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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80화 (180/301)

180.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

“Pardon?”

(뭐라고요?)

톰쿡은 당황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답변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뉘앙스여서······.

“대표님, 제가 예시를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

“제가 만약 대표님께 선도전자로 와달라고 하면······ 어떠시겠어요?”

톰쿡은 눈이 동그래져서 지혁을 바라봤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기업 총수보고 이직하라고?’

지혁은 톰쿡의 반응을 보며 웃었다.

“톰쿡 대표님께 제안받았을 때, 제 기분이 딱 그랬습니다.”

톰쿡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오 회장 조카라서 그런 건가요? 가족 경영해야 해서?”

“아니요.”

“······.”

“방금 예시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전 선도그룹의 회장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지혁은 숨기지 않았다.

고민하고 망설일 시간은 지났으며, 이젠 밀고 나가야 한다.

더욱이 선도전자의 가장 큰 경쟁사의 수장에게 이 인식을 심어주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

톰쿡은 공항에서의 분위기, 특히 오 부회장을 만났을 때 지혁과의 은근한 신경전을 떠올렸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어.’

톰쿡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였군요.”

“······.”

“거기까진 몰랐네요. 우리 정보력이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내부적인 일이니까요. 아시기가 어려웠겠죠.”

선도그룹 내부적으로 쉬쉬하는 일이며, 직원들도 분위기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톰쿡은 피식 웃고는 잔을 들었다.

“제가 우스운 말을 했군요.”

“괜찮습니다. 몰라서 그러신 거니까요.”

짠.

둘은 술잔을 들어서 잔을 부딪쳤으며.

톰쿡은 뼈있는 말을 했다.

“그리고 제가 실수했네요.”

“뭐가요?”

“괜히 비서실장님께 나와달라고 한 것 같아요.”

“······.”

“개인 시간 좀 만들어서 환심 좀 사보려고 한 거였는데.”

지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괜히 경쟁자에게 힘 실어준 격이 돼버렸네요.”

이때 톰쿡은 눈을 빛내었고.

지혁은 웃으며 그의 이마를 보았다.

‘빨간색 사람답다. 겉보기엔 온화해 보여도 확실히 열정이 있어.’

톰쿡은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그런 푸근한 외모와 달리, 목적을 위해 주변의 여러 반대도 무시하고, 피치사에 대응할 사람으로 지혁을 직접 지목하였으며.

경쟁사 임원에게 저녁에 따로 보자며 제안하고, 만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목적을 얘기했다.

열정적이며, 자신에게 이득 되는 상황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

‘빨간색’ 성향을 지닌 사람다웠다.

그룹의 수장답게 그 모습을 잘 감추고 있으나, 이마를 보였으니 지혁에겐 숨길 수 없었다.

“하하.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지혁은 웃으며 대답했고.

톰쿡도 입꼬리를 올렸으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

“어쨌든, 지금 중요한 만남이 되었네요?”

톰쿡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피치사 대표님과 이렇게 개별 시간 갖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톰쿡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우리 비즈니스 얘기 좀 합시다.”

지혁에게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 사라졌으므로, 톰쿡은 본색을 드러내었다.

“앞으로 선도그룹을 어떻게 이끌 생각인가요?”

“하하, 저 아직 회장 아닙니다.”

“아직 아니지만, 하실 거잖아요.”

“······.”

그는 지혁의 목표를 들은 후.

선도전자 청주공장에서 직원들이 지혁을 바라보는 모습, 미국에서부터 봤던 그의 성향 등을 짧은 시간 동안 종합적으로 판단했다.

오 부회장은 오 회장의 친아들이며, 장남이라는 결정적인 유리함이 있지만.

톰쿡이 만약 배팅한다면, 지혁 쪽이었다.

‘한국식 오너경영 문화는 어떨까.’

잘은 몰라도 미국과는 다를 것이며, 변수가 전혀 없을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톰쿡은 본인이 본 눈을 믿었다.

“나중에 회장이 되시면 우리 회사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는 건 어떠세요?”

“네?”

지혁은 황당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멀리 있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나서는 톰쿡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혁은 눈을 가늘게 떴고.

톰쿡은 웃으며 말했다.

“아, 물론 경쟁 분야에 대한 파트너십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

“선도전자에서 저희에게 여러 가지를 납품하잖아요. 특히 반도체요.”

“······.”

“저희는 가까운 미래에 반도체 수급난이 일어날 거라고 보고 있거든요.”

지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감탄했다.

‘처음부터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눌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순발력이 좋을까.’

확실히 기업의 수장답게 수가 높다고 생각했다.

지혁의 잠재적 가치를 보고, 먼저 할 수 있는 건 해놓으려는 거였다.

“물량 할당에 대한 파트너십을 약속해 주시면, 제가 물심양면으로 비서실장님의 영전을 돕겠습니다.”

“······.”

“아, 물론 비서실장님의 자리를 담보로 뭘 하려는 건 아닙니다. 반도체도 제값 주고 살 생각이고요. 가격이 오르면 오른 만큼 지급할 거예요. 일 순위 수급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톰쿡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려운 거 아니에요. 비서실장님 입장에서는 득 보시는 게 훨씬 더 많고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가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지만······.

“싫습니다.”

대답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쟁사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선도그룹 비서실장으로서의 의리?

그딴 게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경쟁자의 관계에서는 주도권을 뺏기면 안 돼.’

‘그 세계’에서 살아남은 지혁의 신조 중 하나였다.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끌려다니는 상황은 절대로 만들면 안 된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발목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머지않은 미래에 다 뒤질 거라고 예상하며 살아가는 지혁으로서는.

이런 약속은 정말 무의미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혁의 칼 같은 대답에 톰쿡은 좀 민망해졌다.

“뭐 이렇게 단칼에.”

“불편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서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톰쿡을 향해, 지혁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저에게 보여주신 우정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만약 미래에 반도체 수급난이 온다면······.”

톰쿡은 집중하여 지혁의 말을 들었다.

“톰쿡 대표님이 보여주신 이 우정은 분명 다른 회사와의 차이점이 될 겁니다.”

“······.”

“지금은 이렇게까지 밖에 말씀 못 드리지만.”

지혁은 편안한 미소로 말했다.

“기대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지혁은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확답은 아니지만, 이 진중한 남자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것만으로도 톰쿡은 만족스러웠다.

“네, 고맙습니다.”

그는 잔을 들며, 말했다.

“비서실장님 위해 건배할게요.”

“하하. 네. 톰쿡 대표님을 위해서도요.”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

“자기야~ 나왔어.”

톰쿡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꽤 길어졌고.

집에 오니,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오, 온종일 영어를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네.’

지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

거실에 불도 꺼져 있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엔, 아주 늦은 시간만 아니면 수아는 항상 현관 앞까지 나와서 지혁을 맞아준다.

수아를 불렀다.

“자기야~”

그때 방에서 하얀색 긴 잠옷을 입은 수아가 나왔는데.

스르륵-

너무 조용히 움직여서, 걷는 게 아니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왔어?”

“어, 자고 있었어? 내가 괜히 불렀나?”

“안 자고 있었어.”

“아······ 그래.”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지혁은 살짝 긴장했다.

톰쿡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는데.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는 마누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씻고 잘까?”

지혁이 일어서며 말했는데, 수아는 짧게 한마디 했다.

“다시 앉아.”

“어.”

곧바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르륵-

수아는 지혁의 옆자리에 앉은 후, 물었다.

“자기 나한테 뭐 할 얘기 없어?”

“무슨 얘기?”

“······.”

수아는 한숨을 짧게 쉬고는 말했다.

“TV에서 봤어.”

“아······.”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랬어?”

“그랬냐고?”

“응?”

“왜 말 안 했어?”

지혁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회사 일인데, 얘기해야 해?”

“내가 바본 줄 알아?”

“······.”

“자기 지금 뭐 하고 있지?”

지혁은 뜨끔했다.

‘귀신 저리 가라네.’

“그냥 단순한 회사 일이야? 선도그룹 대표로 톰쿡 마중 나간 일이?”

단순한 일이 아니다.

지혁은 그로 인한 여러 파급효과를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지만.

수아의 이런 반응까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회사생활에 목표가 있다는 말 몇 번 한 적이 있지?”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는데.”

“······.”

“그룹 회장을 해보려 해.”

부릅!

수아의 눈이 빠질 듯 커졌다.

“뭐, 뭘 한다고?”

“그룹 회장······.”

지혁은 잘못한 아이처럼 기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우리 집 여자들 앞에서는 기를 못 펴겠어······.’

“아주버님은?”

수아는 오 부회장 걱정부터 했다. 같은 가족이며, 그가 차기 회장이라는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분이 양보한 거야?”

“아니, 경쟁해야 해.”

더 정확하게는 ‘싸움’이지만, 아내 앞이니 순화해서 표현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

“내가 감당할 건 생각 안 해? 몰랐던 건 아니지만, 자기 너무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무슨, 얼어 죽을 그룹 총수야. 자기 돈독 올랐어?”

“······.”

지혁은 잠자코 들었다.

수아는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불안함과 서운함을 쏟아내고 싶어하는 걸 알기에.

그리고 수아가 감당할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 핀잔 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빨리 끝낼게. 미안해.’

수아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혁 뜻대로 할 거라는 걸.

한참을 쏟아낸 후, 수아가 잠잠해졌을 때쯤.

“다했어?”

“······.”

수아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고.

지혁은 웃으며 수아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돈독도 오르긴 했는데, 필요한 일이어서 그런 거야.”

“······.”

“오늘은 늦었고, 차츰 설명해 줄게.”

번쩍!

지혁은 수아를 가볍게 안아 들었고.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이 타이밍에?”

“자기 방금 여전사 같았어. 아주 매력 있어.”

“안 내려놔?”

“못 내려놔.”

지혁은 수아를 안은 채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고.

“야이씨,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지혁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주먹의 세기는 약했고.

말투에는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

다음날.

지혁은 가뿐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그는 몸을 많이 썼을 때가 컨디션이 좋았다. 그렇게 단련되어 온 사람이니까.

전철역에 내려서, 선도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비서실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지혁은 그들을 몰라도, 그들은 지혁을 안다.

길에서 만난 회사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었고.

지혁은 여느 때처럼 가볍게 눈인사하며 가던 길을 갔다.

“안녕하십니까!”

간혹 크게 인사하는 직원도 있어서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쳤는데.

“비서실장님 안녕하십니까!”

반복되는 인사에 고개를 돌렸더니.

“어?”

선도물산 인사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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