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권력의 행방 (1)
최근에 오진원은 지혁이 불편하고 어려웠었다.
‘형님이 회장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오진양에 대한 지혁의 공격은 과하게 저돌적이었고, 그가 했던 말은 욕심을 숨기기 위한 핑계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다 오해였구나.’
지금 그와 눈을 마주하고 진심 어린 얘기를 들으면서, 오해는 사라지고.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얘는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거야.’
“이거 희망스러운 대답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오진원은 생각하느라,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고.
앞에 앉은 지혁은 그걸 희망스러운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냥 형이 하자.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이제부터 회사에는 돈만 벌러 다니면서, 아내, 어머니와 함께 인생 즐기고 싶었다.
‘어차피 다 뒤질 거니까.’
미래에 대한 지혁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래죽나, 저래죽나 마찬가지.
즐기며 살아야 한다.
“잠깐. 잠깐.”
오진원은 양손을 들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라. 내가 예전부터 참았는데. 너 진짜 그러다가 형한테 혼나는 수가 있어.”
“······.”
오해가 풀려서일까, 오진원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지혁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인상을 썼는데.
지혁은 그 모습이 참 재밌고 귀여웠다.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 모습 같네.’
“어이쿠, 무서워라. 하하.”
“까불지 말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거 아니야? 갑자기 이 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
그제야, 오 부회장 얘기를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네요. 내가 결론부터 말했구나.”
“······.”
“어제 회장님을 왜 만났냐면요······.”
지혁은 시판품 조사와 관련된 오 부회장 얘기를 해주었다.
오진원은 한 가족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녀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될 테니까.
그리고 둘 중 누가 총수가 되든.
오진원은 선도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멤버임은 분명하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와는 숨김없이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 회장과 주고받은 조건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아······.”
얘기를 다 들은 후.
오진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네, 끝났어요.”
오너일가의 장남이 무너진 일.
허무하고 씁쓸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싸우더니, 참 황당하게 가네.’
치열한 전투일수록 약간의 빈틈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투는 공격보다 수비를 잘하는 쪽이 승리할 때가 많다.
“아버지는 괜찮으셔?”
“상심이 크시죠.”
하아······.
오진원의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쉬었는데, 지혁이 바로 말했다.
“그러니까. 형이 하셔야죠.”
“······.”
“가족과 그룹을 위해서, 그 그림이 좋아요.”
***
오진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그릇이 못 돼.”
“그건 형이 판단할 일이 아니에요. 모두가 형이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지혁아, 잘 알잖아.”
“······.”
“나 안 할 거라는 거 알잖아. 괜한 얘기하지 마라. 술이나 마셔.”
진원은 술잔을 들었고.
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원샷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는데, 가로등 하나 없어서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왜 그렇게 완강한데요?”
오진원은 철벽을 쳤으나, 지혁은 어떻게든 이 주제를 끝내려 하지 않으려 했다.
“네가 더 잘할 거니까.”
“하하.”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건 형 생각이죠. 주변 얘기 들어보면, 형에 대한 기대도 커요.”
두 사람의 장점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누가 더 총수 자리에 적합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난 내 눈을 믿어. 네가 딱 총수감이야.”
“와, 하기 싫다고 이렇게 말하는 거 봐.”
“진짜거든?”
지혁은 눈알을 한번 굴린 후 말했다.
“뭐, 형이 절 그렇게 인정해준다면요. 옆에 두고 쓰면 되잖아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옆에 말고 아래에 두고 써도 되고요.”
오진원은 뜨끔해서 말했다.
“야, 그 얘기는 하지 마.”
지혁이 오진원에게 ‘옆에 말고 아래’ 있으라고 했을 때, 한참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오금이 저렸었다.
“하하”
“웃지 마라~”
오진원도 지혁을 따라서 피식 웃었다.
지혁이 말했다.
“어쨌든, 형이 회장 한다고 해서 저 어디 가는 거 아니에요. 전 회사 계속 다닐 거거든요? 돈 벌어야 하니까.”
“······.”
“어느 위치에서든 형 도울 테니까요. 뭐, 형이 원치 않는다면, 쥐 죽은 듯이 회사생활 할 수도 있고요.”
“······.”
“어떻게든 써도 돼요. 자르지만 말아 주세요.”
“자르긴 뭘 잘라.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오진원은 지혁에게 이런 얘기 듣는 게 의아했다.
치열하게 사내 정치하고, 성과를 위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그 오지혁이 아니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뭐,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
지혁은 그의 질문에 싱긋 웃었다.
“저다운 거요?”
“······.”
“방금 말한 게 저다운 건데요. 하하. 전 원래부터 욜로를 꿈꿨어요.”
지혁은 먼 곳을 바라봤다.
칠흑같이 어두워도, 달빛 때문에 산등성이 보였다.
“이제 좀 즐기면서 살려고요.”
“······.”
“지금까지는······ 주제넘은 사명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 때문에 칼춤 좀 췄었지만.”
“사명감? 뭐에 대해서?”
오진원이 알아듣기 어려운 답변을 했다.
“어차피 뒤질 거라도, 일찍 뒤질 필요는 없잖아요.”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보라색 남자를 막아냈다는 뜻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오진원으로서는 이런 말이 섬뜩하게만 들렸다.
“얘가 자꾸 이해 못 할 소리를 하네?”
지혁은 싱긋 웃고는 말했다.
“전 할 일은 다 했고~ 이제 좀 쉬렵니다~”
오진원은 후련해하는 지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진심인 건 확실해 보였다.
***
‘너무 완강해 보여.’
지난번 최 부회장이 와서 설득할 때와는 달랐다.
그 또한 적극적으로 총수 자리를 권유했지만, 지금의 지혁처럼 필사적이진 않았다.
이성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대화할수록 말리는 기분.
‘이러다가······.’
오진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안돼. 안돼. 난 못 해.”
“해도 돼요.”
“야, 형 아직 장가도 안 갔어~”
“······.”
“형 마흔 넘은 거 알지? 노총각이야~ 넌 장가도 갔잖아?”
지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그룹 총수랑 무슨 상관이에요?”
“왜 상관이 없어? 여자 만날 시간이 있겠냐?”
“선도그룹 총수쯤 되면, 골라잡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
“스무 살 연하도 가능할 거 같은데.”
오진원은 당황하여, 억지를 부렸다.
“연애 없는 결혼은 안 돼~”
“하하. 와~ 이 형님, 억지 부리네.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할 사람이었으면 진작 했겠죠.”
“어? 이거 비하 발언?”
“비하 발언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팩트.”
오진원의 ‘장가’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야, 너 한 입으로 두말하기야?!”
“네?”
“네가 총수 하겠다며~ 인제 와서 이러기냐고.”
이 말에 지혁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고, 오진원은 이때나 싶어서 화력을 집중시켰다.
“남자가 말이야. 하기로 했으면 쭉 가는 거지. 상황 바뀌었다고 말 바꾸는 게 어딨어? 치사하게.”
“아니, 총수 자리 넘겨준다는 게 치사한 거예요?”
“치사하지! 너 하기 싫은 거 넘기겠다는 거잖아.”
지혁은 생각했다.
‘이 형······ 말 잘하는데?’
오진원은 날카로운 공격에, 지혁은 주제를 돌렸다.
“큰아버지와 큰형님 생각해보세요.”
“뭐야? 갑자기?”
“전 큰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니라고요.”
“······.”
“긴 시간 동안 쌓아온 걸,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큰아버지가 너무 안 되지 않았어요?”
“이 자식······ 치사하게 가족 공격을.”
지혁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고, 오진원은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했다.
“그러니까, 진양 형님이 그대로······ 아, 이건 아니구나.”
뭐라도 대꾸하려다가 실수했다.
“형님, 선 넘지 마세요.”
지혁의 쌍심지를 켜자, 오진원은 손사랫짓하며 말했다.
“실수야. 실수.”
지혁의 태도에 무의식적으로 움찔했었는데, 오진원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야! 눈 그렇게 뜨고 형 보지 말랬지!”
“형이 언제 그랬어요?”
“자꾸 말대꾸할래? 10살이나 어린 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공방전은 점점 유치해졌다.
이 모습을 최 부회장이 봤다면, ‘시켜준대도 지랄’이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술병이 쌓여갔지만, 결국 접점을 찾지 못했고.
‘이 정도면 됐다.’
이만큼 인식시켰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오 회장에게 넘길 차례다.
“이제 그만하죠.”
“그래, 그만해. 나 안 해.”
“아직 시간 있으니까요.”
“아, 글쎄, 안······.”
덥석.
지혁은 오진원의 손을 잡고 말했다.
“모두를 위한 길이 뭔지, 생각해보세요.”
***
선도본관. 미래기획실.
한 전무는 발걸음을 빨리했고.
똑똑.
문을 열고 인사지원팀으로 들어갔다.
“어? 비서실장님?”
인사 지원팀장은 한 전무를 보고 의아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한 전무는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서, 인사지원 팀장에게 목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긴급 발령이 있습니다.”
임원급 긴급 발령은 간혹 있는 일이므로, 인사지원 팀장은 곧바로 눈치챘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면, 강등 발령이다.
“네 말씀하십시오.”
“SDS 대표이사님 인사발령 건인데요.”
인사지원 팀장은 눈을 부릅떴다.
‘SDS? 오진양 부회장님?’
윤리경영위 일로 회사가 뒤집힌 지, 겨우 3개월 지났다.
‘골치 아파지겠네.’
뭔지 몰라도 큰일일 거라는 짐작이 되었고, 인사지원 팀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한 전무는 주변을 살핀 후 말했다.
“오 부회장님을 선도전자 상임고문으로 인사조치 해 주세요.”
“상임······ 뭐요?!”
인사지원 팀장은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이게······ 뭔 소리야?!’
상임고문은 임원들이 은퇴하기 직전, 혹은 은퇴한 후에 가는 자리다.
그룹 회장의 장남이 갈 자리는 절대로 아니다.
“쉿. 쉿.”
인사지원 팀장의 반응이 너무 컸는지, 한 전무는 바로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는데.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한 전무는 화들짝 놀랐다.
“부,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미래기획실장 최재훈 부회장이었다.
“아니, 비밀 얘기하려거든 독방에 가서 하든지, 사무실에서 아무리 목소리를 죽여봐야······.”
최 부회장은 볼일이 있어서, 인사지원팀에 막 들어오던 차였다.
“인사팀장, 어서 문 잠그게.”
“아, 네.”
철컥.
회의실로 이동하여 인사지원 팀장이 문을 잠그자, 최 부회장이 물었다.
“비서실장. 방금 뭐야? 자세히 얘기해 봐.”
“들으신 대로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거잖아.”
한 전무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아침에 회장님께서 출근하시자마자 조용히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최 부회장은 눈알을 굴리다가 물었다.
“최근 뭐 이상한 일 없었나?”
“글쎄요. 뭐 딱히.”
한 전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엊그제 오지혁 대표님과 독대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오지혁 독대. 오 부회장 상임고문 인사발령······.’
곧, 최 부회장은 이 인사발령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끝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