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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돌이킬 수 있는
멍하니 벽난로 속의 불꽃을 응시하던 리브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살짝 구겨진 채로 손때가 묻어 있는 그것은 언젠가 리들이 보내온 편지였다. 리브가 태워버렸던, 아니 태우려고 했던. 리브는 편지를 완전히 태우지 못했다. 그저 내용물이 담겨 있던 봉투만 태웠을 뿐이었다. 양피지를 불길 속에 던지려 했으나 끝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버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감히 읽지도 못했다. 그저 품에 넣어놓은 채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리들이 생각날 때마다 만지곤 했던 그것은 이제 손때가 가득했다. 리브는 그 편지를 읽게 된 순간 제 발로 돌아가게 될 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리들을 놓지 못할 까봐, 내내 다짐했던 그 마음이 무너질까봐.
그래서 읽지 않았다. 소망의 거울을 외면한 정신력이었다. 편지 따위 진작에 태워버리고 외면해야 했으나 그것은 몹시 힘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리브는 견디지 못하고 그 편지를 펼치고 있었다. 톰 리들이 뭐라고…….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리브는 편지를 펼쳐보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리고 안에 적힌 내용을 파악한 소녀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올리비아, 미안해. (Olivia, I'm sorry.)
내가 잘못했어. (Everything is my fault.)
용서해 줘. (Forgive me.)
다시는 안 그럴게. (I won't do it again.)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줘. (Give me just one more chance.)
제발(Please).]
안에 적힌 것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한 화려한 언변도, 교활한 미사여구도 아니었다. 그저 사죄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래도…… 소용 없어…….”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이 소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소용없단 말이야…!”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간신히 그친 울음은 또다시 터져 나와 별장 안을 울렸다.
*
“리들, 이 시간에 가려고?”
“그녀는 눈치가 빨라. 지금 당장 가야 해.”
리들이 곧바로 벽난로에 있는 오리온을 잡아 끈 이유는 리브의 재도주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리온이 그런 식으로 돌아와 버렸으니 어쩌면 리브는 상황을 눈치 챘을 가능성도 있었다. 곧바로 그곳을 쳐들어갔어야 했는데……. 리들은 자신을 만류한 오리온과 아브락사스를 맹렬히 노려보다가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반장 업무는 대신 부탁할게, 오리온.”
“하지만 리들 선배, 저도 반장이라 제 업무가…!”
리들은 오리온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로 벽난로 속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리들의 반장업무까지 떠맡은 오리온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건 리브의 소재를 숨긴 것에 대한 일종의 벌인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걸 알아차린 듯 아브락사스가 오리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오리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둘이 잘 해결 되어야 할 텐데……. 하지만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끼어들 곳은 어디도 없었다.
*
리들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토록 그리고 또 그리워했던 소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눈가가 붉은 것을 보고 리들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한 발자국 다가가려던 리들은 그랬다가는 리브가 마치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고 그러자 순간 두려워졌다. 그래서 차마 그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었다. 내내 담아왔던 이름이건만 지금만큼은 부르는 순간 허상처럼 사라질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다. 오리온의 예상은 틀렸다. 그는 리들이 리브를 보자마자 화를 내고 몰아붙일 거라 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리들은 감히 리브에게 말조차 못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벽난로에서 나온 리들과 마주친 리브는 그 자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눈앞의 청년이 톰 리들이라는 것을 깨닫자 방금까지 눈물을 쏟아냈던 그 벽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리들의 잘생긴 얼굴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청년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뜨는 것을 보며 리브는 그것을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리들은 그저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었다.
“오랜만이야, 올리비아.”
청년의 붉은 입술에서 자제하는 티가 역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리브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동안 잘 지냈어?”
“…….”
“얼굴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네.”
“…….”
“나도 마찬가지야.”
리들의 목소리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리고 평소와 몹시 달랐다. 사실 리들은 리브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리브는 역시 화를 참고 있는 것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확신으로 굳혔다.
“여기는…… 잠깐 놀러온 거지?”
잠깐의 침묵 후 리들이 꺼낸 말이었다. 무작정 따지고 압박하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리들은 회피하고 있었다. 리브가 늘 그랬던 것처럼.
“별장에 온 이유는 쉬기 위해서지?”
리들이 살짝 힘을 주어 덧붙였다.
“그렇다고 말해.”
“…….”“그러면 아무 것도 묻지 않을게. 없었던 일로 칠게.”
리들은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았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입은 제멋대로 움직여 미봉책(彌縫策)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임시방편일 뿐, 언제든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들은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끝을 봐야 했으나 리들은 그게 관계의 끝일 것 같아 두려웠다. 애매하고 불안한 관계라도 끝없이 연장하고 싶었다. 리들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무서워졌다. 청년이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대답해.”
리브의 눈꺼풀이,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리브는 리들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았다. 여기서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그저 놀러온 것뿐이라고, 그의 뜻대로 해준다면…… 당장 이 순간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언젠가 또 나는 같은 이유로 도망치고 마리라. 아니면 안주하고 말겠지. 그리고 이제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았다.
이래서 두려웠다. 리브는 줄곧 리들에게 매료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군들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거기다가 자신과 그는 몹시 닮았다. 반대에 끌리듯이 동류에게도 역시 끌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리브는 항상 자신에게 되뇌고 세뇌하듯 다짐했다. 자신과 그는 명백히 다르며 절대로 매료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다. 결국 리브는 끌리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절대 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사랑으로 치닫는 마음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며 나온 결론은 그를 정말로 끊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톰 리들이 태어날 때부터 볼드모트인건 아니었다는 깨달음과 그에 대한 인정뿐이었다. 리브 자신이 원작에 휘둘려서 그를 볼드모트로 본 것이었다. 진심 따위 없을거라 생각했던 리들은 나기니를 소중히 생각했고 리브 역시 특별하게 생각했다. 진심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묘약으로 태어나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받지 못했으니 사랑하는 법을 모를 뿐이었다. 그저 감정에 무지한 것뿐이었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그는 사실 가여운 사람이었다.
그걸 깨닫고 리브는 자신의 선택을, 어린 날의 결심을 몹시 후회했다. 왜 나는 그를 편협한 시선으로만 본걸까. 고아원에서 어린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몰랐다. 볼드모트가 되는 수순을 밟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러면 머틀의 죽음과 함께 해그리드의 퇴학 역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호크룩스 역시 만들지 않았겠지.
리브가 리들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곁에서 봐온 리들은 사악한 소지가 다분하기는 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브는 리들에게서 다른 인간적인 면모도 보았다. 가령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는 것 같은 그러한 것. 고아원 출신임을 알게 된 오리온을 여전히 믿고 총애하는 것 같은 그러한 것. 강압적인 면모가 있기는 했으나 주변 친인들의 말을 존중하기도 했다. 일단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너그러움을 베풀었다. 그 외에도 꽤 많았다.
톰 리들도 사람이었다. 감정을 가진. 어찌 보면 눈앞의 청년은 리브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업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리브는 괴로웠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그는 살인을 저릴렀고 호크룩스를 하나 만들었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리브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를 끊어내고자 독기를 품고 지금가지 버텨왔다. 감상에 젖어 있다가는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리브는 흐려지려는 표정을 굳히고 다부지게 말했다. 그렇게 리브는 리들의 미봉책을 망가뜨렸다.
“저는 호그와트를 자퇴했고,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당신한테는 더욱 더. 리브의 얼굴에 괴로움과 절망이 잠깐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리브의 말이 길어질수록 리들의 얼굴이 파삭파삭 굳었다. 이것은 명백한 거부였다. 그리고 리들은 내내 삭히고 삭혔던 화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돼, 참아야 해.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내 말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는군요.”
이제 리브는 눈앞의 상대를 신랄하게 비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리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났겠지. 내가 당신이 손 내밀고 회유하면 영광이라고 넙죽 따라갈 줄 알았나 보죠?”
“너-”
“착각하지 마, 난 이제 당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 말에 내내 참고 참았던 리들의 화가 다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시도는 깡그리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청년에게서는 평소보다 거칠고 격렬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닥쳐!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내 마음대로 움직인 적이 있기나 해?”
항상 차분하던 리들의 흑안이 활활 불타오르다 못해 상대를 꼼짝 할 수 없도록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네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헛소리 마! 난 항상 너를 염두해왔어! 내가 널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데!”
리들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핏대를 가득 세우며 소리치고 있었다. 몹시 흥분하여 얼굴이 잔뜩 붉어진 모습은 리브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리브는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리들은 좀처럼 본적이 없었다. 지가 뭘 잘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리브가 벽안을 치켜뜨며 리들을 노려보았다.
“귀담아 듣지 않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넌 내 말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잖-”
“당신이야 말로 닥쳐요!”
페이스를 잃은 것은 리들 뿐만이 아니었다. 리브 역시 리들에게 말려들어 평소 쓰지도 않던 거친 표현을 입에 담았다. 이들을 아는 호그와트 학생들이 보았다면 기함했으리라.
“나를 염두해왔다고? 날 중하게 여겨왔다고? 거짓말 말아!”
“거짓말이-”
“아니라고? 어린 내 뺨을 때린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리브의 입술에서 어린 날의 과오가 흘러나오자 리들은 잠깐 주춤했지만 이내 반박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널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대체 몇 번을 말해!”
“‘다시는’? 그 후는 어찌되든 내 알바 아냐. 이미 저질렀다는 게 중요한 거야.”
리들이 손을 들면 움찔할 만큼 그 사건은 리브에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처와도 같았다. 리브가 좀처럼 그 일을 꺼내지 않는 이유였다. 말하면서도 또 다시 상처받곤 했으므로. 리들이 주춤하는 사이 리브가 계속해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우는 데도 끝끝내 나기니를 만지라고 했지!”
“결국 만지지 않았-”
“그런건 중요치 않다고 했지! 당신은 내 약점을 이용해서 날 압박했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니까! 언제든 또다시 그럴 테고!”
리브에게서 평소의 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으며 몹시 표독스러웠다.
“그 뿐이야? 아픈 내게 임페리우스 저주를 걸겠다고 위협했지! 실어증으로 입을 닫은 날 협박했어!”
“그건-”
“또 잊어달라는 말을 하려고?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지! 어쩜 그렇게 잊는 게 쉬워? 난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데!”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딴 일들이 아닌 눈앞의 톰 리들이었다. 리브는 눈앞이 흐려졌지만 끝끝내 눈물을 비치지 않았다. 리브는 리들이 내심 당황할 만큼 히스테릭하게 굴고 있었다. 또한 리들이 말할 틈은 조금도 주지 않았다.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리들이 발끈하며 빽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 육성으로 욕이 흘러 나왔다. 그 조그마한 혼잣말을 들은 리브가 눈을 부릅뜨며 사납고 독살스럽게 굴었다.
“나 따위 별거 아니라며! 거슬린다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빌어먹을 계집애라며! 방금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으로 리브는 악을 썼다. 과거 리들의 과오를 짚어내던 원망은 이제 초점이 어긋나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타나서 날 뒤흔드는 거야?”
리브가 한 꺼풀 꺾인 기세로 던진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애원같기도 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듣지 않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그리고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흐릿하던 벽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내 악을 쓰다가 눈물을 보이는 리브를 응시하는 흑안이 충격으로 떨려왔다. 소녀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조금의 울음소리도 내지 않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리브를 보며 리들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 눈물 하나만으로도 리브가 얼마나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있는지 리들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방금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었다. 리들은 이토록 자신을 거부하는 리브에게서 크나큰 괴로움을 느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리들은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드높던 기세가 꺾이며 축 늘어졌다. 리들이 입술을 달싹 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울지 마.”
리들의 목소리에는 설핏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리브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역효과가 났는지 그 말이 기점이 된 것처럼 더욱 더 세차게 쏟아질 뿐이었다. 리들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좁혔으나 리브는 곧바로 거리를 넓혔다. 그와 동시에 리브는 자신의 장미목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바로 리들에게 그것을 겨누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청년은 그 움직임을 정확히 잡아냈다. 그 순간 리들은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제 공격 의사를 보이려는 리브의 모습에 리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톰 리들이 더없이 완벽한 청년이라고 해도 열여섯에 불과했다. 성년을 겨우 1년 남겨두고 있다고는 하나 그 나이 대에는 치기 어린 행동을 하기 마련이었다.
“나에게 주문이라도 쏠 셈이야?”
리들의 차가운 목소리에 리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리들은 오리온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국 리브의 소재를 알아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여 있던 울분은 쉽사리 풀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리브와 대립각을 세웠으나 그녀가 분을 못 이기고 악을 쓰는 사이 평정을 찾고자 했다. 리브가 우는 모습을 보자 리들은 절로 그리 되었다. 그렇게 참고 또 참고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배려하려 했으나 그에 대한 리브의 답변이 공격의사라면—아직은 아니지만— 리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게 된 셈이었다. 그 때문에 리들이 의도치 않았다 해도 평소보다 목소리가 차갑게 나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리브는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땀이 흥건했다.
“넌 못해, 올리비아.”
리들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매혹적인, 그러나 어딘가 비뚜름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런 청년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리브는 정신이 번쩍 들어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행동에 리들이 정말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리들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도, 리들을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현도 아니었다. 단지 두려움을 앞에 둔 자의 본능이며 그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리들이 그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내가 왜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리브의 입술에서 또다시 날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으나 거부감을 드러낸 다는 것은 명백했다. 리들은 눈앞의 소녀가 또다시 괘씸해졌다. 너 역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나의 오만이었던가. 리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걸 비웃음으로 판단한 소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지팡이를 쥔 손이 떨려왔다. 리브는 이제 상대방을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묘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리들의 모습은 리브를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토록이나 흔들리고 있는데 당신은……. 그래서 당신이 나를 항상 그렇게 쉬이 생각했구나.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닌거구나. 내내 뜨겁던 머릿속이 차가워지며 눈물이 뚝 멈췄다.
생각의 연장은 이성적이고 때로는 냉정한 리브가 치기어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지팡이는 마침 리브의 의사와는 달리 정확히 리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리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으나 그것은 순간일 뿐, 청년은 치명상을 입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청년에게 여유와 권태로움은 천성과도 같았다. 또한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는 소녀가 지팡이를 겨누는 모습은 몹시 처연해보여서 조금의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한 몫 했다.
“넌 나를 공격하지 못해.”
리브는 대답 대신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에 가득 배인 땀으로 인해 지팡이가 잠깐 미끄러질 뻔 했으나 리브는 그것을 꼭 쥐고 겨누었다. 언제든지 지팡이에서 마법의 빛이 튀어나갈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빤히 보던 리들이 말했다.
“너는 나에게 아무 짓도 못해.”
“그런 식으로…….”
“지금도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고 있잖아. 날 공격할 거라면 진작에 했겠지.”
그 말과 함께 리들이 다시 리브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리브는 두 걸음 물러났다.
“넌 그때 결국 내 편을 들어주었어.”
그 말에 리브의 벽안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게 무슨 감정으로 인한 것인지 리들이 알 도리는 없었다.
“넌 알고 있었잖아. 그게 애크로맨투라가 아닌 바실리스크라는 것을 말이야.”
리들은 리브가 언급하지 않으려 했던 비밀의 방일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범인이 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난 학기에 학교 측은 피해학생들이 깨어난 후 그들에게 목격한 것이 없냐며 하나하나 캐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던 크리스가 바실리스크라고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고 애크로맨투라는 아니었다는 간접적인 주장밖에 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 이었다. 만약 바실리스크에 대해 묘사를 했더라면 신빙성이 올라갈지 모르나 그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 측에서는 피해학생들이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못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리들이 기억력 마법을 써서 그 당시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워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브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럴 상황이 되지도 못했고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들은 그 당시 쓰러진 리브를 보고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리들이 처음으로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었다.
“다른 치들이야 내가 기억력 마법을 걸어놨으니 기억 못한다 해도 너는 기억하고 있었잖아.”
“난…….”
“넌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한 거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다고.”
그 말에 리브는 손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오며 푸른 벽안은 심한 충격과 쓰라린 괴로움을 담았다. 타임터너를 깼을 때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너무 착해서 날 공격하지 못해. 넌 그런 여자니까.”
“아니! 당신이 틀렸-”
리브의 부정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리들이 부정을 내놓았다.
“아니 난 틀리지 않았어. 무엇보다도 너는…….”
잠깐 뜸을 들이던 리들이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리브의 가디건 주머니에 삐죽 나온 무언가를 향해 있었다.
“너는, 날 좋아하잖…….”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의 지팡이에서 위협적인 빛이 튀어나갔다. 그 주문은 아슬아슬하게 리들의 귀를 스쳐지나갔다. 리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왼손으로 귀를 감쌌다. 이 괘씸한 계집애, 그 주문은…….
귓바퀴 부분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브는 의도한 행동인 듯 자신이 저지른 짓에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뻣뻣하게 굳었다. 원래는 위협용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도록 할 생각이었으나 조준이 살짝 빗나가고 만 것이다. 리브의 실력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으나 정신력이 약해진 만큼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리브의 벽안은 피가 떨어지는 상대방의 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주문을 쏜 줄 알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리들은 리브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 기분은 참으로 기묘했다. 지긋이 쳐다보는 것은 항상 자신이 아닌 그녀의 역할이었기에. 너는 나를 항상 이런 식으로 책망했었지.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나. 그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리들은 귀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심장부근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순간 무모한 오기가 들었다.
“쏘려면 이곳을 쐈어야지.”
그리고 이번에는 목을 가리킨다.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목을 가리키는 모습은 한편으론 괴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목을 날려버리던가.”
그 목소리에는 감정 한 점 담겨 있지 않고 서늘했다. 리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브가 지팡이를 조준하며 빽 소리쳤다.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이 마법을 쓴 지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저 내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에 열이 받은 것뿐이리라. 그래서 이렇게 시위 하는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안 봐줄거야! 정말 제대로 쏴버릴 거니까!”
리브는 거의 악에 받친 것 같았다. 지팡이를 겨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리들은 서늘한 눈으로 그것을 보다가 귀를 움켜쥐었던 피 묻은 손으로 지팡이를 턱 붙잡았다. 비릿한 피내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청년의 귓바퀴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브의 벽안이 혼란과 함께 지팡이를 친히 자신의 목 쪽으로 조준하는 리들을 오롯이 담았다.
“그럼 쏴봐.”
푸른 벽안에 경악이 가득 맺혔다. 하마터면 소녀는 지팡이를 정말로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뱉은 당사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과연 눈앞의 이 자가 불사를 갈망하며 호크룩스를 만든 미래의 볼드모트가 맞는 걸까. 리브는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었다. 가장 기초적인 주문을 쏜다고 해도 급소인 이상 최소 치명상이고 숨이 멎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차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리들은 더없이 침착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지 항상 차분하던 흑안의 일렁이는 모습만이 리들의 불안감을 암시할 뿐이었다. 지금 리들은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목숨이라는 담보를 걸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무얼 망설이는 거야?”
리브를 부추기는 듯, 리들의 미성은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다른 이의 목숨을 걸어놓은 마냥 태평해 보이기도 했다.
“네가 떠난 것은 나 때문이었지. 그 원인인 나를 없애면 돼.”
“…당신-”
“그럼 넌 호그와트를 자퇴할 필요도 없고 나를 피할 필요도 없어.”
리브가 호그와트 자퇴를 결심하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시일이 걸렸다. 자퇴서를 쓰기까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리브에게 호그와트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단지 원작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곳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탈출구와도 같았다. 리들에게 호그와트가 고아원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든 리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이렇게 닮았다. 그리고 리들은 그런 리브를 속속히 알았다.
“왜 나 때문에 네가 호그와트를 자퇴하면서까지 인생을 꼬아야만 해?”
그 말을 뱉으며 리들은 마음이 욱씬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말 너를 망치고 있어. 일렁이는 흑안에 또다시 죄책감이 맺혔다. 그러자 조금 홀가분해졌다. 리브가 정말 주문을 쏘아버린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아졌다.
“너에게 선택지를 줄게.”
치명적인 위험을 앞에 둔 사람치고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했다. 어찌 보면 톰 리들 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리들은 이제 무모한 기분이 들어 패기를 부려보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었으나 치기어린 감정은 그가 기꺼이 그리 하도록 만들었다.
“받아들인다, 죽인다.”
주어가 없었음에도 그것을 알아듣는 데에는 조금의 지장이 없었다.
“날 죽이든가, 나를 받아주든가. 선택해.”
리들의 입술에서는 주문을 쏘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넘어서 죽이라는 노골적인 말까지 흘러나왔다. 리들은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네 앞에만 서면 나는 이상해져. 이제 넌 나를 이상하다 못해 미치게 만드는구나. 리들은 순간 실소를 머금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 예정된 결과였다.
“날 죽이지 못하면 넌 나를 받아줘야 해.”
사실 이건 억지나 다름없어서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기도 하였으나 그 느낌은 사뭇 달라서 비장함이 감돌기도 했다. 막상 말을 뱉어 놓고 나니 리들은 살짝 겁이 났다. 정말로 죽이면 어떡하지? 만약 그녀가 나를 정말로 죽이려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리들은 아무 반격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은 그녀를 해칠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리들은 머리가 싸늘해지면서 자신에 의해 죽을 뻔한 리브의 모습이 떠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바닥에 흩뿌려진 금빛 머리칼, 그리고 초점 없는 벽안. 금방이라도 죽은 것 같이 돌처럼 굳어졌던 그녀. 도통 깨어나지 않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모습. 리들은 그 장면들이 여전히 생생했다. 다시 한 번 그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면 아찔하다 못해 숨이 막혀왔다.
“받아주기 싫으면 날 죽이면 되잖아.”
리브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서 가엾어 보일 정도였다.
“어렵지 않아. 간단하지?”
그렇게 말하며 리들은 싱긋 웃었다. 리들이 미소 짓는 동시에 칠흑 같은 흑안 속에서 붉은 빛이 반짝 빛났다. 그 빛은 몹시 매혹적이어서 리브는 잠깐 넋을 잃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리브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리들은 리브를 재촉했다. 리들의 흑안이 온갖 감정으로 일렁였다. 리브는 다른 의미로 치명적인 리들의 마성에 잠깐 홀려 있다가 물씬 느껴지는 집착과 광기에 소름이 끼쳐왔다.
“아까 주문을 쏜 것처럼, 내가 너에게 가르쳤던 주문으로 나를 죽여.”
그 말은 리브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멘토링을 하면서 리들은 리브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리브가 서툴렀던 마법의 약은 중점을 둔 부분에 불과했다. 리들은 마법은 물론이거와 처세술이나 그 밖의 여러 부분에도 배울 점이 많은 자였다. 특히 어둠의 마법에 관해서는 그 어느 것들 중에서도 가장 비범한 재주를 보였다. 리브는 어둠의 마법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없었고 어느 정도는 흥미로워 했다. 리들은 리브와 자신 사이에 생긴 비슷한 취향에 은근히 기뻐하며 기꺼이 어둠의 마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방금 리브가 홧김에 쏘았던 주문은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리들이 리브에게 전수한 것이었다.
리브는 리들에게서 어둠의 마법을 배운지라 자신도 모르게 리들이 마법을 시전하는 스타일을 따라가곤 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가르친 어둠의 마법으로, 자신을 공격한 리브의 모습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리들의 마음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리들이 정확히 집어낸 순간 리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지팡이를 쥔 손에 이어서, 몸을 지탱하던 다리 역시 힘이 풀렸다. 그렇게 리브는 그 자리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리들도 긴장이 풀려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피 묻은 지팡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리브는 마치 그 소리가 자신의 결심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는 독한 방식으로 자신의 결정을 무너뜨려 놓았다.
“이게 너의 선택이란 말이지.”
어쩐지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흥분이 섞여 있었다. 리들이 자세를 낮춰 주저앉은 리브와 눈높이를 맞췄다.
“난 분명 기회를 줬어. 나를 영원히 떨쳐낼 기회를 말이야.”
미성은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냉혹했다. 그러나 살짝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되었다는 흡족함도 함께.
“그 기회를 놓친건 너야.”
리브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리들은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후회해? 하지만 이젠 늦었어.”
“…….”
“넌 나를 죽였어야 했어.”
리들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리브가 자신을 죽이지 않아서 기뻤다. 공격조차 하지 않아서 기뻤다. 희망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리브는 그것을 깨어놓겠다는 듯 고개를 퍼뜩 들어 리들을 응시했다.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는 벽안은 눈앞의 상대에 대한 원망과 지독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리브의 입술에서 기겁할 만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나쁜 자식!”
리브는 울부짖으며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리들은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까지 고운 말만 입에 담던 리브였기에 당황할만도 했다.
“이 빌어먹을 놈……. 개자식……. 너 같은 거 지옥에나 가버려…!”
본래 욕설을 쓰지 않는 지라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 리브다웠다. 하지만 평소 입에 올리지도 않던 욕설을 마구 내뱉는다는 것은 리브가 그만큼 무척 힘들고 극한의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깨달은 리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정말로 망치고 있어.
“나한테 어떻게 그런 걸 시킬 수가 있어……. 내가 어떻게…….”
소녀의 목소리에는 울분과 애통이 가득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겠냐는 말이야! 리브는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끊어버린 그 말을 속으로 외쳐보았다.
“당신은 나를 항상 비참하게 만들어.”
그렇게 말하며 리브는 또다시 눈물을 한아름 쏟아냈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리 꺼져, 꼴 보기도 싫어. 내 앞에서 사라져. 당신은 정말 최악이야. 정말 미워. 싫어…….”
리브는 마치 아이처럼 횡설수설하다가 이제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울었다. 크게 소리내서 우는 그 모습에 리들은 몹시 괴로워졌다. 그제서야 리들은 순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니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이 틀렸다. 걷잡을 수 없어진 상황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부딪혀야 했다. 자신을 죽이라는 협박을 할 것이 아니라 오해를 풀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다.
“울지 마.”
계속 울기만 하는 리브의 모습에 리들은 참기가 힘들어졌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도, 더 이상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울지 말란 말이야!”
리들이 울지 말라고 윽박지르자 리브는 더욱 더 큰소리로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리들은 아차 했다. 정말 자신은 구제불능이라 생각하며 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올리비아.”
리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리브는 대꾸 없이 울기만 했다. 우는 거라면 질색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질리다는 기색이 만연함은 물론 아예 무시했겠지만 상대가 리브였기에 리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I'm sorry, Everything is my fault.)”
편지에서 보았던 구절이 리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리브는 더욱 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어졌다.
“울지 마, 제발(Please).”
“선배야 말로, 제발…….”
한참을 울음소리만 뱉어내던 리브의 입술에서 여러 가지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꽤나 솔직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이대로 그냥 돌아가요. 날 더 이상 흔들지 말아요.”
“……싫어.”
“이미 끝난 인연이에요. 이렇게 떠나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놓아 달라 호소하는 모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에 리들의 흑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끝난 인연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끊어!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리들은 그렇게 소리치며 리브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당신은 어린 날의 나에게 관심 갖지 말았어야 했어.”
“…….”
“내가 마녀이든 말든, 파셀마우스이든 말든. 신경 따위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리브는 이제 리들과의 인연 자체를 부정했다. 그 말은 마치 리들에게 당신이 나를 망쳐놓았노라 말하는 것 같아서 리들은 아까 잠시 희망에 젖어있던 마음이 송두리 째 추락하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리들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날 멘티로 지목하지도, 슬퍼하는 날 위로하지도 말았어야 했어!”
리들은 자신과의 추억 하나하나를 부정하는 리브를 참아내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넌 항상 이런 식-”
리들은 속내를 와르르 쏟아내려다가 멈칫했다. 당장의 분풀이를 할 것이 아니라 꼬여있는 매듭을 풀어야만 했다. 그녀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많았다. 화를 내고 의미 없는 갈등을 빚을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해야만 했다.
“진정해.”
사실 진정하라는 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참아. 더 이상 일을 그르치면 안 돼. 돌이켜야 했다.
“난 너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
“오해를 풀고 용서를 빌러 왔어.”
그 말에 리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용서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시에 리들은 살짝 울컥했다.
“오해? 나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고 있어요. 날 속일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에요.”
그는 비밀의 방을 열고 평소 싫어하던 이들을 습격하고, 종국에는 머틀을 죽이더니 그녀를 희생양으로 첫 번째 호크룩스를 만들었다. 그 잔혹한 진실에 자신은 얼마나 많은 날을 괴로워했던가.
“넌 잘못알고 있어. 대체 네가 어디부터 오해를 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리들은 리브가 알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그 말에 리브가 신랄하게 대꾸했다.
“난 당신의 혀가 얼마나 교활한 지 잘 알아요.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넌 들어야 해.”
리들이 리브의 손목을 붙잡았고 소녀는 그것을 확 뿌리쳤다.
“듣지 않겠다고 했죠!”
“들어야 해.”
“…….”
“그리고 넌 나를 받아줘야 해.”
리들의 흑안과 리브의 벽안이 얽혀 들어갔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다가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리들이었다.
“제발 부탁이야.”
그 말에 리브의 눈이 커졌다.
“내 얘기를 들으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 거야. 응?”
“…….”
“듣고 판단해. 그것도 안 돼?”
리들의 간절한 눈빛에 리브는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실만을 말할게. 말장난 따위 안 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게.”
“…….”
“내가 잘못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내 사정이 어땠는지도 생각해 줘. 결과만 보지 말고 그 과정도 봐줘.”
리들은 지금 애원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제발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내 사정을 알아달라고. 제발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넌 다른 사람은 다 이해하면서…… 왜 나만은 이해하지 않아?”
리들의 입술에서 섭섭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한 섭섭함은 이제 아릿한 슬픔까지 담고 있었다.
“그저 들어줄 수조차 없는 거야? 내가 너에게 그토록 신뢰가 없어?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시간들은 전부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적어도 난 진심이었는데……. 넌 아니었어?”
“…….”
“진심이었다면 넌 이렇게 나올 수 없어. 최소한 들어는 줘야 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리브를 보며 리들은 더 애가 타는 듯 했다. 리들은 이번에 풀지 못한다면 이게 영영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
“올리비아, 제발.”
한참의 침묵 후에 리브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리브의 말에 리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내내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방금까지 아무 말도 듣지 않겠노라 축객령을 내리던 리브였다. 그런 소녀의 태도 변화는 갑작스러울 법도 했지만 정신력이 한계에 내몰린 리들로서는 깊이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다. 그저 리브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으니 오해를 풀 수 있겠다는 기대에 가득 찼을 뿐이었다. 리브가 리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일단 앉아요. 뭐라도 좀 내올 테니까.”
소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애매하며 제법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리들은 희망에 젖어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늦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을 좀 하자면 개강 여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 여럿 있어서 글이 더뎌졌습니다. 일단 마음은 추스렸고 일단은 해결을 봤습니다. 그런데 영 기분이 좋지 못해서... 정말 말 이라는 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얹기도 하더라구요... 이런 상황들 때문인지 몰라도 뜰과 공지에 밝힌 것처럼 글이 생각처럼 안써졌어요.... 하지만 대충 쓸 수는 없고, 가장 중요한 파트라서 시간을 들여서 공을 들이고 열심히 썼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쁜 그림 그려주신 로비스체님, 프레키님, 페얼님, 예은하랑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럼 독자님들 좋은 밤 되세요^^
+ 오랜만에 리리플할까 해요. 원하시는 분은 앞에 @를 붙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