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생각이 바뀌다 (2)
오진원이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압박당한 게 두 달 전 일이다.
오 회장은 그에게 3개월의 기한을 주며, 마음 정리하고 받아들이라고 했었다.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오진원 나름으로는 흘러가는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재벌가 자제치고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었다. 오 회장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서, 이번엔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않기 위해, 지독하게 일에만 집중했다.
일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가족 모임 이후로, 퇴근을 일찍 한 적이 없다.
집중할 게 필요했다. 일 외에 다른 것은 죄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선도전자 대표이사실.
“대표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네?”
오진원은 전략실장이 대표이사실에 들어와 있는지도 몰랐다.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요. 노크도 했는데.”
“아, 못 들었네요. 방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오늘도 야근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오진원은 충혈된 눈으로 대답했다.
“그러려고요.”
“한 주가 깁니다. 월요일부터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
“그러다가 몸 상하십니다. 지금 며칠째······.”
전략실장의 걱정스러운 말에 오진원은 싱긋 웃었다.
“지금 저에게는 이게 쉼입니다.”
“······.”
“몸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 건강을 더 챙기고 싶어서요.”
오 부회장은 실각했고, 오 회장은 최근 회사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오진원이 큰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인 걸 전략실장도 잘 알고 있다.
“네, 걱정되어 말씀드렸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진원은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데, 전략실장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 대표님?”
“네?”
“저 먼저 퇴근해 봐도 되겠습니까?”
업무 파트너인 전략실장은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아무리 일 끝나면 편하게 먼저 가라고 하시지만, 매번 먼저 가는 게 참······.’
대표이사 일하고 있는데, 월요일부터 먼저 가기가 참 민망했다.
“물어보지 말고 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
“자꾸 그러시면 저 부담스러워서 야근 못 해요.”
“······.”
“하아······ 이거 참.”
오진원은 입맛을 다셨다.
‘맘 놓고 야근도 못 하겠네.’
전략실장은 죄지은 사람처럼 대표이사실을 나갔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죄송해하지 말라니까요? 어서 들어가세요.”
전략실장은 몇 번을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고.
오진원은 중얼거렸다.
“오후 4시 이후로는 대표실 출입을 못 하게 하든지 해야지. 퇴근 인사도 못 하게.”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데.
윙-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음? 지혁이?’
지혁에게 연락이 온 건 오랜만이었다.
“어~ 지혁아.”
오진원은 전화를 받은 뒤, 그의 눈이 눈알이 빠질 만큼 커졌다.
“뭐? 총수를? 진짜?!”
***
오진원은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깨를 짓눌려 왔던 게 사라졌다.
빨리 지혁을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 멋진 녀석!’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다.
지혁이 ‘총수를 하겠다’라는 말 한마디로, 충혈된 눈이 맑아졌으며, 두통이 사라지고, 흔들리던 이빨이 멈추었다.
단, 한 마디로 말이다.
“지혁아~”
잠실의 한 카페 앞에서 지혁을 만났다.
“형님~”
“어이구~”
오진원은 지혁을 보자마자, 포옹했다.
“힘든 결심 해줘서 고맙다.”
혹시 지혁이 말을 바꿀까 봐, 만나자마자 다짐부터 받았다.
“미안해요. 한 입으로 두말해서. 형님한테 양보한다고 해놓고.”
“아니야~ 괜찮아~그런 양보는 안 해도 돼~”
오진원은 웃으며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낙장불입이야. 진짜 끝. 말 바꾸기 없기. 알았지? ”
“알았어요~”
지혁은 싱긋 웃었다.
오진원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좋은 데 갈까? 뭐 먹고 싶어? 한잔해야지?”
지혁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집에 일찍 가야 해서요.”
“아, 그래? 아쉬운데?”
앞에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예요. 들어가시죠.”
“어, 그래.”
두 사람은 카페로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오진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왜 마음이 바뀌었어?”
“······.”
지혁이 대꾸가 없자, 오진원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니? 네가 총수를 하겠다는 게 중요한 거지. 하하.”
지혁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총수로서 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총수로서?”
“네. 선도그룹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요.”
오진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그룹을 움직여? 무슨 일을 벌이려고······’
오진원은 지혁이 빈말 안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형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래? 나야 뭐.”
지혁은 오진원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
오진원은 억지로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하하. 이번엔 아래 말고 옆에서 도와도 되는 거니?”
“네.”
“······.”
하지만 지혁은 웃지 않았다.
지혁에게 받는 두 번째 부탁이었다. 처음은 오 부회장을 후계 자리에서 내리려 할 때였고.
그다음이 오늘인데.
‘분위기가 달라.’
그때, 반은 협박이었다.
전투 중에 도망가면 내 손에 죽을 테니, 물러서지 말고 싸우라며 독려하는 무서운 지휘관 같았달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간절해 보이잖아?’
진짜, 부탁.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 알았어. 총수 하라는 것만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연히 돕지.”
“네, 고마워요. 그럼 회사 계속 다니시는 겁니다.”
“응? 어. 어······.”
오진원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게 또 그렇게 되네.’
그는 지혁의 눈치를 살핀 후 말했다.
“회장님께는 형이 얘기할까?”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그래야지. 그래도 좀 쿠션이 있는 게 좋지 않겠니? 네가 대뜸 먼저 말하는 것보다는.”
지혁은 그의 속 깊은 배려가 고마웠다.
“네, 그렇게 하시죠.”
“그래.”
지혁은 시계를 본 후, 일어날 채비를 했다.
“형님, 이만 일어날까요?”
“벌써?”
오진원도 시계를 봤는데, 카페에 들어온 지 이제 30분 정도 지났다.
‘얘가 왜 이렇게 서두를까. 집에 일찍 들어가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오진원의 물음에.
“아······.”
지혁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나 보네. 혹시 작은 어머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혁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내가 임신했어요.”
“······ 뭐?!”
오진원은 벌떡 일어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대박! 진짜 축하한다! 지혁아! 하하!”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본인이 임신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지혁의 손을 마주 잡고, 격하게 포옹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우리 집안 경사 났네~! 하하.”
***
“지혁이네가 임신했다고?”
성북동. 저녁 식사 자리.
오진원은 가족들이 모인 앞에서 지혁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네. 막 7주 차 된다고 하더라고요. 심장 소리도 들었고, 임신 확인서까지 받았데요.”
“······.”
정적이 흘렀다.
다들 표정이 복잡 미묘했는데.
오혜진과 오혜빈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고.
“축하할 일이네······.”
말은 축하한다면서도, 큰어머니는 표정은 굉장히 씁쓸했다.
그리고 오 회장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었는데.
“비서실장. 난데. 선도물산 대표 임신했다고 하거든? 몰랐나? 어. 출산 준비 물품 정리해서 빨리 보내라고 해.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가장 좋은 걸로. 빨리.”
전화를 끊은 뒤, 오 회장의 표정은 상기 되어 있었다.
앞에 앉은 오진원, 오혜진, 오혜빈의 얼굴을 한 번씩 본 후, 자리에 없는 오진양을 떠올렸다.
‘나이는 다 찼는데, 시집 장가도 안 가고. 한 놈은 갔다 오고······.’
자식 농사를 열심히 지었으나, 결혼은 정말 뜻대로 되기 어려웠다.
‘80이 넘는 나이에······.’
오 회장은 지혁의 임신 소식이 너무 반가웠다.
“하하! 잘됐네. 잘됐어~”
아내와 자식들이 불편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어휴······.”
큰어머니는 다른 사람은 안 들리게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오 회장은 제원그룹 명예회장에게도 전화했다.
“지혁네가 임신했대~”
목소리가 좀 전보다 한층 더 올라갔다.
조카 손주들은 없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지혁의 임신 소식은 무게감이 달랐다.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우의 아들이라서일까, 아니면 지지고 볶은 사이라서일까.
다른 조카들과 거리감이 달랐다.
오 회장은 형제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했고.
“으하하.”
숟가락은 안 들고 전화 통화만 하니, 가족들은 식사를 못 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늦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
오진원이 오 회장에게 다가왔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오 회장의 서재.
오진원은 오 회장과 마주 보고 앉았다.
“뭔데?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그가 오 회장에게 따로 얘기하자는 일은 잘 없으므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버지, 지혁이한테 임신 소식을 어떻게 듣게 됐나면요······.”
지혁이 총수를 하고 싶어 하는 의중을 전했고,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듣게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저도 너무 의외라서, 전화로 얘기 듣고 바로 만나본 건데. 무슨 결심이 선 건지, 차분해 보이더라고요.”
“······.”
“간절해 보이기도······ 뭐랄까.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
오 회장은 굳은 얼굴로 대꾸 없이 듣기만 했고.
오진원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혹시 큰소리가 나지 않을까 열심히 부연 설명을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 자리를 원치 않고요. 지혁이가 맡겠다고 해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의지가 필요한 자리잖아요. 사명감도 있어야 하고요. 등 떠밀려서 해야 할 자리는 아니라고 봐요.”
오 회장은 망부석이 된 듯, 가만히 있었다.
“지혁이 의지를 보이니, 맡겨 보시죠.”
사실, 오 회장이 지혁의 뜻을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다.
오진원은 오 회장과 지혁 사이의 밀회를 모르기에, 허락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계속 얘기했으나.
오 회장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정리 중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버지······ 네?!”
의외로 선선한 대답에 오진원은 놀랐다.
“지혁이 언제 올 거라더냐?”
“네? 아······.”
오진원은 당황했다.
“언제든요. 원래 지혁이가 바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임산부 몸 상태 고려해서, 편한 날 오라고 해.”
“제수씨랑 같이요?”
“그래, 둘이 같이 오라고 해라.”
“아······ 네.”
오 회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녀석이 잘하긴 할 거야.’
가슴 속 한구석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새 생명에 대한 소식이 오 회장의 마음을 쉽게 움직였다.
불사조가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