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잊지마라
오 부회장은 선도전자 전략실장과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 안 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정신이 든 듯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건강하셨습니까!”
좀 전에 오진원과 있을 때와는 완전 달랐다.
편안하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며.
목소리 톤도 올라갔다.
오진원은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형님, 어쩐 일이세요?”
“꼭 일이 있어야 오냐? 원래 내가 있던 곳인데?”
“······.”
“그냥 와봤다. 우리 아우님 일 잘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뭐, 잘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오 부회장은 소파에 털썩 앉았고.
오진원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커피 드려요?”
“그래.”
오진원은 비서실에 커피 내오라고 호출한 뒤.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진원은 오 부회장을 잘 안다.
아무 용건 없이 찾아올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가 온 이유를 물어보려는데.
오 부회장이 전략실장과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인사는 나눴으니까. 이제 자리 좀 피해주겠나?”
두 남자는 오진원을 바라봤고,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
이제 대표이사실에 오진원과 오 부회장만 남았고.
오 부회장은 대뜸 말했다.
“오지혁이 사고 쳤더라.”
“네?!”
오진원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소리야? 원전 수주 건으로 크게 한 건 했다고 기사 났는데.’
그는 가만히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설마 좋은 일을 사고라고······ 형님이 반어법으로 농담할 사람은 아니고.’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니, 진짜 ‘사고’를 말하는 것 같았다.
“형님, 알아듣게 설명 해주세요. 사고라뇨.”
이제야 오 부회장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얘기했다.
“너 기술표준원에서 분기마다 시판품 조사하는 거 알지?”
“알죠.”
경영자에게는 참 신경 쓰이는 일.
회사 이미지는 매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건 왜요?”
“선도물산에서 걸렸데.”
“헉!”
오진원은 놀라서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어, 어쩌다가······ 언론에까지 나온 거예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고.”
후유-
오진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간담회 한다는데. 형식적인 거잖아.”
“지혁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죠.”
피식.
이 말에 오 부회장은 웃었다.
“그럴 수 없게 해야지.”
“······네?!”
오진원은 설마 하는 얼굴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내가 귀찮은 일 생기는 거 싫어해서, 선도전자 대표 시절에 표준기술원 꽉 잡아놨거든.”
“······.”
“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을 거야.”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재수 없게 걸린 덫이지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거라는 것.
“형님······.”
검은 속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얼굴에 생기가 돌았구나.’
최근에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지혁의 불운이 그에게 활력소가 된 것이다.
“나 말릴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말이야. 진원아.”
오 부회장이 물끄러미 오진원을 바라봤다.
“이제 팔푼이 짓 좀 그만하고.”
“······.”
“형이랑 손잡자.”
***
오 부회장은 오진원을 찾아온 목적을 분명히 말했다.
“후유······.”
오진원은 한숨부터 쉬었다.
“형님도 참 징합니다. 징해.”
“뭐?”
“아니,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셨어요?”
오 부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좀 심하게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나이도 있으신데 몸 생각하셔야죠.”
“뭐, 인마?”
“상대해봤으니 아실 거 아니에요. 지혁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
“상대가 안 될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죠.”
오진원은 손사랫짓하며 말했다.
“형님의 권력 의지는 인정합니다만, 하지만 지금은 관두세요. 지혁이를 꺾으려는 건 형님한테 오히려 독입니다.”
“······.”
“유리한 위치에 있으신데, 왜 굳이 싸우려고 하세요? SDS에서 실적 만드시면서, 당분간 조용히 계세요.”
오진원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지혁이를 지지하지만, 형님 볼 때마다 안타까워요. 왜 자꾸 자살골······.”
오진원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너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오 부회장은 표정이 굳어졌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야.”
“······.”
“너라고 너.”
“뭐가요.”
“손잡고 너를 밀어주려는 거라고. 인마.”
“······네?!”
오진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방 안에 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세요.”
후유-
오 부회장은 한숨을 크게 쉬었고.
오진원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불안해했다.
“나쁜 자식. 걔는 도대체 널 어떻게 만든 거냐?”
“······.”
“뭐가 그렇게 무서워?”
“무섭긴 뭘 무서워요. 전 그냥 싫다니까요.”
오 부회장은 오진원은 욕심이 없는 사람인 걸 알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지혁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거부하지 말고 형 얘기 좀 들어봐.”
“······.”
“내가 기업 총수가 될 수 있겠냐? 난 이미 끝났어.”
오 부회장의 눈빛이 한이 서려 있었다.
“사회적 매장만 안 당했을 뿐이지. 그룹에선 매장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실수한 일을 중역들은 다 알고 있잖아? 오지혁이 내 팔다리 다 잘랐고.”
오진원은 부정하지 못했다.
새삼, 이 사실을 오 부회장이 자각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했다.
“뭐, 주변 시선 다 무시하고, 아버지가 억지로 밀어붙이면 총수가 될 수도 있겠지. 근데, 아버지가 그럴 리 없잖아?”
오 회장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가족보다 회사가 먼저다.
그 얘기를 공공연히 가족들 앞에서도 얘기한다.
선도그룹 자체가 곧 자신이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아들을 기업 총수로 세우는 무리수를 쉽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오 회장의 결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오 부회장은 처절한 자기 증명을 해야 하는데, 그에게 그런 의욕은 남아있지 않았다.
“형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오진원은 어떻게든 이 얘기를 피하고 싶었다.
“형이 밀어줄게. 진원아.”
“······.”
“네가 하자.”
***
“싫습니다.”
오진원은 단칼에 거절했다.
“형님도 아시잖아요. 전 회사생활에 뜻이 없는 거.”
“······.”
“지금은 마지못해 자리에 버티고 있지만.”
오진원은 지혁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후에, 바로 회사를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지혁이 오진원이 회사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남게 되었다.
“전 때 되면 갈 겁니다.”
“진원아.”
오 부회장은 오진원을 답답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 회사가 남의 거냐?”
“······.”
“그렇게 자꾸 네 생각만 하지 말라고.”
이기적이라는 말.
오진원은 순간 뜨끔했다.
“개인적인 감정도 있지만, 난 도저히 오지혁이 되는 꼴은 못 보겠다.”
“······.”
“이번이 기회야. 걔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법과 여론을 어쩌겠냐. 시판품 조사에 걸리면 못 피해.”
오 부회장은 힘주어 말했다.
“아니, 형이 절대로 못 피하게 할 거야. 이 일로 오지혁이 힘 좀 빼놓은 다음에, 네가 우뚝 서자.”
오진원은 그래도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죠. 생각 없다는데 왜 자꾸······.”
총수에 대한 뜻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진원!”
오 부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뜻 모르겠냐?!”
“······.”
“모르는 거냐. 모르는 척하는 거냐?”
오진원은 입을 꾹 다물고 듣기만 했다.
“아버지가 널 괜히 선도전자 대표이사로 보냈겠어? 어?! 고집 좀 그만 부려라.”
오 부회장은 핏발 선 눈으로 계속 말했다.
“네 부모와 형제보다 오지혁이 더 중요하냐? 걔가 도대체 너한테 해준 게 뭔데?”
“······.”
“그리고 네가 걔보다 부족한 게 뭐야? 전 직원이 사랑하는 리더고, 나 있을 때보다 선도전자에서 성과도 더 잘 내고 있잖아.”
오 부회장은 자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도 오진원을 설득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어떻게든 지혁을 막고 싶었다.
“너도 윤리경영위에서 봤잖아. 걔가 아버지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 안 나?”
“······.”
“끝까지 모른 척할래!”
기억한다. 왜 기억을 못 하겠는가.
그때 지혁을 말렸었다. 이렇게는 하지는 말자고.
‘아버지······.’
지혁이 사정없이 몰아붙일 때, 넋 나간 얼굴로 당하고 있던 오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오진원의 동공이 흔들렸다.
***
선도물산 대표이사실.
늦은 오후.
출장 후 오랜만에 출근한 날이라, 지혁은 밖에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만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중역 회의 안건들과 KC 사고에 대해서 궁리 중이었는데.
윙-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지혁은 웬만해서는 개인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 경우는 드물기에, 곧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오지혁 대표님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만, 어디십니까?”
[반갑습니다. 산업부 장관 임영일입니다.]
지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장난 전화로 생각했다.
“어디라고요?”
[산업부 장관이요.]
“장관이 왜 나한테 전화할까? 내 번호 어떻게 알았죠?”
보통은 장난 전화라면 바로 끊지만, 지혁은 자신의 신분과 번호를 알고 있는 발신자의 출처를 알아야 했다.
[······네?!]
“빨리 대답 안 하면, 말 곱게 안 나갑니다.”
장관은 당황했다.
[구, 국가전력 홍우석 부사장한테 받았습니다.]
“홍 부사장님?”
출처에 신빙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장관이라고?’
지혁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히 말했다.
“산업부 장관님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저 진짜 장관이에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장관님. 전혀 생각을 못 하여서······.”
[하하하.]
전화기 너머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네요. 비서실 통해서 연락드릴걸. 오해할만했죠. 하하.]
아무리 지혁이라도 국가의 장관이다.
어느 정도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쩐 일로······.”
[아~ 요르단 원전 건으로 오 대표님 덕을 제가 많이 봐서요. 축하도 드리고, 감사하다는 말씀 직접 전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께 감사 인사는 전했는데. 오 대표님이 너무 궁금해서 말이에요. 하하.]
“네······.”
세상, 참 별일이다 싶었다.
‘이것 참······.’
생각했던 것보다 ‘요르단 원전’의 파급력이 커서 최근 계속 놀라는 중이었다.
[언제 시간 내서 방문 한번 해 주세요. 뵙고 싶네요. 그리고 뭐 도움 청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네, 장관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화이팅입니다~ 하하.]
뚝.
전화가 끊은 뒤.
피식.
지혁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밖은 어둑해졌고.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었다.
잔여 업무도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집에 가기가 허전한데.’
지혁은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진원 형님 뭐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