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롤 모델
날벼락 맞은 듯한 표정.
좀 전까지 황 팀장에게 기세등등하게 대들던 김 과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저도 자격 없냐고요.”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지혁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
옆의 황 팀장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고.
김 과장은 여전히 대꾸하지 못한 채, 생각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
황 팀장과는 완전히 다른 상대.
그룹에 소문이 자자한 비서실장이었고, 지금은 선도물산의 대표가 되어 그의 앞에 서있다.
지혁은 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좀 전까지 말씀 잘하시더니, 왜 대답을 안 하세요? 비서질이나 하고 온 저도 대표이사 자격 없냐고 묻잖아요.”
“······.”
“계속 대답하지 않는 건, 긍정의 뜻이라고 보면 되나요?”
그제야, 김 과장은 다급하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지혁은 싱긋 웃었다.
“아, 그럼 저는 괜찮아요? 그럼 김 과장님은 대표이사보다 생산팀장이 더 어려운 자리라고 여기시는 건가요?”
김 과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하지만 지혁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 황 팀장님이 마음에 안 들어요?”
옆에 있던 황 팀장이 얼굴이 굳어졌고. 김 과장은 계속 아무런 말을 못 했다.
“내가 주제넘다고 생각해서 대답을 안 하는 건가? 도대체 저 누구랑 대화하나요? 이 정도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그 말 들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황 팀장님이 마음에 안 드냐고 물었어요.”
“······.”
김 과장은 또 대꾸하지 못했고.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좀 전엔 뭐였던 거지. 할 말 잘하시던데.”
“······.”
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알겠다. 저한테 태도가 달라지시는 거 보면,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시나 봐요.”
“네?”
“고승윤 차장님이라고 아세요?”
김 과장이 고 차장을 모를 리 없다.
생산팀은 개발팀과 업무 연관성이 높으며, 고 차장은 지랄을 잘하기로 회사에서 유명한 사람이기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분 밑에서 일해보실래요?”
김 과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 차장을 아는 직원들은 알고 있다. 그 사람 아래서 일하면 엿된다는 걸.
“생산과 개발은 업무 연관성도 있으니까. 팀 이동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니 대안을 제시해 주잖아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언행에 조심하겠습니다.”
“김 과장님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리더와의 궁합도 중요해요.”
“죄송합니다.”
고 차장 밑으로 가란 말이 나온 후부터, 김 과장은 계속 죄송하다고만 했다.
***
고 차장이 저승사자라도 되는 양, 김 과장은 팀 이동만큼은 막기 위해 무조건 죄송하다고 했고.
“하······ 참. 대표이사로서 힘 좀 써주려고 했더니, 한사코 사양하시네.”
키득.
다른 생산팀 팀원들의 숨죽이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그러니까, 강한 리더십을 원하지 않는다면요.”
“······.”
“황 팀장님한테 잘하세요. 이런 분 없습니다. 제가 친해서 잘 알아요.”
대표이사가 일개 팀장에게 친해서 잘 안다고 말했다.
둘 사이를 웬만한 직원들은 다 알고 있지만, 이건 완전히 편들어 주는 거였다.
‘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어?’
김 과장은 둘이 가까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표이사가 생산팀에 온 지 어느덧 10여분 정도 지났고.
이제 생산 1팀만이 아니라, 주변 부서에도 모두 지혁과 김 과장을 집중하고 있었다.
-와······ 황 팀장님 끗발 장난 아니네.
-괜히 그룹 비서실 갔던 게 아니었구나.
-전에도 두 분이 친하긴 했어.
지혁은 주변 반응을 살핀 후, 김 과장에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회사생활에 높은 뜻이 있다면, 황 팀장님에게 잘하는 게 좋겠죠. 특히, 제가 대표로 있는 동안은요.”
회사에서는 일머리 못지않게 정치도 중요하다.
줄을 어디로 서야 할지, 명확하게 알려준 거였다. 정치는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황 팀장은 선도물산 권력의 핵인 지혁과 연결된 동아줄이니까.
“알겠습니다. 경솔했습니다.”
김 과장은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고.
지혁은 황 팀장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팀장님, 바쁘세요?”
지혁이 친근하게 황 팀장을 대하자, 주변은 다시 한번 수군댔다.
-황 팀장님 너무 좋겠다.
-회사에서 겁나는 게 없겠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나가서 저랑 바람이나 쐬고 옵시다.”
팀원들과 주변 부서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지혁은 꽤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지금은 좀······.”
황 팀장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표정이 어딘가 좀 불편했는데.
지혁은 그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저는 바람 꼭 쐬어야겠는데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 팀장은 챙기기에. 불편한 표정의 이유를 들어보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황 팀장은 그를 곧바로 따라 나가려다가······.
툭.
김 과장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서 자리로 가서 일 봐. 좀 전의 일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
둘이 아지트에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선도물산에서 일하는 공간이 멀어졌기에, 얼굴을 볼 일이 자연스럽게 적어졌다.
“진짜, 펴도 돼요?”
황 팀장은 담배를 들고 머뭇거렸다.
‘대표이사 앞에서 담배 꼬나물기가······.’
“에이, 성준이 형. 왜 그래요. 피라니까.”
“네······.”
황 팀장이 깊이 담배를 뿜어내었고.
지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아까, 그 김 과장이라는 사람 뭐예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거였고.
황 팀장은 알아듣고 대답했다.
“전 생산 팀장님의 오른팔이었어요.”
“아······.”
“느끼셨겠지만, 성과욕도 자존감도 강한 친구거든요.”
“······.”
“제가 생산팀으로 갑자기 돌아와서, 자기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뭐······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 수 있겠네요.”
황 팀장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나이는 저와 같구요. 경력도 비슷해요.”
“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벨이 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은 같은데 자신보다 직급도 높고, 생산팀에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상급자로 온 거네요.”
“네······ 그래서 저도 이해합니다. 아주 심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마는데. 오늘은 선을 좀 넘었죠.”
지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침, 그걸 제가 봤고요.”
“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 방향을 향해 다양한 사람들을 이끌고 가야 하는 거······ 그게 어려운 법이죠.”
“······.”
“그냥 확 휘어잡으세요. 아랫사람들 감정까지 다 신경 쓰면 황 팀장님이 힘들어집니다.”
“네~ 그러려고 노력 중입니다.”
황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리더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대표님 모습 떠올리면서 하고 있거든요. 가장 인상적인 리더의 모습이었어서요.”
“······.”
“대표님처럼 강하게 나가보려는데, 쉽지 않네요. 예상은 했었지만. 하하.”
지혁은 좀 전에 생산팀에서 봤던 황 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좀 불편하더라도 필요한 말은 조곤조곤 잘했었지. 그러다가, 김 과장이 들이대니까······.’
황 팀장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은 사람이다. 아랫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니 바로 움찔한 거였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마다 특성이 있어서, 제 방식이 황 팀장님께 맞을지 모르겠네요.”
“······,”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건데.”
“네.”
“마인드가 중요해요. 필요하다 싶을 땐 질러버리고요. 다음을 생각하면 안 돼요.”
“아, 다음을 생각하지 말라.”
황 팀장은 핸드폰을 꺼내어 기록했다.
“받아적으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전 중요합니다. 요즘 최대 고민입니다. 어떻게 팀원들을 리드해야 할지.”
지혁은 또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를 롤모델로 삼으셨다고 하니, 좀 더 자세하게 설명 드려볼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흠······ 예를 들어서.”
지혁은 좀 전의 생산팀 상황을 떠올렸다.
“아까 김 과장이 황 팀장님께 하던 거 있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 치켜뜨고 대들었던 거요.”
“네.”
“그 상황에 제가 만약 황 팀장님이었다면요.”
황 팀장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는데.
“씨발, 눈깔아.”
.
.
.
“바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황 팀장은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롤모델을 잘못 잡았네.’
“회사에선 직급이 깡패라는 말 들어봤죠? 아랫사람이 건방지게 나오면, 들이 까는 거죠.”
“그러다가 싸움 나면 어떡해요?”
“싸움 나면 싸우는 거죠. 씨발.”
황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그리고 절대 싸움 안 나요. 눈 깔라는 말 한마디에 바로 깨갱 할걸요?”
“감사합니다.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거봐요. 생각보다 간단하죠.”
황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단한 일이었어. 사람이 자기 성향에 맞게 살아야지.’
황 팀장은 생각이 정리된 후, 지혁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그리고 대표님.”
“네.”
“오늘 고마웠습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행동은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표님 없으면 힘 못 쓰는 팀장으로 비치긴 싫습니다.”
“······.”
이 말은 들으니, 아까 황 팀장이 왜 불편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안심도 되었고.
‘괜한 우려였구나. 잘하시겠네.’
지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 주 주말.
토요일 오후. 지혁은 집에서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TV를 보다가,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고.
“아차.”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드륵- 달칵!
[여보세요?]
“어머니~ 아들입니다.”
[어~ 지혁아.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요. 안부 연락드린 거죠.”
[내가 내 아들을 모르냐? 무슨 일이냐?]
지혁은 안부를 확인하고 싶을 때는 집으로 찾아간다.
어머니께 전화한다는 건 용건이 있을 때였다.
“흠! 어머니, 추석 때 큰집에 인사드리러 가야죠.”
[이거였냐?]
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명절엔 왜? 네 큰형 염장 지르려고?]
어머니는 윤리경영위 사건은 모르고 있다. 그건 수아도 모른다.
“이제 왕래하는 사인데, 명절에 당연히 큰집에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틀린 소리는 아니라서, 어머니는 잠자코 있다가.
[명절 때 가면 회장님 형제들 있을지도 모를 텐데?]
“뭐, 그럼, 인사드리는 거죠.”
오 회장의 형제들은 제원그룹, 세계그룹 등 재계 여러 곳에 퍼져 있다.
[왠지 불안한데.]
“하하. 불안해 마세요. 그리고 큰형과도 자꾸 봐야 가까워지죠.”
오 부회장과 가까워져야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더 말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명절에 가는 걸로 알면 되는 거니?]
“저희 가겠다는 걸 어머니께서 큰집에 연락해주셨으면 해요. 우리 집 큰 어른이시니까.”
[너, 뭐 있구나?]
지혁은 평소에 이런 부탁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요즘 좀 불편한 게 있네요.”
어머니는 싱긋 웃고는 대답했다.
[알았다. 엄마가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