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第 39 話 =========================================================================
第 39 話 “55일째”
“이야~ 오자마자 출발하네.”
“그보다 지금 화련 님이 입고 있는 장비가 데로나크 장비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 부길마님이 진짜 빌려준 모양이네.”
“와, 부럽다. 불꽃까지 이글거려.”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한 난 근처에서 떠드는 길드원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화련이 입고 있는 데로나크 장비에 대해 말하는 거 같은데,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이야기는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루딘이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반대로 엠페러 길드가 아닌 다른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날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투구를 쓰고 있다는 점일까? 투구 때문에 내 표정이 들킬 일이 없으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속으로는 있는 한숨, 없는 한숨 다 끌어내 쉬고 있지만 말이다.
“역시 루딘 님이시네요. 인기가 많으세요.”
“화련 님도 인기가 많으시잖아요.”
“그거야 루딘 님이 빌려준 장비 탓이죠.”
“…….”
“아, 지금 입고 있는 장비가 레이드 장비인가요?”
‘근데 이 여자들은 왜 내 옆에 붙어 있는 거야?’
난 양옆에 위치한 화련과 천공의 날개의 길드 마스터 '에린'을 보며 생각했지만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거 같지가 않았다. 결국 날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을 내버려둔 채 어서 빨리 악마왕이 나타나길 바랐지만 그보다 에린의 질문이 먼저 들려왔다.
“루딘 님. 혹시 용병 일도 하시나요?”
“안 해요.”
뭘 시키려고? 용병 일이란 대가를 받고 그에 해당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오트 왕국의 크라켄이나, 카르젠 왕국의 붉은 태양 길드를 도와준 것도 용병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그때 포섭했어야 했는데…….”
‘응?’
“악마왕이다!”
동시에 악마왕이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에 이끌리듯이 고개를 돌리자 며칠 간 질리게 봤던 악마왕을 발견할 수 있었고, 덤으로 수백 마리의 악마들까지 볼 수 있었다.
“저건 뭐야? 중급 악마?”
“원래 이 정도로 많았나?”
길드성에 있었던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백…… 못해도 500마리나 되는 악마를 본 나는 질린 눈빛을 지었다. 이대로 붙으면 악마왕이 아니라 소환된 악마들에게 전멸할 거 같았다.
“어이, 엠페러 길드장!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싸울 수 없지 않습니까!”
주변 길드 마스터들의 외침. 아이젠도 이대로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물러나는 쪽으로 가는 듯했다.
‘문제는 물러난다고 해도 달라질 점이 없다는 건데.’
물론 마을에서 싸운다면 악마를 대신 상대할 플레이어야 많겠지만 거기서 죽은 플레이어의 시체로 다시 악마를 소환한다면 결국 원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잠시 이런저런 고민을 한 나는 직접 악마들을 처리할 생각으로 앞으로 나왔다. 내가 앞으로 나오자 몇몇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그건 아이젠도 예외는 아니었다.
“좋은 의견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처리할게. 기회다 싶으면 움직여줘.”
“……예, 알겠습니다.”
나를 믿는 건지 모르겠으나 아이젠은 알겠다는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을 들은 난 곧장 땅을 박차 앞으로 달렸다.
탓!-
“어? 엇?! 부길마님!”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탓인지 언뜻 날 부르는 길드원의 소리마저 들렸다. 하지만 그런 소리보다 내게 고개를 돌리는 수백 마리의 악마가 훨씬 신경 쓰였다. 또한 일정 거리에 가까워지자마자 몇 마리의 악마가 날 죽이기 위해 마주 달려왔으나 난 맞서 싸우는 대신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칭호 교체. 영혼의 계약. 소환.”
[휘몰아치는 설풍의 지배자 아르넬라를 소환…….]
휘이이이잉!-
눈보라와 함께 소환되는 아르넬라. 그렇게 소환을 끝마친 나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바꾸고는 아르넬라에게 말했다.
“빙산 낙하!”
광범위의 위력을 자랑하는 빙산 낙하라면 이곳에 있는 악마들도 충분히 쓸어버릴 거라 믿었다. 실제로 처음 악마왕과 붙었을 때도 빙산 낙하를 사용해 대부분의 악마를 쓸어버렸으니까.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내 외침에 아르넬라는 짧게 대답하고는 거대한 빙산을 만들어내 지상으로 떨어뜨렸고, 이내 바닥에 닿은 빙산은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푸른색 충격파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콰아아아아앙!!-
[전투 경험치 5,000…….]
[전투 경험치…….]
[중급 악마를 쓰러뜨린 업적으로 총 200의 공적치를…….]
빙산 낙하를 사용한 대가로 몇십 개의 메시지 창이 올라왔지만 아직 거기에 대해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롭지는 못했다. 예상외로 많은 악마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공간 변화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가?
공간 변화가 없더라도 지금 아르넬라의 능력치를 생각하면 중급 악마까지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지니고 있는 생명력이 다른지 살아있는 중급 악마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 더 사용하게 해?’
남아 있는 중급 악마는 100마리. 그렇다고 해도 빙산 낙하를 맞았으니 남은 생명력이 없을 것이다. 이대로 돌진해도 별다른 피해 없이 잡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뒤쪽 플레이어를 본 나는 이대로 끝내기로 했다.
“……다시 빙산 낙하.”
“알겠다.”
‘그래, 애초에 내가 처리한다고 했으니.’
콰아아아아앙!!-
이윽고 아르넬라가 다시 빙산을 떨어뜨리자 결빙 상태에 걸린 중급 악마들은 미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남김없이 사라졌다. 세 번 중, 두 번의 빙산 낙하를 사용한 게 아쉽지만 어쨌든 모든 악마들을 없애버린 것이다.
와아아아아!!-
“이때다! 공격!”
“기여도를 올려야 돼!”
악마들이 사라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플레이어의 모습이 마냥 속보였지만 그와 별개로 기세만큼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거 같았다.
“아르넬라, 악마왕을 공격해. 촉수 공격에 조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콰득- 콰득-
‘칫.’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서는 다섯 개의 촉수가 하늘 높이 튀어나오더니 나와 아르넬라를 향해 급속도로 내리꽂혔다.
‘빠르긴 빠른데.’
4원소 목걸이로 민첩이 상당량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느껴지는 촉수였다. 다만 이전보다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지금까지 지겹게 본 공격이기도 하니 말이다.
파치칙!-
[적중 데미지! 6,192.]
내리꽂히는 타이밍에 맞춰 뇌룡의 포효를 휘둘러 옆으로 쳐낸다. 그와 함께 상당한 데미지가 뜨며 촉수는 바닥에 축 늘어졌지만 이제 곧 하나의 촉수를 해치웠을 뿐이다.
쾅!- 쾅!-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2,553.]
“큭.”
그러나 하나의 촉수를 옆으로 쳐내는 것과 동시에 다른 촉수가 내 품을 파고들어 가슴 부분의 갑옷을 찔렀고, 그에 해당하는 데미지를 입은 난 재차 뇌룡의 포효를 휘두르며 남은 촉수의 수를 줄여나갔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마탄 폭격기가 더 편하겠군.’
“물품 보관창.”
마탄 폭격기라면 간단하게 거리를 벌린 뒤, 촉수가 튀어나온 바닥을 향해 쏘기만 하면 쓰러뜨릴 수 있다. 데미지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순식간에 없애버릴 정도.
5초의 장전 시간만 제외한다면 이런 촉수를 상대로는 압도적이었다.
쾅쾅쾅쾅쾅!-
[적중 데미지! 1,125.]
[적중 데미지…….]
뇌룡의 포효와 피를 머금은 철벽 방패를 집어넣은 난 마탄 폭격기를 꺼내자마자 남은 촉수를 쓸어버렸다. 정확히 세 개의 촉수를 없애고 마탄 폭격기의 모든 마나가 떨어졌지만 일단 나를 공격하려는 모든 촉수는 없애버린 듯했다.
[마탄 폭격기의 저장된 모든 마나가 떨어졌습니다.]
[앞으로 5초 후 자동으로 채워집니다.]
‘진짜 장전 시간 좀 줄일 방법 없나?’
“촉수는 무시해! 악마왕만 공격해라!”
“……?”
내 근처에 튀어나온 촉수를 없애버린 사이, 뒤에서는 20~30명의 플레이어가 나를 앞질러 악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보나마나 악마왕을 공격해 기여도를 쌓으려는 생각이겠지만 나는 달려가는 그들과 반대로 뒤로 물러났다.
[악마왕 아그라네스가 절망을 이끄는 노래를 사용합니다.]
아~ 아~
가늘고 고운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노랫소리만큼은 섬뜩하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게다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초당 100의 생명력이 줄어듭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됩니다.]
‘아직 범위 안이었군.’
그래도 조금 더 뒤로 물러나자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감소된 능력치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생명력이야 몇 초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거의 피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악마왕을 향해 달려나간 플레이어들은 달랐다.
“노래에 신경 쓰지 마라! 다들 준비한 걸 꺼내!”
‘저건…… 설마 물약?’
악마왕에게 달려간 플레이어들은 놀랍게도 물약을 꺼내 마시면서 악마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뭔가 굉장한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정말인지 무식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우와~ 저 사람들 물약으로 때우며 싸우는 거지?”
“돈이 엄청 들 텐데.”
“돈보다 악마왕에게서 나오는 아이템을 가지고 싶은 거겠지.”
노래로 인해 전투가 어쩔 수 없이 중지되자 다들 구경 온 사람처럼 악마왕과 싸우는 플레이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기여도는 부길마님이 차지하실 텐데.”
“대체 아르넬라는 어떻게 소환하신 거야?”
하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악마왕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마법을 날리고 있는 아르넬라에게 돌아갔다. 공략이 불가능한 보스로 알려진 아르넬라. 어쨌든 나와 같은 엠페러 길드원이야 단순히 호기심으로 아르넬라에 대해 말하는 거 같았지만 다른 길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아르넬라가 소환수였나?”
“소환수? 소환수가 아까 엄청나게 큰 얼음 덩어리를 떨어뜨리면서 악마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버그 아니야?”
“바보야. 제작사 측에서 버그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저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막말로 저 레이드 보스를 앞세우면 못 잡는 보스가 없겠다!”
“황혼은 그렇게 안 봤는데 밸런스가 개판이네.”
둘러보니 대부분 미심쩍은 태도로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어차피 황혼 내에 있는 스킬을 가지고 아르넬라를 봉인한 거니 찔리는 것도 없어야 정상이지만 수백 명의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자 뭐라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아르넬라를 소환했나.’
아니, 소환은 둘째 치고 나 때문에 악마들과의 전투를 넘길 수 있었는데 저딴 표정이나 짓다니? 마음 같아선 동맹이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기사에 보면 S랭크 스킬로 레이드를 뛰었다고 했으니 저 소환도 S랭크 스킬이겠지.”
“그놈의 S랭크 스킬.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루딘이 유명해진 이유가 저 레이드 보스 때문이라니.”
“…….”
그러던 중에 그 말을 참지 못한 몇 명의 엠페러 길드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간부의 위치에 있는 플레이어가 붙잡아 만류했다.
“길마님께서 소란피우지 말라고 하셨다.”
“계속 듣고 있으라고요?”
“정작 부길마님도 가만히 계신데 네가 왜 나서?”
본의 아니게 착각한 거 같지만 괜히 나서서 해명하기도 싫었다. 아마 아이젠이 소란피우지 말라고 한 것은 여기서 분쟁을 일으켜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탓일지도 몰랐다.
“됐다! 이제 노래가 끊겼다!”
‘그것보다 저 녀석들 대단한데.’
악마왕의 노래 공격을 물약으로 버텨냈다. 18,000에 해당하는 데미지를 물약으로 대신하다니? 아이템 창이 무한이 아닌 이상, 다시 노래를 부르면 후퇴해야겠지만 이 3분간 녀석들이 때린 데미지는 상당할 듯했다.
“가자, 공격!”
“당분간 노래를 못 부를 테니 최대한 공격해야 된다!”
나를 헐뜯은 놈들도 노래가 끝나자마자 악마왕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싸울 마음이 사라진 나는 대충 걸음을 옮겨 마탄 폭격기만 쏘기로 했다. 마탄 폭격기와 아르넬라의 마법이 합치면 설사 악마왕을 잡더라도 기여도 1등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