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黃昏). 직감의 소유자-106화 (106/211)

00106  第 20 話  =========================================================================

第 20 話 “29일째”

“…….”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온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건, 코끝을 맴도는 알코올 냄새였다. 그 뒤를 이어 작게나마 떠드는 소리.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여기가 낯선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생각하려 했지만 그조차 힘들게 느껴진다.

그냥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었기에 내려가는 눈꺼풀을 힘겹게 붙잡았다.

‘병원인가?’

마지막에 긴급 호출로 연락한 것을 떠올린 난 이곳이 병원일 거라고 추측했다. 내 상태가 병원에 올 정도로 심각했었나? 따지고 보면 그 당시에는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긴 했다.

‘응?’

그때 왼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시선을 내려다보니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은 채 엎드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지? 가녀린 체격에 곱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 단지 그것만으로도 엎드린 인물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 나를 알고 있는 여자는…….

“어? 일어났어요?”

“……?”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처음 보는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 구세요?”

이런 내 질문이 의외였던 걸까? 그 여성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간단하게 소개했다.

“시나에요. 이.기.원 씨.”

‘시나?’

시나를 모르는 건 아니다. 아니,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이곳에서의 시나는 황혼에서 본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황혼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예쁜 인상이었지만…….

“표정을 보니 적잖게 놀란 모양이네요.”

여기서는 차가운 인상이 강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착용한 안경만 보면 지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도도한 눈매로 인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냥 차갑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시나가 어째서…….”

“그야 연락이 왔으니 온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밥도 안 먹고 게임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밥? 무슨 말이지?’

밥이라면 그럭저럭 잘 챙겨 먹고 있는 나였기에 지금 시나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전에 내가 누워 있는 것과 밥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어떻게든 쉬고 싶다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생각한 난 대충 의문을 해결할만한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뭐래요?”

“영양실조라던데요? 섭취한 에너지보다 소모된 에너지가 많아 쓰러진 거라고 했나? 저도 자세히는 잘 몰라요.”

“…….”

웬 영양실조?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정확하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일어나 있는 것만 해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황혼에서 심심찮게 도움 받고 있으니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보다는 유아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유아?”

“옆에 있잖아요.”

시나는 내 옆에 엎드린 여성을 가리켰다. 누군가 했더니 유아였나? 하지만 의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보통 병원에 입원했다면 가족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을까? 또 가족에게 연락했다면 유아가 이곳에 올 리가 없었다.

“왜요? 궁금한 거라도 있어요?”

“제 가족은요?”

“음, 바빠서 그런지 연락을 안 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통화 기록을 보고 가장 최근에 연락한 유아에게 전화한 거고요.”

‘그런가?’

“아님 통화 기록에 유아밖에 없어서 전화했을 수도 있겠네요. 대체 어떤 생활을 하셨기에 연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유아에게 빚진 거예요. 어제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와 온종일 옆에 있었으니까요.”

“어제요?”

“예. 루딘 님…… 아니, 기원 씨는 하루 만에 일어난 거니까요.”

‘……후.’

또 그렇게 쓰러진 건가?

이게 처음이 아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따라서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으나 이런 내 모습이 시나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춰진 모양이었다.

“별로 놀라질 않네요?”

“놀랄 기운도 없어서요.”

대충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한 나는 엎드린 유아를 보았다. 솔직히 유아가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는 없다. 나와 유아는 그저 황혼에서 알게 된 사이일 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어제부터 있었다는 유아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

‘……왠지 복잡하네.’

유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그런 의문을 가지는 사이, 엎드려 있는 유아의 몸이 잠깐 들썩이더니 곧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유아의 얼굴.

“…….”

일순간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황혼에서 늘 봐왔던 유아의 얼굴인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도 저런 얼굴이 있을 줄 몰랐기에 받은 충격은 황혼 때보다 더했다.

“아…… 신아야?”

“일어났어?”

“응, 지금 몇 시야?”

“오전 11시. 그러게 들어가서 자라니까.”

“아니, 괜찮아.”

그래도 피곤했는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은 유아는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덕분에 난 유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

깨어난 날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유아.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유아는 이내 예쁜 얼굴을 찡그리더니 순식간에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흑.”

‘……대체 왜 우는 거야.’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유아가 진정되길 기다렸고, 그런 나와 유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나는 차마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보면 몇 달 만에 깨어난 줄 알겠네요.”

나 또한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유아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유아는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고, 그걸 깨달은 난 조심스레 유아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에, 예.”

정작 입원해 누워 있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뭔가 애매한 상황이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것보다 유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먼저다. 이렇게 와준 것을 포함해 이것저것 많은 신세를 졌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시나에게 들었어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몇 시간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거라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정말로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몇 시간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거라니? 만일 긴급 호출을 부르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윽.’

순간, 의도치 않게 그때의 감각이 떠오른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아찔한 감각. 그 힘이 모두 빠지면 죽음에 이를 거라 생각하니 절로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네요. 처음에 전화를 받고 엄청 놀랬거든요.”

“아, 그, 죄송해요.”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대답한다.

애당초 가족이 전화만 받았어도 유아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과 같은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또 그렇게 생각하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며칠 간 연락이 안 되는 것보다는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

뭔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 반대로 유아가 입원했다면 나도 저런 행동을 보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이야기는 안 할 거야?”

문득 나와 유아를 지켜보고 있던 시나가 말했다.

‘그 이야기?’

“아, 기, 기원 씨.”

시나의 말에 마침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유아. 실제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했는지 조금 더듬거리던 그녀는 이내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원 씨는 혼자 살고 있다고 했죠?”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생각해보니 어렴풋이 했던 거 같았다. 예전에 라즈가 찾은 던전으로 들어갔을 때였나?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던 기억을 떠올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요?”

“괜찮다면 이사 오시지 않으실래요?”

“……이사요?”

“예, 이왕이면 저희 집 근처로요.”

이게 무슨 말이지?

“어째서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이사를 오라는 걸까? 난 거기에 대해 궁금해 물어봤지만 유아는 섣불리 대답하기가 곤란했는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냥 그러면 좋을 거 같아서요.”

“…….”

원래의 나라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의도치 않게 유아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며 대답을 미루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생각 좀 해보고요.”

근데 착각일까? 이런 내 대답에 시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된 지금, 난 바람이나 쐴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젠 걸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낮에 유아와 시나를 집으로 보냈고, 이후 어찌어찌 연락을 받고 찾아온 어머니까지 다시 돌려보낸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다시는 입원하면 안 되겠군.’

입원에 대해서는 단순히 식욕이 없어 끼니를 거르다 쓰러졌다고 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역시 혼자 살면 안 된다. 집으로 돌아와라. 다른 직장을 알아보면 된다. 라고 말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직장에서 한 달 6천만 원을 벌 수 있겠는가? 아니, 찾아보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없다. 때문에 가까스로 설득시켜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는 꼼짝없이 집으로 끌려가게 생길 판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시나?”

그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유아와 함께 돌아갔다고 생각한 시나가 서 있었다.

“돌아간 게 아니었어요?”

“돌아갔다가 다시 온 거죠.”

“대체 왜…….”

“아~ 피곤해. 일단 저기에 앉아요.”

시나는 그 말을 하고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는 불어오는 밤바람에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안 앉을 거예요?”

이유도 없이 다시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난 시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생각은 어떻게 됐어요?”

“일단 거절하려고요.”

물론 이사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나야 캡슐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다. 단지 이사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지금의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는 내가 이사로 인해 생활 자체에 변화를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유아가 슬퍼하겠네요.”

“그야…….”

부정하긴 힘들었다.

“궁금하죠? 유아가 그러는 이유.”

“솔직히 말해 그렇죠.”

“그래도 생각 좀 해봐요.”

생각이라…….

짚이는 게 없지는 않다. 잠깐 생각한 난 대충 짚이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해서가 아닐까요?”

“에이~ 그거야 부수적인 거죠.”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 먹어서?”

“비슷한데 아니에요.”

그럼 뭐야?

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나를 바라보자, 시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랑 유아는 기원 씨…… 아, 어색해. 그냥 루딘 님이라 부를게요. 루딘 님의 행동에 대해 걱정했거든요.”

“행동이요?”

“황혼밖에 안 하시잖아요? 통화 기록도 유아 말고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랑 유아는 루딘 님이 현실 기피증이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현실 기피증이요?”

“황혼이 나오면서 생긴 단어에요. 현실을 부정하고 가상만 찾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인데…… 찾아보면 꽤 많아요. 그런 사람들.”

“제가 현실 기피증이라고요?”

“아니에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

그 뒤로 시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연락하는 사람도 없어, 밥도 못 챙겨 먹어, 게임만 해, 누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단지 유아가 너무 착해서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을 못한 거죠.”

“쓸데없는 참견이네요.”

현실 기피증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 탓일까?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쨌든 유아는 루딘 님을 도와주고 싶어 그 말을 꺼낸 거예요.”

“유아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도 그렇게 말했어요. 거기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고. 근데 유아가 말하던데요? 루딘 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 루딘 님을 도와드리고 싶다고.”

‘처음 만났을 때?’

유아와 처음 만났을 때라면 황혼을 시작한 첫째 날이다. 그때 유아가 날 도와주고 싶다고 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날 접속을 종료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건 황혼에서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

“황혼에서 루딘 님을 도울 일이 뭐가 있어요?”

“…….”

일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황혼에서 나를 도울만한 일? 시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없는 거 같았다.

“그래서 유아가 생각한 게 이런 거예요. 게임에서는 안 되니 현실에서라도 돕고 싶다고. 어제 저랑 이야기를 한 게 그거였어요.”

“…….”

“어쨌든 선택은 루딘 님 몫이겠죠.”

“가시려고요?”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나를 보았다.

“유아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하려고 온 거니까요. 그 말을 했으니 이젠 가야죠.”

“아, 대답은…….”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내일 유아에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훌쩍 떠나는 시나. 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