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싫어서가 아니야 (2)
‘이게 뭔 소리야?’
회의실 밖으로 향하던 김 부문장의 걸음이 멈추었다.
‘네버랜드 해외 진출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지혁과 미래 전략 관련하여 몇 번 얘기를 나눴었지만, 이건 금시초문이었다.
“아이디어 단계라서, 아직 부문장님께도 말씀드리진 않았는데요. 어쨌든, 전 네버랜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네버랜드가 디주니랜드 되지 말란 법 없잖아요.”
“······.”
최 부회장은 지혁을 바라봤다.
딱 봐도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느껴졌다.
“네버랜드를 해외로? 디주니랜드처럼?”
“네.”
김 부문장은 나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최 부회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죠? 미래기획실이 공상이나 듣자고 여기 방문한 건······.”
“당연히!”
순간 지혁의 얼굴이 굳어지며, 최 부회장의 말을 끊었다.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하는 소리 아니죠. 당연한 말씀은 하실 필요 없어요.”
“······.”
최 부회장의 미간 주름이 더 굵어졌다.
‘이런 비상식적인 얘기가 진심이라고?’
그는 지혁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이왕 말 나온 거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구상 단계라는 건 참작할 테니까요.”
“뭐가 궁금하신데요?”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공상이 아니라면, 최소한 타겟은 있겠죠? 해외 어디를 생각하는데요?”
지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동남아입니다.”
“동남아?!”
“네.”
최 부회장은 눈을 끔뻑이다가 되물었다.
“태국, 캄보디아······ 뭐 이런 곳에 네버랜드 만든다고요?”
“정확합니다. 현재 구상이 그렇습니다.”
최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1인당 GNI(국민총소득)가 낮을 텐데? 세계 평균은 되려나?’
최 부회장은 지혁이 지금 진심인 건지 아직도 헷갈렸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에 테마파크를 만들다니. 그룹 비서실장까지 한 사람이 그 정도 상식은 있을 텐데.’
지혁은 곧바로 부연 설명을 했다.
“아, 물론 동남아 국가 중에서도 인구수와 소득이 높은 국가로 해야겠죠. 베트남과 태국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부문장도 들으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그게 될까? 쉽지 않을 텐데.’
“하하.”
최 부회장이 웃었고, 그 옆에 오진원도 따라 웃었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이건 안 되는 일인 거 같은데요?”
하지만, 지혁은 웃지 않았다.
“전 진심인데요.”
“그게 될 거로 생각합니까?”
“안 될 건 또 뭐 있습니까?”
최 부회장을 바라보는 지혁의 눈이 매서웠다.
“모든 일은 된다는 가정하에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조사하고 수익성 분석하고 결정 내리는 거죠.”
옆의 오진원이 최 부회장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쟤 빈말 안 하잖아요. 뭔가 있어서 하는 말이겠죠.”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흥미로운 눈으로 지혁을 봤다.
“이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마련된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소비’
이 단어를 적은 뒤 말했다.
“아무래도 1인당 GNI를 생각하신 거 같은데.”
정확한 지적에 최 부회장은 움찔했고.
지혁은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베트남 : 2,639달러’
‘태국 : 6,988달러’
보고 적은 게 아니다.
더듬거림 없이 한숨에 적어서,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최 부회장은 이 모습도 유심히 관찰했다.
지혁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나라 1인당 GNI는 3만 5천 달러 정도 됩니다. 베트남, 태국과는 차이 크게 나죠?”
“······.”
“오진원 대표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응? 네?!”
가만히 있다가 지목받은 오진원은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돈 많으면 많이 씁니까?”
“······.”
“그걸 필수 관계로 볼 수 있습니까?”
“글쎄요······.”
오진원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 사실 돈을 잘 안 써서 돈이 많은 경우가 많거든요. 부자라고 해서 꼭 돈을 잘 쓰는 건 아니죠.”
“네.”
지혁은 최 부회장을 보며 말했다.
“그게 꼭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돈 없어도 잘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국민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작년에 회장님 모시고 함께 하노이 출장 갔던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죠.”
“저는 그때 베트남에 고급 백화점이 그렇게 많은 걸 보고 놀랐거든요. 호찌민은 더 하다면서요.”
“그렇······ 죠.”
지혁은 출장 중 이동할 때마다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옷차림, 관계, 음식 등.
“그리고 고급 레스토랑에 갔을 때도 그 안에 있는 테이블을 다 살펴봤는데.”
“······.”
“그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을 갖춘 손님들이 반이 넘었습니다.”
최 부회장의 눈이 점점 커졌다.
“길거리에 사람들을 봐도요. 연인들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고, 아낌없이 뭔가를 해주려 하더군요.”
“아니······ 언제 그런 걸 다 살핀 거야?!”
듣다가 최 부회장은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주변과 사람을 관찰하는 습성.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돌다리도 두드려야 했고.
평범해 보이는 모든 걸 의심하며, 살얼음 걷듯 살아야 했다.
눈이 4개는 달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건 지혁에게 생존본능이었다.
“그냥 보여서 봤습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잘 먹고 잘 쓰는 사람 많던데요?”
최 부회장은 묘하게 설득력 있는 그의 말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곧바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통계자료를 잘 살펴보면.”
“전 제 눈을 믿습니다.”
지혁은 본인의 눈과 귀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자료는 참고만 할 뿐.
지금까지의 회사생활도 그렇게 해왔고, 결과는 다 좋았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이 곧 ‘비즈니스 감각’이 되었다는 걸, 지혁도 이제 잘 알고 있다.
“전 베트남의 소비력을 봤습니다.”
지혁은 윤 실장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괜찮잖아요? 한국인에 대한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네, 한류 덕분에 우호적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덧 꽤 가능성 있는 일로 비치고 있었다.
***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선도물산의 경영보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고.
오로지 지혁과 윤 실장만 멀쩡했다.
윤 실장과는 사전에 나눴던 얘기였다.
“오 대표님. 말씀 잘 들었고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지혁은 최 부회장에게 말했다.
“네, 부회장님. 말씀하십시오.”
“베트남 출장 갔을 때, 선도물산을 염두에 뒀던 건가요?”
단순히 뇌피셜이라고만 보기엔, 꽤 촘촘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다니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을 머릿속에 저장해 둔 거죠.”
“······.”
“제가 본 건 기억을 잘하는 편입니다.”
“흠······ 그냥 무심결에 봤던 걸 기억하고 이렇게 연결시킨다라······.”
최 부회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지혁에게 또 한 번 놀랐다.
‘이 친구가 감각이 있네.’
이전까지는 공격적이며, 일 처리 빠르고 나이에 비해 통찰력이 있는 젊은이 정도로 생각했었다.
‘수익을 만들어 내는 비즈니스 감각이······.’
이건 그룹 비서실장으로서는 보여주기 힘든 능력이긴 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혁이 더 대단한 인물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이야. 사람을 제대로 봤구나.’
새삼, 그를 회장 후보로 추대한 게 다행이라 여겼다.
윤리경영위에서 오 부회장과 오 회장을 향해 막싸움을 벌이는 걸 보며, 우려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들었었는데.
지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이디어 단계고요. 시장조사 이후 수익성까지 분석한 뒤에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들어갈 겁니다.”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김 부문장은 뜨끔했다.
‘큰 일거리 하나 생겼네.’
지혁은 김 부문장을 바라봤다.
“부문장님, 보고 준비가 다 됐습니까?”
“네? 아, 네.”
김 부문장은 네버랜드 해외 진출 얘기 듣느라, 회의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간단하게 보고하시죠.”
“네.”
김 부문장은 앞으로 나가, 발표를 시작했다.
“리조트 부문은 브랜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브랜딩이 곧 수익이다.’라는 구호 하에 움직이고 있는데요. 우선 국내 첫 자연 번식 판다인 '포바오' 캐릭터 브랜딩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려와 달리 김 부문장은 술술 잘 발표했다.
“만화 캐릭터화 및 성장 과정을 영상화하여, 랜선 육아 콘텐츠로 고객 친밀도를 높이는 전략입니다.”
“호오······.”
랜선 육아 콘텐츠란 말에 최 부회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고, 자신감을 얻은 김 부문장은 열정적으로 발표를 이어갔다.
“기저귀, 아동복, 문구, 식·음료 기업들과 협업한 상품 또한 펼쳐 보일 건데요. 이 또한 수익보다는 브랜딩으로 집중을······.”
약 10여 분간 진행한 리조트 부문 전략 발표는 깔끔했고.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
회의가 끝난 후.
“오 대표. 차 한 잔 줘.”
최 부회장이 지혁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했다. 그 옆에 오진원도 있었다.
“차요?”
지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식사를 해야죠.”
“아, 그럴까?”
경영보고를 끝난 후, 최 부회장은 후련한 기분이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일까, 오진원도 좀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시간도 늦은 오후로 잡았는데.”
마침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가시죠.”
사랑산성 레스토랑.
오혜진과 만나는 곳인데, 내곡동에 있는 식당이라 강남역에 있는 선도물산에서 가기가 편했다.
“와~ 여기 좋다.”
최 부회장은 처음 와본 듯 두리번거렸고.
지혁은 오진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형님은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응? 아니?”
“정말요?”
“어, 처음이야.”
지혁은 생각했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오혜진과 회동한 적이 있는지 관찰한 거였다.
덜컹.
밀폐된 룸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뒤.
“다들 잘 지내신 거죠?”
지혁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선도물산에서 편안히 맞아주던 오지혁 대표가 아니었다.
최 부회장의 표정이 굳어졌고.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형님!”
지혁은 오진원을 불렀고.
그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으응?!”
“잘 지냈는지 묻잖아요.”
“어, 잘 지냈지.”
“좋은 일 생겼는데, 동생 불러서 밥 한 끼 사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선도전자 대표이사 발령을 말하는 거였다.
“아,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 정신없었거든. 너도 바빴잖아.”
오진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 봤으면 됐지 뭐.”
지혁의 눈이 빛났다.
“회장님은······ 잘 지내세요?”
“······.”
오진원의 눈이 커졌고.
최 부회장도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오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형님~”
지혁은 웃으며 오진원을 바라봤는데.
오진원은 시선을 피했다.
“그럼 형님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요?”
“······.”
“형님의 아버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