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31. 아프다 (1) >
“유, 윤 사장님.”
고 전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예요?”
“······.”
“증거가 있습니까?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하죠.”
“형님, 제가 경찰은 아니라서, 증거 같은 건 모르겠고요.”
“······.”
“회장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곧 뵙게 될 테니, 직접 여쭤보세요.”
“회장님······.”
지혁의 지시라는 말에 고 전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선도그룹에서 그의 말은 곧 법이자, 규칙이기 때문이다.
- 아빠! 무슨 일이에요!
- 여보!
시끄러운 소리에 안에서 딸과 아내가 뛰어나왔다.
“어머, 이 사람들 뭐예요? 삼촌, 안녕하세요.”
두 여자는 문 앞에 민회색 전투복을 입은 특임대원들을 보고 놀랐는데.
딸은 그 사이에 있는 윤 사장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어, 그래. 안녕.”
윤 사장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세크 위원들은 가족들 간에도 알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고 전무의 딸 또한 어렸을 적부터 윤 사장을 봐왔기에, 그를 ‘삼촌’이라며 친근하게 부른다.
“무슨 일이에요? 이분들 삼촌이랑 함께 온 건가요? 아빠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요?”
윤 사장은 난감했다.
형님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내는 고 전무를 체포하는 것도 불편했는데, 그의 딸과 아내가 나와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윤 사장은 딸의 물음에 답하기 전에, 고 전무의 귀 가까이에서 작게 말했다.
“형님, 방금 죄목 들었죠?”
“······.”
“가족들 앞에서 실랑이 벌일 주제는 아니잖아요.”
간통죄 및 기밀누설죄
형질로만 치면 기밀누설죄가 더 크지만, 간통죄는 가족들 앞에서는 꺼내기엔 부끄러운 죄였다.
“조용히 가시죠. 저도 형님 가족들 앞에서 이러기 싫습니다.”
“······.”
“기든 아니든 일단 가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하아······.
고 전무는 한숨을 쉰 뒤,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있었으며.
딸은 울먹이며 고 전무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미안하다.’
고 전무는 그의 팔을 붙잡은 딸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었다.
“아빠 다녀올게.”
“무서워요.”
고 전무는 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고 전무는 윤 사장을 따라가려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금방 갔다 오겠다며, 걱정 말고 기다리라며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왜 사람은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심각성을 깨닫는 걸까.’
“윤 사장님, 가시죠.”
“네.”
고 전무가 특임대원 손에 이끌려 먼저 출발한 뒤에, 윤 사장은 그의 아내와 딸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으세요. 회사 일이니까.”
그 또한 한 가족의 가장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
과천 가는 길.
지혁과 심우민은 출발한 지 1시간 반 정도 되어,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잠깐 쉬었다가 가자.”
“알겠습니다.”
“소변볼 거면 지금 빨리 봐.”
“네.”
생리적 문제는 해결해야 했기에, 한번 쉬었지만.
지혁은 고 전무 일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가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추 이사가 한 말이 다 거짓이라고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그가 왜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추 이사 얘기 듣고 이해는 되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한,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명.
‘왜 하필 고 전무일까.’
지혁은 그야말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위이잉-
고 전무 생각에 멍해 있던 중,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손정진’
지혁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정진아.”
[회장님, 지금 출발하려고 보고드립니다.]
“뭐?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
[응급조치는 다 해서 큰 문제 없고요. 남 팀장님 뒷자리에 타고 가면 됩니다.]
“그래도 너무 급한 거 같은데.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정말 괜찮습니다.]
지혁은 손정진이 왜 이렇게 서두를까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 너 신혼인 걸 깜빡했네.”
[하하!]
손정진은 민망한 듯 큰 소리로 웃은 후 말했다.
[몸이 달습니다. 보고 싶어 죽겠습니다. 하하.]
“이해한다. 그럼 어서 출발해.”
[네!]
지혁은 인간의 건강한 본능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넓은 편이다.
“조심해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투는 벌이지 말고.”
[알겠습니다. 특임대원들이 함께라서, 걱정 없습니다.]
남 팀장과 10명의 특임대원.
총기도 지닌 소부대이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위협이 될만한 일은 없었다.
[그럼 과천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뚝.
전화를 끊자, 옆에서 헬멧을 벗고 쉬던 심우민이 물었다.
“손 팀장님 출발한다고 합니까?”
“어, 살만한가 봐.”
“다행이네요.”
지혁은 심우민의 옆모습을 보았다.
‘얼굴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네.’
만나서 지금까지 심우민과 계속 헬멧을 쓰고 작전 수행했기에, 심우민의 맨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마.’
지혁은 심우민을 만나면, 가장 먼저 확인해보고 싶었던 걸 떠올렸다.
“심 대리.”
“네, 회장님.”
“나 좀 봐봐.”
“네?”
심우민은 지혁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앞머리 치워 봐.”
“왜 그러십니까?”
“얼마나 잘생겼나 보게.”
심우민은 뭔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멀뚱멀뚱 떴고.
지혁의 눈은 심우민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제가 여자한테 잘 생겼다는 말은 몇 번 들어보긴 했지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아, 네.”
심우민은 지혁의 눈빛이 이상하여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는 거야? 눈동자도 좀 이상한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지혁의 동공 안에 물결이 이는 것 같았다.
심우민은 그의 눈동자가 신기해서, 멍하니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이상해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의 얼굴에 빠져 있었다.
***
정적을 깬 건 지혁이었다.
‘어?!’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맙소사······ 왜 하필.’
너무 검고 검어서, 어렴풋이 밝아 보이기도 하는 지옥의 색깔. ‘보라색’이었다.
지혁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봤다.
“심 대리, 머리 옆으로 확실하게 넘겨봐.”
“제가 넘기는 스타일 싫어하는······.”
“말 안 들어?!”
“알겠습니다.”
심우민은 이마에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도록, 옆으로 곱게 넘겼고.
지혁의 눈빛은 세차게 일렁였다.
‘다행이다. 약간 다르네.’
보라색은 맞으나, ‘그 세계’의 캡틴과 오진양 부회장에게서 봤던 자주색과는 좀 달랐다.
예전에 오 명예회장에게 봤던 청자색에 조금 더 가까웠다.
‘하아······ 애매하다.’
지혁은 한숨을 크게 쉬고, 시선을 거뒀다.
심우민은 그 모습을 보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얼마나 잘생겼나 보자고 하시더니, 왜 한숨을 쉬시는 거야. 대놓고 얼굴 까는 건가.’
심우민은 20대라서 아직 외모에 관심을 많이 갖는 시기였고, 곧바로 위장크림 시트의 손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훅- 훅-
지혁은 진정하려고 심호흡했다.
오랜만에 본 ‘보라색’이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이다.
많이 극복되어서 예전처럼 과호흡을 하지는 않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은 남아 있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세에 나타나는 영웅.
지혁은 심우민이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평시에는 그저 그럴지 몰라도, 난세에 부각을 드러내는 걸출한 인물 말이다.
지혁 또한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 다음을 생각했고.
어쩌면 심우민이 미래에 선도그룹을 이끌 인재일 수도 있다는 기대도 갖고 있었다.
관심을 두고 젊은 인재의 성장을 지켜보려 했는데.
자주색(purple)과 청자색(violet).
심우민의 색은 그 경계에 있었고.
지혁은 불안함을 느꼈다.
‘왜 하필 보라색이냐고.’
지혁은 그의 ‘세 번째 눈’을 믿는다.
‘그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입증된 능력이니까.
문득, 이곳에 심우민과 지혁 둘뿐이라는 걸 생각했다.
‘죽일까?’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려도 된다.
여기서 죽이면 아무도 모른다. 사고로 치장하면 그만이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어?”
“호흡이 거칠어지신 것 같아서요.”
심우민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어디 다치신 거 아니죠?”
“······.”
지혁은 심우민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떠올려봤다.
실력은 유능했으며, 칼끝은 정의로웠다.
명석함이 빛나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단호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지혁은 심우민을 높이 평가했다.
“너 내가 싫지 않냐?”
지혁은 심우민에게 물었다.
“네?”
“네 아버지와 내 관계 알잖아.”
“······.”
“저번에 노코멘트라고 했었지? 솔직하게 말해봐. 싫지 않냐?”
심우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릴 때는 싫어했습니다.”
“······.”
“커가면서 존경하게 됐습니다.”
심우민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생각하면 밉지만, 인간적으로는 존경해서······ 그때 노코멘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할 수만 있다면, 회장님을 닮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좀 전까지 서로의 등을 맞대고, 목숨을 건 전투를 함께 했다.
지혁을 대하는 심우민의 태도는 전과 달랐고, 지혁 또한 심우민이 단순히 유능한 인재로만 보이지 않았다.
스륵-
지혁은 칼자루 위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섣부른 결정하지 말자. 분명, 큰아버지 색에 더 가까워. 옆에 두고 지켜보다가······.’
“심 대리.”
“네, 회장님.”
“앞으로 항상 내 옆에 있어라. 수행원으로 발령 낼 테니.”
“알겠습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위험해 보이면 죽여도 돼.’
***
지혁은 과천 쉘터에 도착하자마자, 구금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구금실은 쉘터의 규칙 위반자들을 가둬두는 곳이다.
“오셨습니까.”
윤 사장은 지혁을 발견하고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지혁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은 전투복 차림 그대로였다.
“좀 쉬었다 오셔도 될 텐데.”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요.”
지혁은 고 전무의 일이 너무 신경 쓰였다.
추 이사를 잡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했다.
“안녕하십니까.”
지혁의 옆에 선 심우민은 윤 사장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 심 대리. 자기가 여기 웬일이야?”
지혁은 고 전무를 체포하여 구금실에 가둬두는 건, 세크 위원들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했었다.
그의 지시로 보안 유지를 한 건데, 심우민을 데리고 온 건 의외였다.
“제 수행원입니다. 앞으로 일거수일투족 저와 함께 할 거예요.”
“아, 갑자기요?”
지혁은 부연 설명 하는 걸 싫어한다.
“고 전무는요? 불렀어요?”
“네. 곧 올 겁니다.”
잠시 후.
하얀 옷을 입은 고 전무가 거칠게 항의하며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놔! 내 발로 갈 테니까.]
지혁은 보안 유리 너머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고.
취조실 안에 고 전무 혼자 남겨지자, 외투를 벗으며 일어났다.
“회장님이 직접 취조를 하시는 건······.”
“세크 위원인데, 제가 해야지 누가 합니까,”
윤 사장은 지혁을 말리려다가.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삐걱-
지혁은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 있던 고 전무는 지혁을 보고······.
후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혁은 그의 앞에 앉았다.
“······.”
한동안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서로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