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62화 (162/301)

162. 권력의지

“갑자기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최 부회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반말이 나왔다.

“들으신 대로예요.”

오진원에게 권력 의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생활 하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너무 빠르지 않아요?”

최 부회장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

“3개월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 중요한 걸 결정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죠.”

오진원은 살짝 미소 지었다.

“3개월 내내 관찰하며, 그 생각만 했는걸요. 지혁이만 봤어요. 형님은 제가 너무 잘 아니까. 뭐, 지혁이가 위험하다고 하는 게 뭔지 살짝 확인만 했고요.”

“와······ 이거.”

잠자코 생각해 보니, 즉흥적인 게 아니었다.

계획적이었고, 좀 전에 얘기한 대로 ‘결심’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최 부회장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래,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

“어느 쪽인데요? 결심이 선 쪽이?”

“······.”

오진원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멈칫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의사를 표현하려니 부담을 느낀 것이다.

“지혁이죠.”

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었다.

오 회장의 핏줄을 거스를 그의 결심을.

“지혁이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

“아쉬운 사람들, 못 받아들이는 분들도 분명 있겠지만.”

“······.”

“회사와 다수를 생각하면, 지혁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사람이니까.”

최 부회장 또한 오 부회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진원이 있다.

오 부회장의 대안이 지혁만 있는 게 아니다.

최 부회장이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있는데, 오진원이 말했다.

“처음엔 경계했어요. 절 찾아온 과정도 그렇고, 하는 소리도 좀 이상하고. 형님이 위험하다느니······.”

오진원은 술술 얘기했다.

“옆에서 지켜보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인은 보지 못하는 걸 볼 줄 아는 것 같더라고요. 비결이 뭔지, 좀 신기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확실합니다. 지혁이는 볼 줄을 알아요.”

그건 최 부회장도 느끼는 바였다.

가끔 지혁의 싸한 눈길을 마주할 때면 속이 다 읽히는 기분이었으니까.

“일하는 모습을 봐도 참 대단하고, 형님이 위험하다는 말도 뭔지 이제 알 것 같고요. 여러모로 봤을 때 지혁이가 되어야 합니다.”

최 부회장은 아무 말 않고 듣기만 했다.

“선도그룹의 복이에요. 지혁이 같은 지도자감이 나타났다는 건.”

“······.”

“설마, 제 말이 틀리다는 말씀은 안 하시겠죠.”

***

최 부회장 또한 오진원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오지혁······ 대단하며, 확실히 난 사람이긴 하지.’

최근에 낙하산 타고 비서실장이 되긴 했지만, 본인의 능력만으로 30세에 팀장까지 올랐다.

업무능력, 정치력, 통찰력, 리더십······.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인재 중의 인재다. 선도그룹에 엘리트들이 모여있는 미래기획실의 실장이 인정할 정도면······.

“틀리지 않죠.”

그러나 최 부회장은 약간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실차장님이 계시잖아요.”

“······.”

“계속 비서실장 칭찬하셨는데, 전 실차장님도 그 못지않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오진원은 싱긋 웃었고.

최 부회장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실차장님은 오 회장님의 친자식이잖아요. 비서실장을 오너로 세운다는 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넘을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오진원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우선······ 저를 그런 인재와 비등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하하.”

오진원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최 부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심입니다. 절대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네네. 알겠어요. 중요한 건, 제겐 의지도 없을뿐더러,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쪽 세계?”

“제 발로 나가서 새 장 밖을 경험한 새는······ 다시 새 장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

“지혁이한테 호기심이 생겨서 잠시 왔을 뿐이지. 전 돌아갈 사람이에요.”

최 부회장이 뭔가 말하려는데, 오진원은 손을 들고 말했다.

“막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저 지난번처럼 소리없이 잠적해 버립니다. 하하.”

최 부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거 참. 오늘 기분 좋았는데.”

토요일 오전.

기분 좋게 골프 치고 그늘집에서 맥주 한잔하다가, 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어쩔 수가 없네. 하여간,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고집은 더럽게 쎄다니까.’

더 이상 오진원을 회유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람 좋게 웃고는 있지만,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지자들이 과연 실차장님 생각을 따라줄까요?”

그룹에는 오진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도 많았지만, 지난 3개월간의 행보로 더 많아졌다.

그에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건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

“그리고 어느 정도 밑작업도 해놨어요. 최근에 항상 함께 다녀서, 지혁이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을 거예요.”

오진원과 지혁은 스타일이 상반된다.

오진원의 부드럽고 편안한 리더십을 선호하는 직원들은 지혁의 강력한 리더십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3개월간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서, 같은 팀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아주 처음부터 계획적이셨구먼. 어쩐지, 왜 자꾸 함께 다니나 했어요.”

“하하, 이미 눈치채셨을 줄 알았는데.”

최 부회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큰 것 준비해야겠네요.”

“때가 됐잖아요. 아버지가 연세가 너무 많으세요.”

“우선은······.”

최 부회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비서실장부터 이해시켜야 해요. 그 친구는 흐름에 쓸려 가는 걸 싫어하는 거 같더라고요.”

오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혁이가 의지만 가져 준다면······ 걱정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최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이런 건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는 것보다 중재자가 나서는 게 나아요.”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 부탁드려요.”

최 부회장은 복잡한 눈빛으로 마냥 해맑은 오진원을 바라보다가.

휴······.

한숨을 쉬었다.

***

회장실.

“이상 일일 보고 마칩니다.”

여느 때처럼 지혁은 오 회장에게 일일 보고를 했다.

“그래, 요즘은 뭐 특이사항이 없군.”

“네.”

“요즘 진원이랑 함께 활발히 다니는 거 같던데. 그 덕분인가?”

오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물었지만.

지혁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 영향도 없지는 않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보통 드러나지 않는 위험이 크게 다가오거든요.”

오 회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늙은이 같다니까.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걱정이 많나?”

“여러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있다면, 항상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 회장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건 뭐, 농담도 못 하겠네. 하하. 하여간 자네 덕분에 요즘 내가 아주 편해.”

“······.”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주게.”

“그럼,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오 회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지혁은 회장실 밖으로 나왔다.

위이잉-

그때 진동음이 울렸고.

최 부회장에게 온 메시지였다.

[내 방으로.]

똑똑.

덜컹.

미래기획실 실장실.

최 부회장 혼자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십니까?”

최 부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지혁에게 말했다.

“문 꽉 닫아주게. 블라인드 내리고.”

“네? 아, 네.”

지혁은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고는 시키는 대로 했다.

블라인드까지 내리자, 최 부회장이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네.”

최 부회장은 지혁 맞은편에 앉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선수끼리 뜸 들이지 말자.”

“네?”

“할 얘기 있어서 불렀고, 자네에게 선택권은 없어.”

“뭔데 그래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최 부회장은 주변을 한번 돌아본 뒤.

“회장님 연세가 많아.”

“······.”

“자네가 다음 회장 하게.”

.

.

.

.

지혁은 황당해하다가,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뭐요?!”

“밀어줄게.”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뭔 말인지 몰라?”

“아놔. 황당하네.”

웬만한 일에는 눈도 끔뻑 안 하는 지혁도 지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도 할 말이 따로 있지. 대뜸 저보고 뭘 하라고요? 참나.”

최 부회장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미 우리는 결정했어.”

“우리가 누군데요?”

“자네를 회장으로 만들 사람들.”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요?”

“대화 시작하기 전에 말했지. 자네에게 선택권은 없다고.”

“······.”

“그래도 사전 통보는 해주잖아.”

곰곰이 듣다 보니, 지혁은 황당함에 이어 조금씩 불쾌감이 밀려왔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당사자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실차장, 나, 배후세력, 그리고 실차장님과 자네를 지지하는 직원들.”

“······.”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지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배후세력은 뭡니까?”

“자네가 얼마 전에 만난 노 부회장님 같은 분들.”

“······.”

지혁은 생각했다.

‘원로들을 말하는 거군.’

최 부회장이 말했다.

“그럼, 가장 첫 일정으로.”

“싫어요.”

“뭐가?”

“회장 하기 싫다고요.”

지혁을 바라보는 최 부회장이 눈이 커졌다.

‘이 자식이······.’

“뭐가 어째?”

“회장 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지혁의 목적은 오 부회장이 회장이 못 되게 하는 거였지, 자신이 회장 자리에 앉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오 부회장을 대신할 적임자인 오진원이 나타난 마당에, 오 회장의 적자도 아닌 자신이 나서고 싶진 않았다.

‘만약 대안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회사 일 때문에 아내와 어머니에게 제대로 신경 못 쓰며 지내고 있다. 권력 투쟁까지 하게 되면 더 정신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가정을 못 돌보는 건 싫었다.

“그럼 오 부회장더러 후계를 이으라고?”

“그 사람은 안 되죠. 실차장님 있잖아요?”

“안 한다잖아!”

최 부회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것들이 다들 왜 안 한다고 난리야. 기업 총수가 우스워?’

오진원의 행동까지 떠오르면서, 최 부회장은 짜증이 확 올라왔다.

“실차장님을 설득하셔야지. 왜 저한테 난리세요.”

“······.”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서운 눈으로 지혁에게 말했다.

“회장 안 할 거면.”

“······.”

“퇴사해라.”

“뭐요?!”

***

[누구 맘대로 하라 마라예요!]

[야! 나 그룹 부회장이야! 어디 비서실장이 목소리를 높여!]

최 부회장실에서 들리는 고성 소리에 미래기획실은 얼어버렸다.

지금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두 분이 왜 그러실까.

-아······ 괜히 불안하다.

-그러니까, 그룹 최고 실세 두 분이 왜······.

최 부회장과 지혁.

두 사람이 격돌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의외인 건.

비서실장이 부회장실에서 고성을 지르고 난리 치고 있지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새 비서실장이 그룹 서열 2위에 비빌 정도가 된 것이다.

-두 분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에이, 설마······ 잠깐 저러다 마시겠지.

-그렇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