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돌려주다 (2)
“그래요? 뭐가 사실과 다를까요?”
지혁은 부드럽게 되물었고.
이형주는 홀린 듯 말했다.
“글 내용에 있는 것처럼 비서실장님은 저에게 잔챙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하하신 적 없고요. 좀 드라이하게 거절하셨을 뿐,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지혁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억하는 것과 같군요. 전 혹시 서로 기억하는 게 다를까 봐.”
여기서 지혁은 또 안광을 쏟아내었고.
꿀꺽.
이형주는 또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사실대로 얘기 안 했다가는 엿 될 것 같아.’
본능이었다.
지혁이 칼을 휘두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걸 느꼈으며.
그와 목숨 걸고 싸울 자신이 없다면,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뭐야······ 블러인드 글 거짓이었어?
-하여간 익명 글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거짓 글이면 악의적으로 비서실장님 저격한 건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형주는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뜨끔했다.
-글쓴이가 여자 맞을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성별도 의심되네.
-말투가 좀 어색하긴 했어.
-요즘 ‘막 이래’, ‘이 지랄’ 이런 거 안 쓰잖아.
지혁은 또한 직원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형주 차장님이 쓴 글은 아니겠네요?”
“네?!”
“기억하시는 것과 다른 글이니까요. 일부러 거짓을 쓰진 않으셨을 거고.”
“······.”
지혁이 아닐 거라며 말은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뉘앙스였고.
이형주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맞설 상대가 아니다.’
두려웠다.
말 몇 마디 주고받은 것뿐인데.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얼마 전 선도전자에서 지원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런 사람을 건드렸냐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어쨌든 말투에서도 불쾌함을 느낄 수는 있는 거죠. 제 태도가 너무 퉁명스러웠다면 다시 사과드릴게요.”
“네? 아, 아닙니다.”
이형주는 황급히 다시 머리를 조아렸고.
짝짝짝.
로비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다른 이들이 봤을 때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블러인드 저격글 받고, 이렇게 처신하는 임원은 처음 봐.
-비서실장님은 확실히 달라.
-멋있어······.
지혁은 이형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주변의 직원들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말했다.
“차장님.”
“네?”
이형주는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몸을 빼지는 못했다.
“얼마 전에 로비에서 저 만났을 때 하셨던 말씀이요.”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절 흠모한다든지, 밑에서 일하고 싶다든지······.”
“아······.”
이형주는 그때 대책 없이 들이대던 모습이 떠올라서, 얼굴이 벌게졌다.
“그 말 진심이죠?”
“······.”
이형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진심이 아니었다고 하면, 거짓말로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의미한다.
지혁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이형주를 보며, 싱긋 웃었고.
“오후에 저와 차 한잔하시죠.”
***
선도전자. 대표이사실.
주간 회의를 마친 뒤, 오 부회장은 추 이사와 독대 중이었다.
“그거 어떻게 됐나?”
오 부회장은 지혁이 이형주 차장에게 공개 사과를 제안한 게 오늘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 회의 중에도 그 일이 신경 쓰여서, 잘 집중하지 못했고.
회의 끝나자마자, 추 이사를 부른 것이다.
추 이사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상대로 끝난 것 같습니다.”
“······.”
“직원들의 오해는 풀렸고요. 비서실장의 신망은 올라갔습니다.”
오 부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형주 차장이 지랄이라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아? 너무 순순히 다 받아준 거 아닌가?”
“이형주 차장이 성급하게 행동했다면, 도리어 역효과만 컸을 겁니다. 비서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리를 만들었을 거고요. 이럴 때는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하여 지나가는 게 좋습니다.”
확실히 추 이사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오 부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각자 생각에 잠겨, 정적이 흐르다가.
“아, 부회장님. 그리고.”
오 부회장이 바라보자, 추 이사가 말했다.
“지원팀장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래?”
오 부회장 측은 그가 이중 첩자인 걸 알면서 모르는 척했었다.
그에게 중요 정보만 흘리지 않는다면, 지혁을 방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스스로 알아채기 전까지는 그대로 두려 했다.
“얼마나 된 거 같나?”
“이번에 이형주 차장 건으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얼마 안 됐네.”
“네.”
오 부회장은 추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조용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눈치도 빠르고······ 추 이사가 일 좀 할 줄 아는구먼.”
“감사합니다.”
최근 중요한 일을 몇 번 같이하면서, 추 이사는 오 부회장의 신임을 쌓아가고 있었다.
비록 이형주 차장 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찌 됐든 계속 똥볼만 차던 오 부회장으로서는 꽤 유의미한 시도였다.
아무리 여론이 다시 좋아졌다고 해도, 비서실장의 이미지는 한 번 깎이긴 했으니까.
한번 인식이 박힌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해명 댓글과 사과 퍼포먼스를 했어도,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즉, 흉터는 남긴 것이다.
“앞으로 이형주 차장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추 이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좀 두고 봐야겠지만, 이번 일로 악의가 생기지 않았을까 판단됩니다.”
“······.”
“꽤 승부욕이 있는 친구거든요.”
“그래?”
“네, 바로는 말고, 약간 텀을 둔 후에 그 악의를 활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자폭조로 써도 괜찮을 것 같고요.”
추 이사는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고.
오 부회장은 그 모습이 약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
오후 3시 59분.
똑똑.
[비서실장님, 이형주입니다.]
지혁은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시간 맞춰서 올 줄 아네.’
오후 4시에 이형주 차장과 비서실장실에서 차 한잔하기로 했다.
지혁은 그를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배신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판사판이야.’
전쟁 중에 가릴 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꺾어낼 생각만 해야 한다. 기호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들어오세요!”
이형주는 굳은 표정으로 비서실장실로 들어왔고.
지혁은 미소로 그를 맞았다.
“어서 와요. 앉으세요.”
“네, 비서실장님.”
이형주가 앉자, 지혁이 물었다.
“차는 뭐로 하실래요?”
“커피 마시겠습니다. 설탕은 필요 없습니다.”
지혁은 생각했다.
‘기호도 확실히 말할 줄 알아. 두루뭉술하지 않고.’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지혁이 커피를 내리려 하자, 이형주가 재빨리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 손님인데.”
잠시 후, 지혁은 커피를 내왔고.
이형주는 굳은 표정으로 커피잔을 받았다.
지혁이 불러서 오긴 했지만, 지금 비서실장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가시방석이었다.
“전 이 차장님처럼 용기 있는 분 좋아합니다.”
“네?”
지혁은 대뜸 고백했고, 이형주는 당황했다.
“그때 로비에서 저 처음 만났을 때 하셨던 말씀이요.”
“······.”
“그거 받아들려는데.”
꿀꺽.
이형주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지혁의 사람이 되고 싶다며, 아주 적극적으로 말했었다.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이슈를 만들 목적으로 접근한 거였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
“혹시 빈말이었나요? 그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형주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새 마음이 바뀌었어요?”
지혁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니면······ 원래부터 진심이 아니었나?”
“······.”
이형주는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사람······ 다 알고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형주와 추 이사가 계획한 모든 일들을 파악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고.
이형주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지혁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어요.”
“······.”
“중요한 건 이형주 차장님이 제 밑에서 일했으면 하는 건데.”
“······.”
“어떻게······ 받아들이실래요?”
이형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저를 어떻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음······.”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선수끼리 간 보지 맙시다. 이 차장님이 제 직속 부하도 아니고, 업무적으로 쓰겠어요?”
“······.”
“차장님만이 갖고 계신 걸 활용하려 하겠죠. 예를 들어, 인맥이라든지······.”
여기까지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이중 첩자로 쓰겠다는 거였다.
오 부회장 측근을 유지하면서, 지혁의 손을 잡으라는 것.
지혁은 오 부회장 측이 이형주와 위험한 일을 함께했기에, 그를 어느 정도는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민되세요?”
“······.”
이형주가 대답 못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지혁이 간단하게 정리해주었다.
“어려울 거 없습니다.”
“······.”
“누가 이길지만 생각하면 돼요.”
이형주는 고개를 들어,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기는 쪽에 서는 게 낫겠죠?”
***
저녁. 방갈로 형태의 레스토랑.
최 부회장, 오진원이 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혁은 약속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났다.
최 부회장은 고개를 저었고.
오진원은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찍 좀 다녀라. 이런 식으로라도 위계질서 티 내야 해?”
오진원의 핀잔에 지혁은 웃었다.
“하하. 티 내야죠. 누가 위인지 확실히 알려주려면.”
오진원은 질린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만 보여줘도 돼. 찔러도 '피'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아.”
최 부회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기다렸다가, 웃으며 물었다.
“비서실장. 이번 일 처리 잘 된 거 같던데?”
오진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그러게. 형도 솔직히 좀 걱정했었는데, 정리 잘했더라.”
‘블러인드 저격 사건’을 말한 거였는데.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되긴요. 최대한 무마한 거지, 어쨌든 스크래치는 갔잖아요. 제가 진양 형님을 너무 낮게 봤었나 봐요.”
지혁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식사가 나왔고.
오진원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뉴페이스가 한 일 맞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진양 형님 수법 같지 않아서, 이렇게 주도면밀한 스타일은 아니거든.”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 부회장이 말했다.
“오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모양이야. 이제 확실히 우리를 인식한 거 같은데.”
“이미 움직였죠.”
지혁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음? 마음이 편해져?”
오진원의 물음에 지혁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웃었다.
“선제공격이 좋지만.
“······.”
“먼저 공격당했을 때도 좋은 점이 있어요.”
최 부회장과 오진원은 식사를 멈추고 지혁의 입을 바라봤다.
“정당방위는 좀 잔인해도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