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멘토링-29화 (2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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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갈등

멘토링 초기 때만해도 리브는 확실히 리들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리들이 리브를 되게 잡은 그 날 이후로 달라졌다. 모든 이에게 항상 진심인 소녀는 그 대상에 리들도 끼워넣었다. 그리고 리들에게 역시 따스함을 흩뿌렸다. 리들은 소녀의 따스함이 싫지 않았다.

요즘 리브는 확실히 위태롭고 아슬아슬해서 주변 사람들을 조마하게 만들었다. 리들은 리브가 부모님의 일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으며 몸을 혹사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이리라. 금방이라도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조언을 하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나 역시 너와 비슷한 부모를 두었으나 얽매이지 않는다. 너도 그러지 마라.

리들은 리브와 닮은꼴이라 할지라도 내면은 철저히 상극이었다. 누군가에게 따스하게 말을 뱉는다거나 이런 류에 절대로 익숙하지 못했다. 톰 리들이라는 자는 위로에 서투른 종족이었다. 그래서 리들의 의도는 전달되지 못했다. 평소의 리브라면 그런 리들의 의도를 파악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그런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리들이 레질리먼시를 사용해 자신의 머릿속을 내다보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 순간 리브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끊어졌다. 그리고 모든 분노를 전부 쏟아냈다. 그리고 리들은 처음 맞닥뜨리는 소녀의 모습에 당황해서 마찬가지로 페이스를 잃었다.

소녀에게 평소의 유순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돌변했다. 마치 접때 파킨슨을 밟아놓았을 때처럼, 항상 따스함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트레이드 마크같은 따스함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녀는 답지 않게 자신에게 큰소리로 악을 썼다. 브릴리언트는 조곤조곤 말하는 어투를 구사했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까는…

[어떻게 같아! 내 어머니는 날 버리고 죽음을 택했어. 그것도 내 눈 앞에서! 하지만 당신 어머니는 자살한게 아니잖아! 당신을 버리지 않았잖아!! 허약한 몸으로 끝까지 당신을 낳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같아!!]

그래서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라고 했었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하! 겉으로는 날 위로하면서 속으로는 내 머릿속을 파헤칠 생각으로- 전부 거짓이었어.]

[레질리먼시로 항상 내 머릿속을 읽고 있었군요? 어쩐지 나에 대해 너무 잘 파악한다고 했어!]

거짓이 아니야. 리들은 소녀에게만큼은 본모습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다. 다른 이에게도 진심으로 대하라는 리브의 말에 리들은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브에게만큼은 진심으로 대하려고 했다. 왠지 소녀에게만큼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대하듯 소녀에게도 가면을 쓰고, 가식적으로 대하면 그건 소녀를 기만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너는 왜 거짓이라고 치부해. 내가 너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널 항상 보고 있기 때문이야. 레질리먼시 따위 쓰지 않아도 너는 보인다고.

[거짓말 말아요. 오해라고요? 전 선배님을 알아요. 모든 사람을 손 안에 쥐고 흔들죠.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에요!]

[…리들 선배님은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죠?]

정말 너는 기분 나쁠 정도로 나에 대해 잘 알아.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어쩜 그렇게 사람을 배려할 줄 몰라요?]

[자기 호기심만 채우면 끝이에요? 내가 분명 아무 것도 묻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내 약점을 알고 나를 쥐흔들고 싶었어요? 날 그렇게 맘대로 하고 싶었어요? 정말이지 사람이 어쩜 그렇게 못되쳐먹을수가!]

왜 내 의도를 몰라. 난 그저…… 너를 이해하고 싶었어. 리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한다거나 그런 류에 절대로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었던 것같았다.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자신이 생각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못되쳐먹은 사람이 맞았다. 착하디 착한 너와는 극명하게 다르지. 하지만 그 말을 직접 들으니, 그 것도 브릴리언트에게서 들으니… 싫다. 싫고 또 싫다.

[당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말에 왜 나는 떨린걸까.

[멘토링은 그만 두겠어요. 앞으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당신을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그리고 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녀와의 관계를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누구 맘대로 멘토링을 그만둬. 앞으로 마주치지 않겠다고? 내가 그렇게 둘거 같아? 정말이지 너 사람 잘못 봤어. 누구 맘대로- 네 말대로 나는 내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리들은 그대로 필요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기숙사 공동 휴게실로 가서 래번클로 학생을 하나 붙잡았다. 기숙사 안에 있을 리브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소녀의 부재였다. 리들은 도서관에도 가보고 연회장에도 가보았지만 어디에도 리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를 간거야! 무심코 바깥을 보니 무시무시하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성 밖을 나갈리는 없을터. 대체 어디 있는거야.

*

“이렇게 추운 날씨에 무슨 퀴디치 연습이야!”

“비까지 오는데 기어이 연습을 강행하시네요. 우리의 주장님께서는!”

“래번클로는 아까 들어갔다고!”

팀원들이 투덜거리든 말든 슬리데린 퀴디치팀의 주장은 계속해서 연습을 강행했다. 초록색 망토 일곱 개가 경기장 위에 둥둥 떠있었다. 휙휙 새까만 블러저와 새빨간 퀘이플이 빠르게 오갔다. 수색꾼인 오리온 블랙은 스니치를 찾고 있었다. 비가 와서 잘 안보이잖아. 오리온은 지팡이를 꺼내 어딘가에 있을 스니치를 소환할까—연습용 스니치는 경기용 스니치와 달리 소환이 가능하다. 분실 방지용—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도 못 볼거 같은데. 그 때 아브락사스가 오리온을 툭치고 지나갔다. “너 그거 휘두르기만 해봐! 주장한테 이를거야!” 아 저 망할… 오리온은 욕을 뱉으며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기어이 연습시간을 다 채운 주장은 곧 있을 퀴디치 시합 때 비가 올지도 모르니 좋은 경험이라고 팀원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모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추위에 덜덜 떨며 라커룸으로 향할 뿐이었다. 어서 옷부터 말리자. 아, 찝찝해. 이게 뭐야. 오리온 역시 휴게실에 있는 벽난로를 그리워하며 빠르게 걸었다. 그 때 저 멀리 작은 인영이 보였다. 이런 험악한 날씨에 누가 저러고 있는거지? 알게 뭐야. 그렇게 돌아서던 오리온은 이상한 느낌에 다시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오리온의 눈길이 향한 곳을 보던 팀원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기 누가 쓰러져있어!”

누군가의 외침에 팀원 몇 명이 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오리온과 아브락사스도 있었다. 이 색감의 블론드는… 맙소사, 누군지를 알아본 오리온의 은회안에 경악이 서렸다.

“리브!”

소녀는 파리한 얼굴로 바닥에 꼼짝않고 쓰러져있었다. 오리온이 거의 뛰다시피 다가가서 리브를 흔들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몸이 몹시 차가웠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지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오리온은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소녀를 안아들었다.

*

병동으로 급히 옮겨진 리브는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죽은 것만 같아서 오리온은 덜컥 겁을 먹었다. 요즘 리브는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그 때, 리코리스 고모님을 만난 이후로 쭉 이 상태였다. 나 때문이야. 만나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 때문에 리브가… 오리온이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젤러 부인이 치료를 해야한다며 학생들을 전부 쫓아냈다.

리브는 안그래도 체력이 떨어져 있어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요즘 소녀는 병동을 종종 찾아와 빈혈약을 받아갔다. 치료사는 골고루 먹고 잠도 충분히 자야한다고 했지만 소녀는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근심이 있는 듯 몹시 어두워보였다. 그러던 애가 이제는 비를 쫄딱 맞고 실신한 상태로 실려오니 젤러 부인은 식겁했다. 학생들을 쫓아내고 리브의 상태를 진단하던 젤러 부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치료 마법을 걸고 마법약을 간신히 떠넘기고 치료사가 바쁘게 움직였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리브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앓았다. 오랫동안 비를 맞아 단순하게 열감기에 걸린 것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열이 엄청나게 치솟았다. 젤러 부인은 소녀의 열을 내리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나아지지를 않았다. 리브가 깨어나지 못하고 원인 모를 열병을 앓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밀리는 오리온에게 원망을 가득 쏟아냈다. “너 때문이야! 너희 집에 갔다오고 나서부터 리브가-” 그러다가 분에 못이겨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아브락사스가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오리온은 오리온대로 그런 리브를 보며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때, 고모님과 리브의 만남을 주선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때 너는 무얼 들었길래 이렇게 무너지고 만거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리브, 제발 일어나…”

오리온은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

리들은 그날 성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리브를 찾지 못했다.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아브락사스가 말했다. 정원에서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동으로 옮겼다고. 비가 쏟아지길래 성 밖으로 나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리들이었다. 병동으로 간 리들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소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온 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헛소리를 뱉곤 했는데 리들은 또다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아야만 했다.

“엄…마……죽지…마…”

“…!!”

“나…버리…지…마…”

속 안에서 무언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리들은 더 지켜볼 수가 없어 병동을 나와버렸다. 하지만 그 후로 매일 매일 병동을 찾아갔다. 하지만 병동 앞에 서성거릴 뿐, 차마 들어가지를 못했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고 나서야 리들은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다음 날에는 병동 안에 들어서지를 못했다.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리들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무시무시하게 앓는 소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리들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리들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 날, 나는 바로 붙잡았어야 했다. 곧바로 뛰어가서 붙잡고, 오해를 풀었어야 했다. 이렇게 무너지도록 두어서는 안됐다. 제대로 된 위로를 해줬어야 했다. 왜 나는 그러지 못했던가.

“일어나… 눈을 떠. 너 이렇게 약한 여자 아니잖아. 강하잖아. 브릴리언트 넌-”

리들은 말을 뚝 멈췄다. 이게 무슨 소용이야. 들리지도 않잖아. 아픈 애한테 이렇게 말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야. 정신도 못 차리는 애가 내 말을 어찌 듣는다고- 밀려오는 무력감에 리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고 또 싫었다.

*

열흘 정도 자나자 리브의 열은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젤러 부인은 드디어 해열제가 듣기 시작했다며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점점 열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리브는 의식을 회복했다. 멍하니 현실 감각이 없어 눈을 꿈뻑꿈뻑 떴다 감았다하는 소녀에게 젤러 부인이 마법약을 입으로 흘러 넣어주었다. 소녀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치료사가 제지했다.

“거의 2주 가량을 누워 있었단다. 몸에 힘도 없을거야. 그냥 누워 있거라.”

“……”

“열이 많이 내렸어. 아직 미열이 있지만 식사도 잘하고 약도 꾸준히 먹으면 완쾌될거니 걱정말거라.”

“……”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은 없니?”

리브는 젤러 부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젤러 부인은 성뭉고 병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열병의 후유증을 자주 봐왔다. 그래서 혹시 성치 않은 데가 있지 않나 리브를 꼼꼼히 진찰했다. 의사를 표하는 것을 보니 정신적으로 멀쩡하고 시각이나 청각도 문제가 없어보였다. 약 냄새를 킁킁 맡고 마신 뒤에 쓴 듯 찡그리는 것을 보니 후각과 미각도 멀쩡한 모양이고…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젤러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학생들이 다녀갔단다. 교수님들도 걱정을 많이 하시더구나. 네가 쾌차하길 바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선물을 보내왔단다.”

그렇게 말하며 젤러 부인은 한 쪽에 수북하게 쌓인 선물들을 가리켰다. 리브가 눈을 돌려보니 온갖 것들이 있었다. 빨리 완쾌하길 바란다는 문구가 적힌 카드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 초콜릿을 비롯한 단 먹거리들, 꽃이 핀 화분… 몸에 힘이 없었다. 리브는 젤러 부인이 입에 흘러 넣어주는 약을 먹고는 또다시 잠에 빠졌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때는 몸을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는지 리브는 자신에게 온 선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 소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동그란 보석함 모양의 오르골. 장인이 만든 것 마냥 섬세하고 화려했다. 리브가 오르골을 열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리브에게는 낯익은 클래식 음악이었다.

현대 영국 음악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사랑의 인사(Sault d'amour), 처음에 리브는 그 유명한 작곡가 엘가가 마법사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야만 했다. 그는 생전에 음악에 대한 공적으로 영국 머글 국왕에게 경(sir)이라는 직위를 하사받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이런 에드워드 엘가의 명성은 마법 세계에서도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 머글들의 것인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몸담은 마법사라… 리브는 이를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엘가 뿐만이 아니라 머글 세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예술가들 중에 마법사가 꽤 많았는데 리브는 이를 몹시 흥미로워했다. 리브는 멍하니 오르골의 음악을 감상하다가 자그마한 쪽지를 발견했다.

[리브, 네가 얼른 깨어나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O.A.B]

그리고 끝에 붙여진 추신에 리브가 벽안을 깜박였다. [P.S. 정말 미안해.] 리브는 쪽지를 곱게 접어 다시 오르골 안에 넣었다. 하지만 오르골을 닫지는 않았다. 멜로디를 계속 듣고 싶었다. 역시 마법 물품이기 때문인지 태엽을 따로 감을 필요 없었고 계속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좋다. 그리고 리브는 눈을 감았다.

*

오늘도 리들은 병동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병동 앞에서 멈칫,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병동 문을 쳐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무는데 리들의 귀에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들 선배!”

오리온은 쪼르르 달려와 리들에게 리브의 병문안을 왔냐며 재잘재잘 물었다. 리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병동 문을 열었다. 아까는 차마 열지 못했던 병동 문이 쉽게 열렸다. 젤러 부인은 기분이 상당히 좋아보였는데 두 남학생에게 리브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리들은 이제는 익숙한 침대로 빠르게 걸어가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소녀는 몸을 일으킨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보석함에서 오르골 특유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커튼 젖히는 소리가 부드럽고 편안한 선율을 방해하자 소녀의 고운 얼굴에서 사파이어 벽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리브!”

청흑발에 은회안을 가진 남학생이 그렇게 외치며 침대로 거리를 좁혔다. 그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얼굴로 멀린을 찾다가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친구를 리브는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다들 네 걱정을 많이했어. 리들 선배도 자주 병문안을 오셨고…”

지금까지 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않던 소녀가 그제서야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순간이었을 뿐 다시 오리온에게로 눈을 돌린다. 리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들 네 걱정을 많이 했어. 에밀리도 그렇고…”

오리온의 말을 들으며 리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따스한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얼굴로 그저 오리온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리들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상당히. 항상 또렷하고 분명했던 소녀가 희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리온도 소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확한 증상을 유추해낸 것은 리들이었다. 흑안의 청년은 리브에게 약이 담긴 잔을 주는 치료사에게 말했다.

“브릴리언트가 왜 말을 하지 않는거죠?”

약을 마시고 있는 리브를 보던 젤러 부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소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제 오리온의 얼굴은 파삭파삭 굳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리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릴리언트, 혹시 목소리가 안나오는거니?”

“……”

“무어라 말 좀 해보렴.”

“……”

리브는 젤러 부인의 물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갯짓도 하지 않았고 그저 생기 없는 눈으로 치료사를 응시할 뿐이었다. 젤러 부인은 혹시 열병의 후유증으로 목에 이상이 온 건가 확인하기 위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런 소녀를 날카롭게 응시하던 리들이 소녀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그 순간 소녀가 악소리를 내며 고통을 호소했다.

“성대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정신에 문제가 생긴건가요?”

리들의 말에 소녀가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매만지며 청년을 노려보았다. 물론 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뭘 봐?’라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순간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소녀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누워버렸다. 그리고 커텐을 치려는 듯 손을 뻗는다. 리들이 그 시도를 막으려고 했으나 소녀는 찰싹 청년의 손등을 때려 치워버리더니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야!”

리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이 커튼을 완전히 치고 타인을 완벽히 차단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젤러 부인은 정신에는 이상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정신 이상자 취급에 불쾌함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브릴리언트, 잠깐 커튼 좀 열어주겠니?”

이불을 뒤집어 쓴 리브는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치료사의 말에 얌전히 커튼을 열었다. 그 모습에 리들은 분한듯 이를 부득 갈았다. 저 계집애가 진짜… 오리온이 곤란한 듯 작게 웃으며 환자니까 참으라고 리들을 달랬다.

“브릴리언트, 괜찮니?”

리브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어디가 안좋냐는 치료사의 말에 손가락으로 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내보내라는 손짓. 그 모습에 리들은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이불을 뒤집어써버린 리브였다. 결국 젤러 부인은 리브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리들을 병동 밖으로 내보냈다. 덤으로 오리온까지. 한 순간에 병동에서 쫓겨난 리들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저 영악한 계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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