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멘토링-91화 (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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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돌이켜야 하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리들은 블랙가를 방문했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의 집에 오라 했지만 리들은 앞으로 있을 약혼식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블랙가의 가주인 악튜러스 블랙은 아들이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해댄 리들을 몹시 궁금해 했는데 실제로 만나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홀딱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리들이 방학동안 임시방편으로 블랙가에 머무르도록 허가받는 것은 몹시 손쉬웠다.

블랙가에는 리들이 언젠가 라이트 가문에서 보았던 초상화가 있었다. 블랙가로 시집간 리브의 먼 조상인 듯했다. 청년은 해당 초상화의 금발과 벽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올리비아와 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너 없이도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어. 거봐, 내가 뭐랬어. 하지만 리들의 얼굴에는 미세한 그늘이 깔려 있었다.

“정말로 너 따위 내게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리들은 중얼거린 말과는 달리 견디기 힘든 듯 금발과 벽안에서 눈을 떼버렸다. 계속 누군가가 생각난 탓이었다. 리브와 어디 어디를 닮았나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리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끊어내겠다 했는데 어찌해서 나는……. 냉정하게 잘라내려 했으나 그러기가 몹시 힘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 찬란한 금빛과 푸른빛을 당장 눈에 담고 싶었다.

호그와트에서는 항상 그래왔었다. 관계가 끊어진 후에도 연회장에서나마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학 내내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겨우 1주일 밖에 안 됐을 뿐인데…… 사실 리들은 리브가 그리웠다. 올리비아, 네가 보고 싶어. 하지만 리들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미 끊어진 관계고 잘라낸 인연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여러 번 자신과의 관계를 거부했다. 거부한 이에게 매달릴 만큼 리들의 자존심은 녹록치 않았다. 네가 매달린다면 모를까. 나는 너에게 충분히 많은 기회를 주었어. 하지만 리들의 마음은 그리 간단명료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은 리들의 계획마저 방해했다.

사실 리들은 이번 여름방학 동안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틀 행글턴을 방문하는 것. 리들은 지난 학기동안 이 계획을 세워왔다. 그곳에는 아마 자신의 외가인 곤트 가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을 리들 하우스도. 리들은 자신이 조사한 자료대로 곤트가와 리들 하우스가 있는지 답사하고 여러 가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리들은 몹시 무기력했고 도저히 의욕이 나지 않았다. 올리비아. 그녀가 문제였다. 도저히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리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블랙가를 방문한 아브락사스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저조한 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조심스레 운을 띄우고 있었다. 리들이 종종 라이트 가문의 초상화로 시선을 두는 것을 눈치 챈 아브락사스는 친구의 무기력함이 아마 리브로 인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리브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냐는 아브락사스의 물음에 리들은 의외로 진지한 대답을 내주었다.

“좋지 않아. 그녀는 나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전처럼 따르지도 않아.”

“리들, 대화를 해봐. 내가 전에도 몇 번 말했잖아.”

그 말에 리들이 신경질 적으로 투덜거렸다. 그놈의 대화!

“몇 번이고 그렇게 해보려고 했어. 하지만 말할 틈조차 주지 않아. 아예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단 말이야. 그녀는 나를 격렬하게 거부해.”

“오, 리들. 설마 리브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그 말에 리들의 잘생긴 얼굴에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툭 내뱉는다.

“잘못한 거 없어.”

하지만 살짝 자신 없는 말투였다. 흐음. 아브락사스는 별로 리들의 말을 믿는 것 같은 눈치가 아니었다. 말포이가의 청년은 ‘네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리브가 그러겠지.’라고 돌직구를 던지고 싶은 것은 참으며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리들, 너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리브의 입장에서는 잘못일 수도 있어. 남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지. 여자는 섬세한 종족이라서 배려해야 해.”

사정을 모르는 아브락사스의 말은 묘하게 상황에 맞아 떨어졌다. 리들은 비밀의 방을 열었고 바실리스크를 꺼냈다. 그리고 그 무모함은 식물인간이 된 피해자를 여럿 낳았고 종국에는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심지어 그녀는 그 피해자 중 하나였으며 눈앞에서 죽음을 보았다. 또한 리들은 일을 수습하겠다는 명분하에서 다른 이에게 누명까지 씌웠다. 그녀가 알면 학을 뗄 일이었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었다. 리들은 착잡함에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바람에 항상 단정하던 머리칼이 흐트러졌지만 그걸 신경 쓸 여력조차 없어보였다.

“내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어.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물론 크리스가 그리 된 것은 리들을 기분 좋게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맹세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불행한 사고였어.”

알렉스 애컬리도, 아놀드 위즐리도, 심지어 내심 흡족하기까지 했던 크리스티안 카르티에까지. 리들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리들은 바실리스크로 습격같은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특히 셜리 머틀이 죽은 것과 리브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것은 더욱 더!

리들은 본래 그런 수습하기 힘든 사고를 칠 정도로 답 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바실리스크를 꺼내 학교를 활보하게 한 것은 무모한 감이 있었으나 전부 리들의 예상 밖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고였다. 이번 비밀의 방 사건은 리들의 프라이드와 자존심을 상당 부분 훼손시켰다. 청년은 일련의 사건들로 통해 자신이 바실리스크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했으며 흥미와 호기심 때문에 무르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어. 난 절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야.”

리들을 응시하는 아브락사스의 표정이 기묘했다. 하지만 흑발의 청년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아브락사스 네 말이 맞아. 그녀에게 큰 잘못을 했어.”

그녀를 죽게 할 뻔했다. 그녀가 치를 떠는 짓들을 저질렀다. 비록 통제 밖이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했다. 분하지만 그랬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지.”

리들이 속눈썹을 내리 깔며 힘없이 말했다. 이제 백금발의 청년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정말 리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리브가 그를 보지 않을 만도 했다. 맙소사, 리들 어째서 너답지 않게 그런 무도한 짓을 한 거야. 아브락사스는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녀가 원치 않고 치를 떠는 일인데 내가 그런 짓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할 리가 없잖아. 그녀는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어. 하지만 대화를 할 수 조차 없어. 어째서 내 말은 아예 듣지도 않는 거지?”

리들은 이제 씩씩거리며 온갖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브락사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래, 남자니까 그런 것은 억누르기가 힘든 법이지. 아마 리들이 아브락사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것’을 알았더라면 식겁했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브락사스는 단호하게 리들에게 해답을 내주었다. 아브락사스의 관점에서 이는 리들이 백번 천번 잘못한 일이었다. 이번 일은 무작정 리들의 편을 들어주기가 조금 힘들었다.

“리들 네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면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지. 네가 꼴도 보기 싫을 거야.”

“전부 오해야, 그건 사고였다고 몇 번을 말해.”

“그래도 리브에게 씻어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혔잖아.”

그 말에 리들이 움찔했다. 본인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일까. 그 기세를 타고 아브락사스가 자신의 생각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리브는 네 말에 설득될 것이 무서운 거야. 그래서 별 것 아닌 일이 될 것이 두려우니까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지. 어쩌면 그렇게 넘어간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을 지도 몰라.”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브락사스의 말이 옳았다. 리들은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리브가 왜 자신을 보려고 하지도 않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핀트가 어긋나 있었지만 둘은 교묘하게 말이 통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해가 있다면 풀어. 그리고 어찌됐든 용서를 받아. 리브는 관대하니까 음…….”

과연 이 문제에도 관대할까. 아브락사스는 몹시 자신이 없어보였다. 그도 이런 류의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쉬이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했어! 그건 정말 아니야. 내가 무조건 리들 너의 편이지만 이건 좀…….”

이제 아브락사스는 어쩌다가 완벽하기 그지없는 친구가 이리 되었나 혀를 끌끌 찼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강제로 덮치다니 그건 정말 아니지. 아브락사스야말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리들은 뭔가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데?”

자신의 감상에 빠져 있어서 아브락사스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깊이 생각지도 못한 리들이었다. 그제서야 리들은 아브락사스가 무어라 추측한 건지 묻고 있었다.

“…리브를 억지로 덮친거 아니었어?”

리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가득 찼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유쾌하지 않다는 표정. 그런 친구의 태도에 아브락사스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뭐,뭐야! 그럼 리들 너 리브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 난 당연히 네가 강제로 덮친 줄 알고…….”

화를 참는 건지 리들은 낮은 목소리로 한글자 한글자를 똑바로 내뱉었다.

“아브락사스, 너 나를 그런 발정난 짐승으로 본거야? 난 네가 아니야.”

순식간에 발정난 짐승이 된 아브락사스는 펄쩍 뛸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나도 그런 짓은 안 해!”

“참 어이가 없군.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대체 나를 뭘로 본건지.”

이제 리들은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분노보다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어이가 없는 듯 했다.

“물론 그건 너 답지 않은 짓이지. 생각해보니까 좀 터무니없긴 하다. 사과할게.”

철의 이성을 지닌 톰 리들이 여자를 강제로 덮친다? 여자가 매달린다면 모를까. 리들은 여자라는 종족 자체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 여자가 리브라면……. 아브락사스는 생각을 입으로 옮겼다.

“하지만 상대가 리브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리들의 얼굴에 표정이 싹 사라졌다. 아브락사스는 ‘너 리브를 짝사랑하고 있잖아.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대신 씩 웃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지 몰라도 리브는 관대하니까 용서해 줄 거야.”

퍽이나. 그렇게 생각한 리들은 그 다음으로 나온 친구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도 너를 좋아하잖아.”

“…뭐?”

얼떨떨한 리들의 반응에 아브락사스가 피식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설마 몰랐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순간 리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리고 리브도 알고 있을 거야. 리들 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뭐?”

리들은 소리 높여 반문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아브락사스는 그 태도에 잠깐 헛웃음을 뱉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 리들. 이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어?”

리들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올리비아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나 역시……. 리들은 이제 오래 전부터 미뤄온 그 대답을 해야만 했다. 나는 올리비아를……. 어쩌면 이미 리들은 이미 그 대답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리브를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대답은 나와 있는 것이었다.

“네 마음, 그리고 아마 같을 거라 생각되는 리브의 마음 말이야.”

리들은 타인에게서 그러한 말들을 직접적으로 들으니 낯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한다고……. 리들이 감정에 무지하다 한들 둔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을……. 확신하지는 못했던 생각을 타인에게 확인 받으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정말로 그녀도 나를 좋아할까. 그래서 더욱 더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 약한 그녀라면 무엇이든 이해해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자존심을 세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운 대가를 리들은 톡톡히 치뤄야만 했다. 그 결과 리들과 리브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았다. 리들의 얼굴에 쓰디쓴 표정이 맺혔다.

“너 그 이후로 리브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잖아. 지금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것도 리브 때문이고. 내 말이 틀려?”

아브락사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정곡을 찔린 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다가는 누가 리브를 채갈 지도 몰라. 가령 카르티에라던가…….”

그 말을 뱉자마자 리들의 흑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매서운 눈길은 아브락사스에게 정통으로 꽂혔다. 리들의 살벌한 시선에 움찔한 아브락사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리들은 말만으로도 불편한 심기, 아니 그 이상의 기분을 흉흉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는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른 가서 잡아.”

리들은 항상 자신만만하다 못해 거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리들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쉬운데 너만은 어려워.

“리브가 너를 정말로 끊어버리기 전에 말이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아브락사스의 말들이 기폭제가 된 걸까. 리들은 딱 하루 두문불출하더니 깃펜을 쥐고 양피지에 장문의 문장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려한 필체가 가득한 양피지 여러 장은 이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행이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오리온은 왜 기껏 길게 쓴 편지를 태워 버리냐며 아까워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 정도 정성이면 리브도 마음이 움직일 텐데요.”

오리온의 말에 리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미사여구나 변명이 가득한 방금의 그 편지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을 보냈더라면 진심이 없다며 더욱더 자신을 경멸하고 멀리 하겠지. 리들은 리브를 잘 알았다. 그녀는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하다. 리들이 리브에게 기회를 준만큼 그녀 역시 그러했다. 그건 리들이 리브를 예외로 두었듯이, 리브 역시 리들에 한해서는 맺고 끊음이 정확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리브는 리들을 정말로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이런 미사여구 따위는 소용없었다. 읽자마자 태워버리리라. 그녀는 나를 잘 안다. 진심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나를 잘 알아.

“리브는 착하고 관대하니까 편지를 보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질 거에요. 그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너도 그렇고 아브락사스도 그렇고 다들 정말 그녀를 모르는 구나.”

그 말투는 자조적이었으나 남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말에 오리온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리브를 잘 알아요.”

“아니, 너는 그녀를 몰라.”

리들의 단호한 말에 오리온이 말을 뚝 멈췄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마음이 약하지만 실상은 아니야. 맺고 끊음이 정말 확실하거든.”

“하지만 제가 본 리브는…….”

“마냥 정에 약해보이니?”

그건 나라서 그런거 였어. 리들의 얼굴에 순간 우월감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나에게 그녀가 예외이듯이 그녀 역시 나에게 그랬던 것이다.

“리브는…….”

“그래, 그럴 지도 모르지.”

리들 자신도 처음에 리브가 마냥 정에 약하다고 생각했으니 오리온이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했다. 리브는 마음이 여리고 정에 약했다. 하지만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학생들을 거절조차 제대로 못했으리라. 하지만 리브는 칼같이 거절하고 잘라내곤 했다. 희망을 주지 않겠다며 배려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리들은 그 행동의 진위를 알았다. 마음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칼같은 그녀가 마음이 떠난 상대에게는 어떨까.

“하지만 마음이 떠난 상대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냉정한 게 그녀야.”

그 말을 뱉자마자 리들은 순간 속이 답답해졌다. 자신은 그녀에게 마음이 떠난 상대였기에. 너는 정말로 나를 끊어버린 거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리브가 그렇게 쉽게 선배를 놓을 리가 없잖아요. 리브는 선배를…….”

오리온은 뒷말을 잇는 대신 말끝을 흐렸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지. 리들의 깊은 흑안이 아끼는 후배를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그 시선은 양피지로 돌아갔고 리들은 유려하게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리온, 네가 알 지 모르겠지만.”

편지 작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이 났다. 고작 몇 문장을 적은 것이 전부였다. 양피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집어넣은 리들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타인보다 ‘내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야.”

미성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경고의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리들 선배, 무슨 말씀을…….”

“명심해두는 게 좋아, 오리온.”

리들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오리온은 지금의 리들이 초식동물을 노리는 맹수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자신은 초식동물이 된 것 같다는 느낌 역시 함께 받았다.

“어찌됐든 오리온 너 역시 내 사람이니까 어느 선까지는 관대하게 눈 감아 주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말을 끝마친 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오리온은 자신을 신임하는 듯한 리들의 말에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리온은 마치 위협을 당한 느낌이었다. 둘 사이의 무거운 침묵은 리들이 심드렁하게 꺼낸 말에 의해 금방 깨졌다.

“편지를 부쳐야겠어. 부엉이를 빌릴 수 있을까?”

“물론이죠, 선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둘은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걱정 마세요. 리브가 만나자는 답장을 해올 거에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리브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

“오리온! 내가 요즘 다이애건 앨리에서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 지 알아?”

그렇게 오지 않는 답장으로 내리 심기가 불편한 리들의 귀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흑발에 은회안을 가진 어린 소녀가 오리온에게 한참을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간만에 그리몰드를 방문한 발부르가 블랙이었다. 오리온의 약혼녀는 자랑할 것이 생기면 쪼르르 그리몰드 저택을 방문해 자신의 약혼자에게 큰소리를 치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아브락사스는 귀여운 버릇이라 칭했지만 오리온은 귀찮은 버릇이라 명명했다. 블랙가의 후계자는 어느 때처럼 심드렁하게 누구냐고 물음으로써 나름의 반응을 보여주었고 발부르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비아 브릴리언트, 리브 선배야.”

그 말에 오리온이 휙 고개를 돌려 발부르가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오리온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자 더욱 더 들뜬 듯 했다.

“발부르가, 언제 그녀와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 거야?”

“좀 됐어. 리브 선배는 정말 착하고 상냥해. 그리고 얼마나 예쁘고 우아한지……. 혈통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리브 선배는 그 누구보다도 정말 순수혈통 귀족의 표본이야. 미모에, 능력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그리고…….”

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발부르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점점 리브에 대한 괘씸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내게 리브 선배를 소개 시켜주지 않았지만 기어이 나는 내 힘으로 그분이랑 친분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

“그래, 참 대단하다.”

성의 없이 대꾸하는 것 같았지만 오리온은 나름 약혼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발부르가는 계속해서 리브와 요즘 무엇을 했는지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 떠들고 있었다. 어떤 디자이너에게 손톱 관리를 받았다, 같이 에밀리의 약혼 선물을 샀다, 나한테 맛있는 마카롱을 맛보게 해주었다 등등 잡다한 일들이 발부르가의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리온은 옆에 있는 리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저, 리들 선배…….”

“나는 신경쓰지 말고 하던 얘기들 계속해.”

리들은 상냥하게 대꾸하며 입술을 말아 올렸지만 어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내 편지에 답장할 시간은 없고 저 계집애랑 놀 시간은 있다는 거지? 리들은 지금 재잘거리고 있는 어린 여자애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이를 부득 갈았다. 답장이 오기는 하는 건지. 아니, 내 편지를 읽기는 한 거야? 리들은 발부르가가 오리온에게 자신의 말에 집중하라며 짜증을 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듣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작품 후기 ============================

선작,추천,코멘트 항상 감사합니다!

예쁜 그림 주신 길잃은소녀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편에도 리들 시점이 이어집니다.

그럼 저는 내일 이 시간에 또 올게요. 다들 좋은 밤 되세요^^

+샤트리님, 발부르가 블랙은 시리우스의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입니다. 오리온 블랙과 발부르가 블랙은 결혼해서 시리우스 블랙과 레귤러스 블랙을 낳습니다. 뜰에 블랙 가계도가 올려져있으니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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