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8 第 36 話 =========================================================================
第 36 話 “50일째”
“빙산 낙하.”
아르넬라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끌리듯 하늘 위로 나타나는 거대한 빙산. 그 빙산은 서서히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악마들은 떨어지는 빙산을 발견하자마자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내가 보기에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곧이어 지상에 떨어진 빙산은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폭발음과 함께 푸른색의 충격파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리고 그 충격파는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악마들을 얼리는 것과 동시에 목숨까지도 앗아갔다.
[전투 경험치…….]
[띠링!~ '중급 악마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중급 악마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진작 사용했다면 퀘스트 실패도 없었을 터. 아니, 빙산 낙하로 NPC가 죽는다면 퀘스트 또한 실패하기 때문에 뭘 하더라도 결과는 같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NPC…… 볼레스는 어떻게 됐지?’
무사한가? 그 생각으로 돌아보니 의외로 멀쩡하게 서 있는 볼레스를 볼 수 있었다. NPC도 파티원과 마찬가지로 공격이 무효화 되는 모양이었다.
“씨발.”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 후회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아직 죽지 않은 최상급 악마 가리카스와 상급 악마 로스모 볼 수 있었는데, 아르넬라는 그런 악마 둘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콰쾅!- 콰아앙!!-
‘뭐, 저대로 놔둬도 이기겠군.’
지금까지는 네이라를 지키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원래 방식대로 싸운다면 최상급 악마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레벨과 능력치를 상승시킨 레이드 보스를 고작 일반 보스에 불과한 최상급 악마가 어떻게 잡겠는가? 난 결빙 상태까지 걸린 악마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네이라를 바라보았다.
“루딘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이라는 아까 봤던 상태 그대로 검은 연기에 둘러싸여 있었고, 볼레스는 그런 내게 다가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왔다.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되나?’
나야 메시지를 읽었으니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고 알고는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니 껄끄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대놓고 네이라의 몸에서 악마왕이 부활한다고 하면 볼레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생각으로 잠깐 주저하는 사이, 네이라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쿠콰콰콱!!-
“이게 무슨…….”
순간, 휘몰아치는 검은 연기. 검은 연기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처럼 점차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 정도 일정 크기를 유지하고는 서서히 흩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그 흩어진 검은 연기 사이로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타난 것.
[악마왕 아그라네스(World Boss)]
‘뭐지? 월드 보스?’
레이드용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월드 보스라고? 단언컨대 그런 보스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들은 기억이 없다. 어쨌든 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높이가 5미터쯤 되는 악마왕 아그라네스를 올려다보았다.
“네이라?”
놀랍게도 아그라네스의 얼굴은 네이라와 닮아있었다. 단지 동공 없는 새하얀 눈과 창백하다 못해 시퍼런 피부만이 내가 알고 있던 네이라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줄 뿐이다.
[악마왕 아그라네스가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악마왕 아그라네스가 지닌 효과로 인해 대륙에는 악마의 출현 빈도가 높아집니다.]
[악마는 악마왕 아그라네스를 없애기 전까지 계속 나타납니다.]
[토벌 의뢰가 생겨납니다.]
‘결국 토벌 의뢰까지 생겼…… 응?’
어째서 토벌 의뢰가 생겼지? 악마왕 아그라네스는 카르젠 왕국에서 나타난 보스였으니 카르젠 왕국 소속의 플레이어만 받을 수 있는 퀘스트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듯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오트 왕국에서 크라켄이 나타났을 때에도 난 하르페 제국 소속이었기에 그 퀘스트를 받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흐음.”
그때 악마왕 아그라네스의 입에서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목소리도 네이라와 똑같았다.
“부족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아르넬라! 빙산 낙하!”
“그래도 악마들을 지상에 강림시키기엔 충분하겠어.”
내 외침을 들었는지 아르넬라는 다시 한 번 거대한 빙산을 소환해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왠지 이 공격으로도 죽을 거 같지가 않았지만 머리 위에 악마왕이라는 단어를 본 이상,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전투 경험치…….]
“다시 빙산 낙하!”
아르넬라가 사용할 수 있는 빙산 낙하는 총 세 번. 난 그 마지막 횟수까지 사용하라 외쳤고, 이어서 방금 전과 똑같은 빙산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역시 죽지 않는 건가?’
연이은 빙산 낙하에 죽은 녀석들이라고는 상급 악마 로스모와 최상급 악마인 가리카스 뿐이었다. 원래라면 최상급 악마를 죽인 것으로도 만족할 상황이겠지만 퀘스트를 실패하고 악마왕마저 나타났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네이라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놈은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나?’
난 아그라네스에게 다가가려는 볼레스를 잽싸게 끌어당겨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빙산 낙하를 두 번이나 맞은 아그라네스의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인간이 있군.”
‘공격 패턴은…… 아마 마법이겠지?’
이때까지 상대한 악마들은 전부 육탄전을 벌였지만 저 악마왕만큼은 그럴 거 같지가 않았다. 기본 복장부터가 드레스였기 때문인데, 어두운 검보라색을 바탕으로 괴기한 문양까지 그려진 그 드레스는 어찌나 긴지 바닥까지 쭉 펼쳐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그라네스의 상체는 높이와 비교해 그리 크지도 않았다. 그저 일반인보다 조금 더 큰 수준? 대신 하체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드레스의 치마 길이만 4미터를 넘어서는 거 같았다.
또 그런 아그라네스가 가리카스처럼 달려들어 주먹질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콰득-
‘바닥?’
아그라네스가 어떤 공격을 할지 몰라 최대한 긴장하고 있었던 나는 바닥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감지하자마자 옆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바닥에서 솟아오른 것을 확인했는데, 그것은 끝이 창처럼 뾰족한 촉수 같은 거였다.
‘이건 또 무슨 공격이야?’
어쨌든 목표물을 잃고 위로 솟아오른 그 촉수는 순간 움직임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끝부분의 방향을 꺾어 다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미친, 더럽게 빠르잖아!’
처음 바닥에서의 공격은 미리 징조를 파악했기에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날아드는 촉수는 피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날아왔다.
카앙!-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2,093.]
‘데미지가…….’
의외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이다. 이런 수준의 데미지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최상급 악마인 가리카스 정도의 데미지였다. 데미지나 속도. 어느 하나 가리카스와 별반 차이가 없는 악마왕 아그라네스의 공격을 받아낸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색이 악마왕이라는 녀석의 공격력이 이 정도인가?
콰득- 콰득- 콰득-
“……!?”
의아한 생각도 잠시, 바닥에서는 아까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총 다섯 개의 촉수가 추가로 올라왔다. 조금 전에 막아낸 촉수까지 합치면 모두 여섯. 그 여섯 개의 촉수는 엄청난 속도로 내게 날아들었고, 그 광경에 난 스킬을 사용해 이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엘시크의 환영이동!”
콰콰쾅!-
엘시크의 환영이동으로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촉수가 내 환영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니 촉수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한 환영이 그대로 소멸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환영이 단번에 소멸하다니.’
콰득- 콰득-
“씨발, 미친!”
비록 공격을 피했다고는 하나,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세 개의 촉수가 더 생겨나더니 두 개는 내 근처에 있던 볼레스에게. 나머지 일곱 개는 내게로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일단 아르넬라 쪽으로 가자.’
탓!-
레이드 보스인 아르넬라라면 이런 공격쯤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그대로 아르넬라에게 달렸다. 신발에 있는 물 저항력 수치만큼 이동 속도가 상승하는 효과를 받고 있는 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아르넬라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이내 아르넬라를 지나치자마자 촉수는 대상을 바꿔 아르넬라를 공격했다.
덕분에 잠시나마 한숨을 돌린 나는 나 대신 공격을 받은 아르넬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르넬라! 저 악마를 죽여!”
“커흑…….”
“응?”
무슨 일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촉수에 의해 관통당한 아르넬라의 몸이 시꺼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르넬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촉수의 의해서인지 고통스럽게 말을 내뱉은 아르넬라. 잠깐 아르넬라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스로 알아들은 난 아르넬라의 몸을 관통한 촉수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촉수에 관통당하면 스킬이 봉인되나?’
콰득- 콰득-
그러나 언제까지 분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르넬라가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이 전투는 볼 것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아르넬라의 몸을 관통한 촉수는 움직이지 않았고, 나머지 촉수들만 움직여서 공격하니 저 촉수를 몸에서 빼낸다면 다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 이런 추측으로는 안 돼.’
적어도 그 사실만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는 아르넬라의 몸을 관통한 촉수를 없애기 위해 달렸고, 이내 근처에 있던 몇 개의 촉수가 나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칫.”
제발 죽어라!
콰아앙!-
[뇌룡의 포효 발동!]
[모든 마나력이 소모됩니다.]
이전과 같이 거칠게 휘몰아치는 전격의 폭풍. 내가 가진 최고의 데미지를 낼 수 있는 스킬이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마나력이 부족했다.
[스킬 데미지! 3,037.]
[스킬 데미지…….]
‘역부족인가?’
아니, 솔직히 이런 촉수 따위를 공격해도 소용은 없었다. 본체인 아그라네스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느긋하게 관전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난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아르넬라. 역소환.”
파밧!-
[휘몰아치는 설풍의 지배자 아르넬라가 적지 않은 피해를 받은 채 소환이 해제되었습니다.]
[다시 소환하기 위해서는 총 207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역소환이라는 단어와 함께 아르넬라의 몸이 빛으로 변하며 내 손에는 한 장의 카드가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아르넬라가 만든 빙판은 서서히 원래 내가 있었던 산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볼레스는 죽은 건가?’
공간 변화를 해제했음에도 볼레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두 개의 촉수가 볼레스에게 향한 것을 떠올린 나는 그가 죽었을 거라 확신하고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나타난 아그라네스 피해 도망쳤다.
“루딘 님.”
“……!?”
네이라?
뒤돌아서 도망치는 내게 네이라 본연의 말투가 들려왔다. 때문에 뒤돌아본 나였지만 결코 발은 멈추지 않았다.
“루딘 님. 도와…주세요. 제발…….”
“다음에요!”
뒤돌아본 난 혹시나 했지만 악마왕 아그라네스의 모습 그대로였기에 주저하지 않고 달렸다. 도와주고 말고도 없이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한참을 달려 산맥에서 벗어난 난 아그라네스를 따돌렸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후, 씨발.”
이제 어떻게 하지?
[친구 '적성'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군.’
악마왕 때문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난 적성의 대화 요청 메시지를 보고는 용감무쌍 길드와 싸워야 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거절할 수도 없고. 단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에 거절한다면 그것도 웃긴 일이라 생각한 나는 한숨과 함께 대화 요청을 수락했다.
[대화에 연결되었습니다.]
-루딘 님. 시간이 잡혔습니다. 내일 3시에 모든 인원이 접속할 예정입니다.
“아, 예.”
-음?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지쳐 보이시는데.
“괜찮아요. 그보다 3시면…… 10분 전에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예,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부탁드릴 참이었습니다.
‘아니, 잠깐?’
도와주는 거야 상관없지만 타국의 내가 용감무쌍 길드원을 죽인다면 문제가 된다. 어쩌면 오늘과 같이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 사실까지도 떠올린 나는 적성의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 작품 후기 ============================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