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91화 (191/301)

191.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

오 회장은 지금까지 오 부회장 외에 다른 후계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이실 만한 제안이라고 보는데요.”

지혁은 망설이는 오 회장을 압박했다.

‘능력은 인정하지만, 경영자로서 보여준 게 있는가.’

오 회장이 한 말을 받아친 것.

즉, 경영자로서 능력을 보일 테니, 공평하게 평가해달라는 거였다.

“말뿐이셨고, 역시 친아들 아니면 안 된다는 건가요?”

“······.”

“요즘 직원들도 꽤 혼란스러워합니다. 전 포기할 생각이 없고요.”

지혁과 오 부회장과의 후계 경쟁.

엄밀히 말하면, 경쟁이라기보다는 다툼에 가까웠고.

점점 개싸움으로 변질하여 가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이 갈만한 일은 없었어도, 불안감이라는 게 있다.

실력자 간에 모든 걸 걸고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회사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저와 오 부회장. 각자 열심히 회사 일하고, 잘한 사람이 선택받으면 되는 겁니다.”

말만 들어서는 공평해 보이나.

오 회장으로서는.

‘내 걸 가지고 왜 그런 도박을 해야 하나.’

억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조건을 달고 잘하면 달라는 거였으니.

합리적인 강도질이나 마찬가지였다.

내키진 않아도, 지금 그의 말을 단칼에 거절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마.”

오 회장 나름으로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아니요. 당장 약속을 해주셔야 합니다.”

“뭐?”

“대중의 전파력은 무시 못 합니다.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를 그대로 두면 하루 이틀 사이에도 어떻게 퍼질지 모릅니다.”

오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이 자식이 협박하네?’

“빨리 결정을 해주셔야, 조치를 취해도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

“늦어지면 저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들불이 번지면, 소방차가 와도 막을 수 없다.

‘하아······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오 회장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그래, 알았다.”

오 회장은 지혁의 제안을 수락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진양이 일부터 무마시켜라.”

“······.”

“그거 제대로 정리 안 되면, 그땐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오 회장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그 눈빛을 받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죽을 각오로 정리하겠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에게 약속받았으며, 평행선을 달리던 대화는 결국 접점을 찾았다.

두 사람은 이제 좀 숨을 골랐다.

20여 분 정도 말 몇 마디 나눈 거지만, 사력을 다한 거였다.

“회장님, 저 내일 연차 좀 쓰겠습니다.”

“그래라. 나도 내일 쉰다.”

지혁이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생각해 둔 자리는 있냐?”

세부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어도, 오 회장은 지혁이 요청한 자리로 이동시켜야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 인사는 지혁의 뜻이고, 오 회장이 받아들인 거니까.

“내일 쉬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어차피 다 계획되어 있는 거 아니야? 왜 뜸을 들이고 그러냐?”

지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획된 거 아닙니다. 계획이 수정된 거죠.”

“······.”

오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했다.

‘이것도 기만인가? 수정된 계획이 이렇게 앞뒤가 맞는다고?’

“우선 지금 나가서 진양 형님 건 빨리 정리하고. 이틀 뒤에 제 인사이동 건 보고드리겠습니다.”

흠······.

오 회장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

***

그날 밤.

지혁은 수아와 함께 캠핑카를 끌고 동해로 갔다.

지혁은 푹 쉬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밤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 오전.

지혁은 수아와 해변을 걸었다.

“자기야. 가끔 이런 것 좀 해. 너무 좋잖아.”

“그래?”

“응! 어제 갑자기 연차 내라고 해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깜짝 여행이라 그런가? 너무 재밌네.”

“하하. 알았어.”

“근데, 일 중독자 오지혁이 웬일이래?”

어젯밤 지혁은 밤 10시쯤 집에 와서는 바로 동해로 가자고 했었다.

“이 좋은 캠핑카를 썩히는 것 같아서.”

“호호, 뭐야.”

지혁은 ‘그 세계’에서 돌아온 뒤로, 어머니 댁에 갈 때만 간혹 캠핑카를 썼다.

복직 후, 이 차로 여행을 와본 건 처음이었다.

“난 뭐······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일부러 안 쓰는 줄 알았지.”

“안 좋은 기억?”

지혁은 수아를 꼭 안았다.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이 차 안에서는 자기랑 항상 좋았던 추억뿐인데.”

수아는 지혁이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이 캠핑카로 여행을 다니며 마지막을 준비했었다.

그녀는 지혁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 말 진짜지?”

“그럼~”

수아는 지혁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제 얘기 좀 해 봐. 자기 무슨 일 있지?”

“음?”

“딱 보면 알거든?”

지혁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먼바다를 보다가.

“나 회장 되고 싶다고 했잖아.”

“응.”

“그것 때문에 회사가 좀 시끄러웠는데. 어제 정리가 됐어.”

수아는 눈이 커져서 지혁을 바라봤다.

“설마······ 진짜 회장 되는 거야?!”

“하하, 아니.”

후유-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아니고.”

“······.”

“테스트를 거치기로 했어.”

“와······ 대박.”

수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큰아버님이 후보자로 인정했다는 거잖아.”

“뭐, 그런 셈이지.”

수아는 새삼 지혁을 바라봤고.

“내 남편이지만······ 참 대단해. 아니,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동물원 구경하듯, 보지 말아줄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난 드라마에서도 이런 건 못 본 거 같아.”

“원래 현실이 더 드라마가 같은 법이거든. 하하.”

두 사람은 해변을 거닐었다.

지혁은 쉬면서도 어느 계열사로 가야 할지,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계속 고민 중이었는데.

모래성을 만들고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아이의 모래성은 조잡하며 무너지기 쉬워 보였고.

다른 아이의 모래성은 그에 비해 견고했다.

나란히 앉아서 모래성을 쌓는데, 그 차이가 재밌어서 지혁은 유심히 바라봤다.

‘어?’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했고, 약하게 모래성을 쌓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얘, 너는 왜 그런 건조한 모래······.”

“아저씨!”

견고한 모래성을 쌓던 아이가 일어나서, 지혁을 잡아끌었다.

“어?”

“왜 방해하세요?”

“뭘?”

“지금 시합 중이라고요.”

“시합?”

둘이 모래가 달랐다.

견고한 아이가 쌓고 있는 모래성은 물기가 충분했고.

다른 아이의 모래는 건조했다.

즉, 서로 나란히 앉아서 모래성을 쌓지만, 토양이 달랐다.

“이거 반칙 아니냐?”

“아닌데요. 자리는 본인이 정하기로 했고, 전 이겨놓고 만드는 것뿐이에요.”

“이겨놓고?”

“네, 아저씨가 쟤한테 힌트 주면 그게 반칙이죠.”

미련하게 무너지면 또 쌓고, 또 쌓고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좋지 않은 조건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래, 그냥 뻔뻔하게 가자.’

아이들의 모래성 쌓기를 보며, 지혁의 고민은 멈추었다.

결국엔, 간단한 거였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나와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돼.’

***

다음 날 아침. 미래기획실장실.

지혁이 들어오자마자, 최 부회장과 오진원이 달려들었다.

“아유! 비서실장 어서 와봐.”

“지혁아! 뭐야?! 말도 없이 연차를 쓰고.”

지혁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진원 형님이 제 상급자예요? 보고하고 연차를 쓰게?”

“너도 참······ 꼭 말을 해도.”

오진원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시종일관 자신의 위치를 인식시키는 게 참 집요해 보였다.

“어서 앉아. 어서.”

최 부회장은 지혁에게 소파에 빨리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날 어떻게 된 거야? 궁금해 죽는 줄 알았어.”

오 회장과의 대화 이후, 전화기까지 꺼놓고 하루를 쉬었다.

지혁의 거취가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생각 정리 좀 하느라. 회장님과는······.”

지혁은 오 회장과 합의된 내용을 알려주었고.

최 부회장과 오진원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하긴······ 비서실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지.”

“그래, 지혁아. 차라리 이게 잘 된 거 같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절 후보자로 인식했으니까요. 충분히 수확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 부회장이 말했다.

“맞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 너무 급격하게 뒤집으면 부작용 생겨.”

오지원은 짧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다. 지혁이 자주 보기 어렵겠네.”

현실적으로 최 부회장과 오진원을 데려가긴 어려웠다. 둘 다 현재 직급이 대표이사급 이상이니까.

그런 사람을 대표이사의 아랫사람으로 쓸 수는 없다.

지혁은 웃으며 오진원을 바라봤다.

“형님, 내심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응?”

오진원은 속마음을 들킨 듯, 깜짝 놀랐다.

“에이~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하하. 뭘요. 딱 보니까, 맞구만.”

옆에서 눈치 주고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 사라지니,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라니까~”

최 부회장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

선도본관 근처의 스터디 카페.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라서, 회사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밀폐된 회의실에 한 남자가 들어오자.

“오셨습니까.”

먼저 와있던 5명의 남자가 일어섰다.

지혁라인.

그룹 비서실 의전팀 황성준 차장

그룹 비서실 의전팀장 윤현성 부장

선도물산 인사실장 허용호 이사

선도물산 생산 1팀장 하재웅 부장

그룹 비서실 지원팀 고승윤 차장

“안녕하세요.”

지혁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인사실장님과 생산팀장님은 오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지금 근무시간이며, 강남에 있는 선도물산에서 종로의 선도본관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하하, 비서실장님이 부르면 무조건 와야지요.”

인사실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고.

생산팀장은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팀장이 외근 나간다는데, 눈치 줄 사람은 없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실장에게 말했다.

“오 부회장 건은 잘 정리하셨죠?”

이틀 전,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의 오 부회장 이슈가 잠잠하게 하라고 지침을 줬었다.

“네, 카코야끼 씨한테 그날 바로 연락했고요. 장작 넣는 거 멈추고 다른 자극적인 이슈들 뿌리면서, 오 부회장 이슈는 묻히고 있습니다.”

“네.”

지혁은 다섯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도물산에서 이후로,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처음이네요.”

“······.”

“근데, 앞으로 뵐 일이 많을 겁니다.”

‘음?’

지혁라인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윤 팀장님!”

지혁의 부름에 윤 팀장은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응? 네?”

지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상품기획 아직 안 까먹었죠?”

“네? 당연하죠. 20년 가까이한 일인데.”

“황 차장님과 고 차장님도죠?”

두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갑자기 이걸 왜 물어보지.’

지혁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틀 전에 회장님과 깊은 얘기를 했는데요.”

“······.”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혁의 안광이 빛났다.

“저는 선도물산 대표이사로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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