”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네 증상을 분석하고 불면증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아내서 그걸 해결할 거란다.”
이제 현기증이 가셨는지 눈을 뜬 리브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건 제가 잘 알아요. 악몽을 꾸거든요. 그거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거에요.”
“그 악몽이 문제 겠구나. 우선 진정 물약부터 처방받고…….”
“소용없어요. 전 그 악몽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잠깐 생각에 빠진 젤러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악몽을 알아내야 겠구나. 심리 치료를 받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거란다.”
그 말에 리브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리들은 리브의 목소리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읽어냈다.
“기억을 못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원래 꿈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하지만 그게 너의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면…….”
“젤러 부인, 전 그 악몽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리브의 간절한 목소리에 젤러 부인은 다른 가설을 꺼내들었다.
“그래, 악몽 때문이 아닐 수도 있으니……. 혹시 요즘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니?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말이다. 그거 때문에 악몽을 꾸는 걸 수도 있고 말이야.”
“…글쎄요.”
리들은 바로 어젯밤에 리브가 자신에게 용서를 빌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몹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리들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자신과의 일로 인해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악몽을 꿨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별장에 있는 내내 시달려 왔을 지도.
“진정 물약을 처방해 줄 테니 꼭 마시도록 해라. 일반 두통약이 듣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 난 너를 이대로 둘 수가 없단다.”
치료사의 엄격한 목소리에 리브는 순순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가 또다시 진정 물약 처방을 거부하면 단단히 한소리 하려던 젤러 부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리브. 잘 생각 했다. 잠깐만 기다리렴.”
젤러 부인이 진정 물약을 가지러 간 사이에 에밀리가 쫑알거렸다.
“방학이 되면 성 뭉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아니 크리스마스 휴가 때라도 가봐. 그렇게 할 거지?”
“……으응……. 그렇게 할 게.”
리들은 리브가 마지못해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녀는 전혀 병원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브. 자기 전에 여기 표시된 만큼 마시면 된단다. 그리고 최대한 마음을 편히 가지렴. 그러면 악몽도 꾸지 않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브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었다. 마찬가지로 리들의 얼굴도 그늘이 짙어졌다.
*
에밀리는 정말로 파혼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아브락사스가 자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며 더 이상 그와 약혼 관계를 유지 할 수 없다는 편지를 집안으로 적어 보냈다. 하지만 리들의 지적한대로 집안 대 집안의 혼사를 그리 쉽게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밀란 가문의 어른들은 에밀리에게 혼사의 중요성을 되새겨 주며 오히려 그녀의 경솔함을 질책했다.
[네가 우리 가문의 직계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더 이상 경거망동 말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 무 자르듯 쉽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경솔하구나.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말포이 가문과의 혼사는 우리 가문이 더 높이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이니 네가 넓은 마음으로 용서 하거라. 우린 후플푸프 잖니. 아무리 슬리데린이라도 보듬어 줘야 한단다.]
에밀리는 패악을 부릴 듯한 기세로 성질을 부리며 편지들을 깡그리 불태워버렸다. 신입생들이 그런 그녀를 두려운 눈길로 응시하며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밀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눈물자국을 양피지에 찍어가며 호소성 짙은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본인도 몹시 뉘우치고 있으니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부모님의 답장을 받아야만 했다. 에밀리는 그제서야 상황을 깨닫고 이를 부득 갈았다. 그 교활한 슬리데린이 이미 선수를 친 것이었다!
[제가 에밀리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장모님, 장인어른.]
[에밀리 양과 다퉈서 사과의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혹시 그녀의 취향을 여쭤볼 수 있을까요,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 마는 슬리데린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말포이가의 후계자는 에밀리의 부모님에게 혀처럼 사근사근하게 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참된 약혼자를 용서하라는 편지를 줄줄이 받은 에밀리는 그에 대한 보복인 양 아브락사스를 볼 때마다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파혼은 안 돼. 이 혼사는 우리들만의 개인 적인 문제가 아니야. 너도 이제는 네 처지를 자각할 때가 되지 않았어? 네가 아무리 혈통을 불문하고 사람을 사귄다고 해도 네가 순수혈통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 그것도 넌 가장 순수한 직계야. 그에 대한 마땅한 책임감을 가지도록 해. 이건 너보다 한 살 많은…….”
“닥쳐!”
그날 아브락사스는 병동신세를 져야만 했다. 분노한 에밀리가 그에게 치명적인 주문을 쏘고 만 것이다. 민달팽이를 쉴 새 없이 토하던 가엾은 청년은 약혼녀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수모까지 당해야만 했다.
*
리들은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선언대로 항상 리브의 곁에 있었다. 멘토링과 반장 업무는 물론이거와, 리브가 도서관에 박혀 있으면 리들 역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리브는 리들의 눈치를 보며 깍듯이 예의를 차렸고 그럴수록 리들은 가면을 쓰고 더 없이 상냥하고 사려 깊게 굴었다. 남들이 볼 때는 정말 친하고 각별한 사이로 보였으나 둘은 시간이 지날수록 참담함과 비참함만 더 가중될 뿐이었다. 정말 자신과 상대방의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기에.
“리브 선배! 아프셨다고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푹 쉬세요. 건강이 중요해요!”
리브가 기숙사 공동 휴게실로 들어오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래번클로 저학년 생들이 우르르 리브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리브가 많이 아팠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걱정의 말과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리들은 리브가 래번클로 내에서의 입지가 상당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 역시 리들이 그렇듯 많은 이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학생이며 속한 기숙사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슬리데린에 톰 리들이 있다고 하면 래번클로에는 올리비아 브릴리언트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특히 리브를 중심으로 래번클로 학생들이 뭉치는 것은 개인플레이가 강한 래번클로의 특성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래번클로는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 나쁘게 말하면 이기주의 성향을 띄는 기숙사였다. 그런 그들은 누군가의 뛰어남을 ‘인정’은 했어도 떠받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래번클로 저학년 생들은 동경을 넘어서 리브를 거의 떠받들 듯 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대해서 고학년 학생들은 반발심을 피워 올릴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 만하지 않냐며 리브의 능력을 기꺼이 인정했다.
만약 리브가 래번클로만이 아닌 타 기숙사와도 친분을 다졌더라면 이 같은 분위기는 호그와트 전체를 뒤덮었을 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리핀도르나 슬리데린과는 거의 친분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후플푸프는 에밀리 맥밀란 덕분에 친밀한 편에 속했다. 그녀는 후플푸프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핀도르에서의 친인은 이미 졸업한 미네르바 맥고나걸과 보바통으로 돌아간 크리스티안 카르티에 뿐이었고 슬리데린은 톰 리들과 그의 친인 들 뿐이었다. 물론 톰 리들의 친인이라고 해서 전부가 리브와 친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친분은 오리온 블랙과 아브락사스 말포이에 한정되어 있었다. 최근에 발부르가 블랙이 추가된 정도였다.
그렇게 톰 리들과는 달리 발이 넓다고 할 수 없는 리브임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은 상당했다. 래번클로 뿐만 아니라 타 기숙사에도 그녀를 흠모하는 남학생과 동경하는 여학생들은 다수였다. 지금도 리브를 둘러싼 무리에는 타 기숙사 학생들이 더러 껴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리브는 곱게 웃으며 한 명 한 명의 말에 화답해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다 흩어지고 알렉스 애컬리가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멘토링 때문에 오신 거죠? 당분간은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닌 걸.”
“그래도……. 반장 업무도 많으시다면서요. 차라리 반장 같은 거 맡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어요. 그런 귀찮은 일을 리브 선배가 할 필요 없잖아요.”
래번클로 학생들에게 반장이란 권력의 의미보다 귀찮은 일을 떠맡는 다는 의미가 컸다. 그래서 일부 학생들은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책을 읽겠다며 반장을 맡는 것을 꺼리곤 했다.
“반장 일은 아직 적응이 덜 돼서 그런 거야. 그렇게 많지도 않아. 알렉스 너도 나중에 반장을 맡게 될 지도 모르는데 너무 그러지 마.”
“으으, 전 반장 같은 거 안 할 거에요.”
그렇게 말하던 알렉스는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리브 선배가 여학생 회장이 된다면 할 거에요. 리브 선배가 있다면 학생회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 정도의 기회비용이라면 기꺼이 감당 하겠어요.”
알렉스의 사심 가득한 말에 리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맑은 웃음소리와 고운 미소에 알렉스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런 둘의 친분 두터운 모습을 보며 리들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애컬리, 내 멘티를 이만 데려가 봐도 괜찮을까.”
리들의 등장에 알렉스는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는 리들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다.
“멘토링 시간이 훌쩍 지나서 말이야.”
“네,네. 실례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알렉스는 리브에게 나중에 기숙사에서 보자는 말을 건네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리브는 예쁘게 웃으며 그리 하자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리들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절대로 리브에게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사려 깊게 굴었던 리들이었지만 오늘은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듯 했다. 그리고 리들은 신랄하게 비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본인의 일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감당이 안 되는 인맥이라면 없으니만 못하지.”
“저 그런 게 아니…….”
“그런 게 아니긴. 뭐, 네 친분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나랑 약속한 시간이 되었으면 떼어놓든가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보다 그들이 더 중하다 이건가.”
그렇게 리들의 독설은 평소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리들 선배,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잖-”
“시끄러워. 네 변명은 듣기 싫어. 넌 또 변명이지. 이 상황에서는 사과가 먼저 아니야? 하긴…….”
그 말에 리브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마치 베리타세룸 일을 사과했을 때도 변명을 하던 자신을 꼬집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에 도달하자 리브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리브의 깍듯한 태도에 리들은 더욱 더 기분이 나빠진 듯 했다. 물론 리브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오히려 정중하게 사과를 했는데 상대가 성질을 부리려 하니 리브는 당황스러웠다. 리들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책들을 가방으로 밀어 넣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든가.”
“리들 선-”
“이런 기분으론 멘토링 못해. 난 갈 테니까 너 알아서 해.”
“뭐라고요?”
뜬금없이 멘토링을 못하겠다는 리들의 말에 리브는 당황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약속도 안 지키는 애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서 뭘 하겠어. 먼저 사람이 되도록 해.”
이제 리브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압권이었다. 리들이 자리를 떠버리고 리브는 들고 있던 책을 큰소리가 나도록 쾅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너무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아니 왜 다짜고짜 짜증을 내?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누가 보면 한참 늦은 줄 알겠어!”
리브가 피치 않게 약속 시간을 늦긴 했으나 겨우 5분 늦었을 뿐이었다. 책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리는 지 리브는 잠깐 씩씩거렸다. 누굴 약속이라고는 통 안 지키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고 있어! 그녀는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따지고 싶은 심정을 꾹 눌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리브는 다시 한 번 성질을 냈다. 당사자가 앞에 있기라도 한 마냥.
“그보다 누가 누구한테 사람이 되라고 하는 거야!”
*
공동 기숙사 휴게실을 나온 리들은 자신이 홧김에 저지른 일을 곧바로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과민하게 굴다니. 순간의 질투는 철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다. 리들은 아까 뱉은 말들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에라도 리브가 쫓아와서 다다다 쏘아 붙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몹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가득 느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든가.]
특히 그런 말은 하는게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경솔한 짓을 하다니 당장에 리브가 쫓아와서 싫다고 화를 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말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리들은 기분이 푹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그렇게 저조한 기분으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두 인영이 있었다. 복도 구석에서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는 교복을 보아하니 슬리데린과 그리핀도르였다. 열렬한 애정신을 연출하는 두 사람을 보니 리들은 왠지 열부터 받았다. 평소 같으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겠지만 지금의 리들에게는 눈꼴이 시어 못 봐줄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아니꼬웠다. 리들은 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슬리데린과 그리핀도르, 각각 30점씩 감점.”
리들의 차가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 둘은 곧바로 떨어졌다. 그 둘이 도레아 블랙과 샤를루스 포터임을 알아 본 리들이 잠깐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둘이 약혼 관계였던가. 다음으로 뱉은 샤를루스의 말에 리들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슬리데린의 반장님. 왜 우리가 감점을 당해야 하죠? 연인끼리 키스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었나?”
연인이라는 말에 도레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샤를루스의 항의에 리들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풍기문란.”
도레아와 샤를루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샤를루스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항의 했으나 리들은 그것을 묵살했다.
“남들 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이런 가벼운 행위를 하는게 풍기문란이 아니고 뭐야. 그냥 아예 연회장에서 거하게 해보는 건 어때?”
리들의 노골적인 비꼼에 도레아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샤를루스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씩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키스하는 게 왜 풍기문란이야? 연회장이라 그거 참 좋은 방법인데요?”
도레아는 샤를루스의 발을 꾹 밟으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지만 포터가의 청년은 요지부동이었다. 리들의 얼굴에 순간 약오르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지만 청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띄우며 더욱 차갑게 말했다.
“블랙가와 포터가의 수준은 겨우 이 정도인가? 내 눈을 의심했어.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것도 고명하신 순혈가문의 자제들이 말이야.”
“그쪽만 하겠어요.”
샤를루스의 비꼼에 리들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위험해 보여서 샤를루스는 살짝 긴장해야만 했다. 마치 초식동물을 앞에 둔 포식자 같은 느낌에 도레아는 살짝 움찔했다.
“하여간 경망스럽긴. 뭐, 네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평소 샤를루스의 행실을 꼬집은 리들은 곧바로 도레아를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설마 이런 짓을 하려고 통금 시간을 어기지는 않겠죠? 고명한 블랙 가문의 영애께서 그럴 실리는 없겠죠.”
지난번에 통금시간을 어기고 샤를루스를 만나러 나갔던 일을 끄집어내는 리들의 발언에 도레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리들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둘 다 조심하는 게 좋아. 그리고 앞으로 미관을 해치는 짓은 하지 자제하도록 해.”
싸늘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리들의 뒷모습에 대고 샤를루스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이런 생트집이라니, 미관은 개뿔! 사실은 본인이 보기 싫은 거 아니야? 그럼 지도 키스 하던가!”
리들이 사정거리를 벗어나지도 않았음에도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샤를루스의 행태에 도레아가 식겁했다.
“샤를, 그러지 마! 들리겠어!”
“흥, 들으라고 하는 말이거든!”
한참동안 리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샤를루스는 모욕을 받은 것에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 듯 했다.
“보아하니 지금 분풀이를 하는 거 같은데 실은 차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괜히 커플인 우리한테…….”
“그건 억측이야. 리들은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누가 감히 그를 찰 수 있겠어.”
도레아의 말에 샤를루스가 비웃듯이 말했다.
“왜 없어. 누구라도 있겠지.”
잠깐 생각에 빠진 샤를루스가 누군가 떠오른 듯 씩 웃으며 말했다.
“가령 올리비아 브릴리언트라던가 말이야.”
“뭐어?”
그 말에 도레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샤를루스의 등짝을 팡팡 쳤다.
============================ 작품 후기 ============================
리들은 자기 연애사업이 잘 안되자 저렇게 커플 훼방놓기에 이르렀습니닼ㅋㅋㅋㅋㅋ리들의 심술(?) 피해자는 샤를루스와 도레아 뿐만이 아닐듯....
그나저나 리브한테 사람이 되라니;;; 누가 할소릴;;; 리들 망언이요;;; 나중에 생각나면 자다가 이불 뻥뻥 찰듯요^^
그럼 여러분 좋은 밤 되세요!
+ 아이쿠 실수! 도레아가 리들보다 한학년 선배에요ㅠㅠ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