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멘토링-44화 (4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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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자각

갑자기 걸음을 멈춘 리들은 고개를 휙 돌려 리브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리브의 목 쪽을.

“역시 못 참겠어.”

“뭐,뭐가요?”

이 인간이 또 왜 이러나싶어 리브는 마른 침을 삼켰다. 리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리브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 태도에 리들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 걸음 다가간다. 또 다시 한 걸음 물러나고, 한 걸음 다가가고. 그게 반복되자 리브는 벽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아, 왜 그래요! 내가 뭘 잘못했-”

그 순간 리들은 리브의 넥타이를 휙 잡아 당겼다. 뭐야, 날 목 졸라 죽일 셈? 내가 요즘 이 인간한테 개긴 적이 있던가? 리들은 얼굴을 찌푸린 채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살짝 드러난 블라우스 윗 단추를 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 손짓에 리브는 잔뜩 얼어붙었다. 존슨이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내던 그 때가 오버랩 되기 시작했다. 순간 두려움에 리브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두 번째로 풀리는 블라우스 단추를 보며 리브는 리들을 팍 밀쳐냈다.

“손대지 말아요. 왜 이러는 거에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 촉촉해진 벽안, 살짝 겁먹은 듯한 리브의 얼굴을 보며 리들은 당황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황급히 블라우스 단추를 잠그는 리브를 보며 리들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눈치 챘다. 이게 날 뭘로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넥타이 비뚤어 진거 고쳐주려고 그런거야!”

리들이 빽 소리쳤고 리브는 자신이 과민 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하지만 갑자기 단추를 풀다니! 이제 리브는 두려움을 전부 떨쳐내고 빽 소리쳤다.

“놀랬잖아요! 난 또 무슨 짓 하려는 줄 알고! 말로 하면 될 거 아니에요!”

리브는 신경질 적으로 넥타이를 휙 풀어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못 참겠다고 했지. 이 넥타이 비뚤어진 것 때문인가. 리브는 다시 넥타이를 맸고 리들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또 삐뚤어졌어. 너 가끔 그러더라.”

리들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소녀의 넥타이를 쉽게 풀어낸다. 여자애들 넥타이는 작고 짧네. 자신의 긴 넥타이를 떠올리며 리들이 혼잣말을 했다. 리들은 소녀의 블라우스 옷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둘렀다. 리들의 손이 목을 살짝 스치자 리브는 순간 찌릿함을 느꼈다. 이제 리들은 깔끔한 솜씨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청년이 넥타이를 매는 방식은 리브와 조금 달랐다. 넥타이를 매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도 리들은 타인과 달랐다. 한 번 더 감네. 리브의 혼잣말에 리들이 대꾸했다. 그래야 단단하게 묶이거든. 리들은 소녀의 옷깃을 정돈해주었다. 소녀의 블론드가 청년의 손등을 간지럽히자 리들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곧바로 리브에게서 떨어졌다.

*

“잠깐만 여기 있어요. 기숙사 가서 책이랑 필기구 가져올게요.”

7층에 도착한 리브는 리들을 어느 지점에 세워놓고 말했다. 뒤돌아서려다가 덧붙인다. 뭣하면 먼저 가셔도 좋아요. 리들은 고개를 저었고 리브는 익숙하게 기숙사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소녀를 청년이 뒤따라가고 있었다.

“여긴 우리 기숙사 가는 길인데….”

“알아,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는 어떤지 궁금해서.”

그렇게 말하며 리들이 웃었다. 각 기숙사 입구에는 피델리우스 마법이 걸려있어서 비밀 파수꾼, 즉 그 기숙사의 학생이 아니면 입구를 찾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고로 슬리데린인 리들이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에 접근하려면 래번클로 학생인 리브와 동행을 해야만 했다.

“별거 없어요.”

“너희는 퀴즈를 맞춘다며? 이번에는 무슨 퀴즈를 낼까 궁금해서.”

리들의 말에 리브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외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빛 청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대체 톰 리들이 못하는 건 뭘까 생각하며 리브는 앞서 걸었다. 이내 리들에게 따라 잡혔지만 말이다. 결국 리브는 톰 리들을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외쳤다.

“잠깐! 이번에는 무슨 퀴즈를 낼까 궁금하다는 말은 전에 와봤다는거? 분명 피델리우스 마법이 걸려있어서…”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

어떤 래번클로가 타 기숙사생을 데려온거냐고 투덜거리며 리브는 빠르게 걸었다. 사실 리브의 예상대로 리들은 오래 전에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를 와본 상태였다. 고로 다른 래번클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비밀 파수꾼이 된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혼자서도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에 접근이 용이했다. 얼마 안지나서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가 드러났다. 한편 기숙사 입구에는 몇 몇 학생들이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리브 선배!”

“저희 들어가게 해주세요. 왜 선배들 아무도 안와요?”

“이놈의 독수리가 또 심통났어!”

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리브는 리들의 존재를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다른 기숙사는 물론 래번클로까지 안 들여보내주는 기숙사 입구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인가. 리브의 예상대로 리들은 작게 웃고 있었다.

“가끔 퀴즈가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저들은 신입생이라서 서툰 것뿐이에요.”

“난 아무 말도 안했어. 그리고 쟤는 1학년이 아닌거 같은데.”

리브는 웃고 있는 리들을 살짝 흘겨보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1학년생들이 리브의 옆에 있는 리들을 보고 잠깐 속닥거렸다.(“톰 리들 맞지?” “진짜 잘생겼다.”) 리브는 병아리처럼 재잘재잘 거리는 1학년생들의 푸념—“독수리가 이상한 질문해요!”—을 받아주며 독수리 문고리를 두드렸다. 독수리는 부드럽게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질문에 리브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옆에 있는 사람의 외모를 표현한다면?”

한편 학생들은 왜 우리한테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냐며 독수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물론 독수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편 리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독수리를 보고 있었다. 입구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후배들을 달래던 리브는 리들을 흘깃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인간을 데려오는게 아니었는데…. 리브는 독수리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너 일부러 그런 질문 던진거지? 왜 질문을 바꿔?”

“내 맘이야.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까 해봐.”

“이 얄미운 독수리!”

리브는 고개를 휙 돌려 리들의 잘생긴 얼굴을 응시했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네. 그렇게 생각하며 리브는 리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리들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잠깐 흑안을 깜박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1학년 여학생들이 넋을 잃고 리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어디 작은 흠이라도 없나 찾던 리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흠을 중심으로 표현하려고 했는데 그게 없어! 뭐 이런 인간이 다있지?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야할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한숨. 리들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한숨을 쉬어? 그것도 두 번이나.”

“한숨 나오게 잘생겨서요. 도무지 흠이 없어.”

리브의 대답에 리들은 흑안이 살짝 커졌다. 소녀가 밉살맞은 말을 할거라 생각했던 리들은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하지만 정작 리브는 어떤 미사여구를 읊어야 독수리가 만족할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한숨 나오게 잘생겨서요. 도무지 흠이 없어.]

방금 들은 리브의 말이 다시 리들의 귓가에 재생되었다. 뭐지 이 기분. 리들은 프라이드가 높음은 물론 자기애도 무척이나 강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찬사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리들에게 리브는 질린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의 특출함에 대해서는 인정할지언정 찬사의 말을 뱉지는 않으려 했다. 특히 다른 여학생들이 소리 높여 찬양하는 저 빛나는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절대로 찬사 한 조각도 내어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리브가 리들에게 잘생겼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지겹도록 들은 말인데 왜 웃음이 절로 지어지는지 리들은 알 수가 없었다.

“예술가가 푸른 빛 한 조각 없는 흑단 같은 밤하늘을 깔아놓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귀하디 귀한 보석을 박아 놓았는데 밤하늘과 대조되는 새하얀 백옥,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흑요석, 고혹적이나 잔혹할지 모를 핏빛 루비가 별처럼 수놓아져 있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미사여구, 리브는 자신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 민망한 듯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래번클로다운 대답이라면 여기서 끝나면 안되겠지. 소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세기의 역작일지 모르나 헤어날 수 없는 어둠에 물들면 그 아름다움은 영영 잃고 말겠지.”

그리고 보석은 하나하나 깨어져 흔적도 없이 흩어져 종국에는 에메랄드빛에 의해 파멸하고 말겠지. 볼드모트가 해리포터에 의해 파멸되었듯이. 그런 생각을 하자 리브는 기분이 몹시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갑자기 울적해졌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이처럼 리브의 말은 언뜻보면 화려하기 짝이 없는 미사여구였으나 뼈가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들은 기숙사로 휭 들어가는 리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전 소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자신의 외모에 대한 화려한 미사여구에 흑발 청년은 순간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들은 아까부터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정말 네 앞에만 서면 나는 이상해져. 자신이 말도 안된다고 비웃었던 아브락사스의 말이 또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

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않고 기숙사로 도망치듯 들어온 리브였다. 후배들이 자신의 대답에 대해 엄청난 표현력이라며 혀를 내두르며 이제는 분석까지 하는데 리브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밤하늘은 청흑색이잖아. 그러니까 흑단 같다고 표현하신거야.”

“새하얀 백옥은 피부, 흑요석은 눈, 루비는 입술인가?”

“근데 왜 잔혹해?”

그야 저 입이 예쁜 소리를 하는건 거의 들어본 적이 없거든. 리브는 그 말을 삼키며 침실로 몸을 돌렸다.

“세기의 역작이라, 톰 리들의 외모를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어둠에 물들다니?”

“슬리데린이잖아. 그래서 그런거 아니야?”

리브는 그들에게서 자신에게 해석을 직접 해달라고 할 기세가 엿보이자 침실로 재빠르게 올라가버렸다.

[예술가가 푸른 빛 한 조각 없는 흑단 같은 밤하늘을 깔아놓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귀하디 귀한 보석을 박아 놓았는데 밤하늘과 대조되는 새하얀 백옥,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흑요석, 고혹적이나 잔혹할지 모를 핏빛 루비가 별처럼 수놓아져 있어.]

자신이 늘어놓은 리들의 외모에 대한 찬양이 떠오르자 리브는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여학생들이 단순하게 잘생겼다고 찬양하는 것은 이 미사여구에 비하면 발끝에도 닿지 못하리라. 독수리를 통과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어 보지만 종종 그의 얼굴을 뜯어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리브는 표현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했다. 교수들이 소녀의 작문에 혀를 내두르는 것은 훌륭한 내용도 있지만 섬세한 표현력 때문이었다. 물론 리들은 쓸데없이 글을 길게 늘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며 소녀를 영악하다고 표현했지만 말이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표현력을 내세울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독수리가 창의력이나 표현력을 요하는 퀴즈를 낼 때 그녀의 능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리고 리브는 입 밖으로 표현력을 분출하기 보다는 속으로 멍하니 생각하곤 했다. 리들은 그런 소녀를 보며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고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청년은 몰랐다. 소녀가 속으로 그에 대해서도 섬세한 표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막 열 다섯이지만 1,2년 정도 지나면 정말로 장인이 혼신을 기울여 조각한 예술품 같을거야. 저 머리카락은 비단결같이 부드러워 보이고, 저 하얀 피부는 웬만한 여자보다 더 좋아보이네. 그리고 특히 저 눈은 가끔 붉은 빛을 번뜩이긴 하지만 흑진주, 아니 그보다 더 진하니까 흑요석 같고… 그리고 저 입술은 뭘 바르고 다니나 왜 저렇게 붉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리브는 자신에게 흠칫흠칫 놀라며 혼자 얼굴을 붉히곤 했다. 마치 자신도 그의 번지르르한 얼굴에 꺅꺅거리는 철부지 계집애들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리브는 자신의 표현력에 대한 우쭐함 보다 나가서 리들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하나 민망할 뿐이었다.

*

기숙사를 나온 리브는 리들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리들은 먼저 휘적휘적 걸어가버렸고 리브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필요의 방에 들어서 문을 닫은 리브는 몸을 돌렸다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리들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리브는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지만 문에 가로막혀 더 이상 리들과 거리를 넓힐 수가 없었다. 리들이 한 걸음 다가왔고 리브는 문을 등져 기대고 있는 상태여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리브는 마른 침을 삼키고 침착하게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내 그 위에 내려앉은 커다란 손. 청년의 손은 소녀의 손을 단단하게 쥔 채로 문고리를 쓰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리브는 벽안을 깜박였다.

“그런 찬사를 그냥 듣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답사를 해야겠지.”

소녀가 흑요석이라 칭했던 그 흑안이 반짝 빛났다. 저 눈동자 속에 빠져들 것만 같아. 리브의 벽안이 살짝 흔들렸다. 이제 청년은 자유로운 손으로 소녀의 금빛 머리칼을 한 번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라 칭했던 그 붉은 입술이 미성을 만들어낸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그 손은 이어서 소녀의 발그레한 뺨을 어루만졌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힌 연분홍빛 복숭아.”

그리고 이어서 소녀의 두 눈을 덮어 잠깐 가렸다가 뗀다.

“영롱한 사파이어. 그리고… 그 작은 입술은-”

청년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는 소녀의 입술을 훑었다. 순간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에 소녀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리들은 잘생긴 얼굴 가득 아찔한 미소를 지은 채로 속삭였다.

“네가 들어가고 내내 생각했는데도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누구의 것일지 모를 심장 고동소리,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 그리고 묘한 분위기. 리들이 그 분위기에 홀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려는 그 순간, 리브의 손에 들린 책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소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리들은 간신히 충동을 되삼켰다. 위험했다. 멍하니 있던 리브 역시 본능적으로 리들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고 잡힌 손을 뿌리쳤다. 소녀의 벽안과 청년의 흑안이 어긋났다.

“자,잠깐 병동에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리브는 도망치듯 필요의 방을 나갔다. 평소라면 어디가 아프길래 땡땡이냐고 밉살맞게 입을 놀려야 할 리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소녀를 보내주었다. 리들은 쇼파에 털썩 앉아 몸을 뒤로 기댔다.

“내가 무슨 짓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뻔했다. 그 미사여구에 홀려서 소녀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리들이 눈꺼풀을 움직여 흑안을 감췄다.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자제력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도 아쉬운 리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까지 몰려왔다.

다른 여학생들에게 입을 맞춘다고 해서 그 날의 쾌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서 키스의 쾌감을 찾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음에도 자신은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쾌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아브락사스의 말대로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을 했다. 그리고 브릴리언트의 말대로 나는 감정에 무지할지도 모른다. 아니 무지하다. 그래서 아브락사스의 말대로 심각한 시행착오를 겪은 걸지도. 아니, 나는 그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음에도 고집을 부렸다.

[리들, 왜 너 답지 않아. 네가 원하는건 그 아가씨잖아. 다른 여자들은 만날 필요가 없었어.]

[원래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거야. 연인들 간의 사랑표현이지.]

[그 순간만큼은 눈앞의 상대가 좋아서 하는거야.]

그녀와 나는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다. 그래서 방금 그럴 뻔했다. 그렇지만 결국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니, 그녀의 책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실행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리들은 리브가 잠든 사이에 몰래 입을 맞출 수는 있었지만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고 그 때마다 이성은 고개를 들어 본능을 사정없이 밟아버렸다. 그리고 강한 예감에 대한 판단은 항상 옳았다.

다른 계집애들은 수틀리면 관계를 끊으면 그만이었고, 실제로도 떨어져 나가기를 원했기에 조금의 갈등도, 가책도 없었다. 브릴리언트가 보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 계집애들과는 달랐기에 나는 이토록 충동을,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나는 일을 저지르고 난 후가 두려웠다. 분명 싫어하겠지. 울고 화를 내겠지. 아니면 화를 내다가 울던가. 그녀가 우는 모습은 거슬리고, 보기 싫었다. 다른 계집애들처럼 무시하고 자리를 피하면 되는데 그건 그것대로 너무 힘들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울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도 싫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항상 따스하면서 왜 나에게는 그토록…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힘들었다. 특히 리들은 올해 1월에 있었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리브를 망칠까봐, 리들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

리들은 작은 양피지에 기숙사로 돌아가겠노라는 글귀를 적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멘토링을 못할 것 같았다. 머리를 식혀야 할 것만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필요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리들의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만 가득했다. 그리고 리들은 그 장본인과 맞닥뜨렸다. 하, 리들은 헛웃음을 뱉었다. 정말 너라는 여자는 내 마음대로 되는 듯하면서, 전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브릴리언트, 오늘은 멘토링을 못할 거 같아. 병동에 다녀온걸 보면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기숙사로 돌아가서 푹 쉬어.”

그렇게 말한 리들은 리브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로 휙 돌아섰다. 나는 네 앞에만 서면 이상해져. 그렇게 생각하며 리들은 슬리데린 기숙사가 있을 지하로 향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상념, 그 와중에 떠오르는 아브락사스의 말.

[리들, 넌 그녀를 좋아하는거야.]

[자꾸 생각나고, 눈에 밟히고, 신경 쓰이고, 챙겨주고 싶고, 만지고 싶고, 질투 나고… 네가 말한 것처럼 키스하고 싶고- 사랑에 빠졌네요. 미스터 리들(Mr. Riddle)]

[내가 이렇게 말해도 소용 없는거 알아. 네가 깨달아야 하거든.]

내가 깨달아야 한다고… 사실 자각은 이미 오래 전에 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 역시 그렇고.

<자각> 마침.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 뭘 인정안해ㅋ리들 넌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어..... 아무리 감정에 무지한 리들이라지만 이 정도까지 되면 지도 알겠죠ㅋㅋㅋ병신도 아니고ㅋㅋㅋㅋㅋ걍 고집 부리는거임여ㅋㅋㅋㅋㅋㅋ

* 리들과 리브의 서로의 외모에 대한 미사여구를 쓰면서 제 손발은 또 오그리토그리...... 독자님들 손발은 무사하신지 모르겠음돠....

* 둘 다 순간 홀려서 키스할 뻔했지만(정확히는 리들이!) 책이 떨어지면서 분위기를 깼죠ㅋㅋㅋㅋㅋㅋㅋ이건 솔로인 작가의 농간이 맞습니다^0^ 그리고 리들에게 리브의 입술을 쉽게 줄수는 없ㅋ엉ㅋ 리들 좀 더 애타봐라 호롤롤로

* 이걸로 자각 챕터는 끝입니다! 이제 또 다음챕터가 문제..하아..

리리플을 원하시는 분은 앞에 @를 붙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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