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쌍두마차 (2)
“제 말이 틀린지, 직원들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들을 계속 쏟아내었다.
“머지않아 그룹의 위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릴 겁니다.”
오진원이 웃으며 말했다.
“비서실장님이 나름 회사를 진단하고 계시나 보네요?”
“네. 전 회장님을 보좌해야 하니까요. 제대로 알아야 보좌를 할 거 아닙니까.”
오진원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선도증권뿐만이 아니라, 그룹의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는 거죠.”
“네, 조만간 보고하려고 자료수집 중입니다.”
꿀꺽.
‘자료수집’이라는 말에 선도증권 대표이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람은 도대체가······ 회사 생활 좀 편하게 하면 안 되나. 왜 잘나가고 있는데 난리야.’
그룹 대부분이 성과급 잔치로 난리였고.
지혁이 만 명 앞에서 칼춤 추었던 간담회 덕분에 직원 복지도 좋아졌다.
“경영자들과 시스템이 변했으니, 이제 직원들도 변해야죠.”
어느덧 선도증권 경영보고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얘기되고 있었고.
완전히 지혁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표님.”
지혁의 부름에 대표이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선도증권이 앞장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뭘요?”
“위기를 피하지 않고, 인식하는 모습으로요.”
“······.”
대표이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기가 인식되어야 인식하든가 말든가 하지. 도대체 뭘 보고······.’
지혁은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인식이 안 된다면, 제가 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지혁이 관여하겠다는 말에, 대표이사는 곧바로 대답했다.
“위기관리대응반을 신설하여,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점검부터 해야겠죠.”
“물론입니다. 특별 진단팀을 가동하여, 바닥부터 위까지 샅샅이 훑겠습니다.”
오진원은 처음엔 경각심 차원에서 이러나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지혁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좀 과한데. 도대체 뭘 보고 이러는 걸까.’
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표이사에게 말했다.
“잘 준비하시면, 비바람을 피해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지혁이 말을 멈추고 자리에 앉자, 회의실 내부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대표이사는 눈치를 보다가 지혁에게 물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실차장님께 여쭤보셔야죠.”
“죄송합니다.”
대표이사는 이래저래 쩔쩔매었고.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이상 마치도록 하시죠. 아, 그리고 비서실장님이 건의하신 대로 대표님 연임하시는 걸로 회장님께 말씀드릴 테니······.”
대표이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실차장님!”
짝짝짝.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실차장이 건의한다는 건 이미 결정되었다는 거였고.
대표이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마워해야 할 분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은데.”
대표이사는 처음에 이 얘기를 꺼낸 지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비서실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해하실 거 없습니다. 나중에 절 미워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
오진원은 그런 지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참 까칠하다. 까칠해.’
그렇게 회의는 마쳤고.
지혁이 먼저 회의실을 나간 뒤, 오진원도 따라 나가려는데.
“실차장님.”
대표이사가 그를 불러세웠다.
“네?”
“좀 전에 비서실장이 압박해서 대답하긴 했는데······ 위기관리대응반 가동해야 할까요?”
“······.”
“아무래도 팀 신설하면, 기존 팀에서 인력을 빼야 해서요. 지금처럼 성과 잘 나오고 전혀 문제없는 상황에서 직원들을 설득하려면······.”
오진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비서실장이 얘기한 대로 하세요.”
“······.”
그리고 살짝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앞으로는 비서실장이 지시한 일에 대해서는 저에게 되묻지 말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이후에도 오진원은 지혁을 자주 불렀다.
특히 외부 일정이 있을 때는 꼭 지혁과 함께 다녔는데.
자기 일도 아닌 것에 자꾸 불려 다니는 게 귀찮아서, 지혁이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형이 회장이에요?”
“뭐?”
“전 회장님 비서실장인데, 왜 자꾸 절 달고 다니려고 하죠?”
“하하.”
“아~ 나중에 회장 하시려고 그러나?”
지혁이 은근슬쩍 떠보면, 그는 웃으며 말했다.
“보면 알아. 다 형님의 깊은 뜻이 있다.”
지혁은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뜻은 얼어 죽을. 다 나 시켜 먹으면서.’
실제로 그랬다.
도대체 누가 실차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오진원은 가만히 얼굴마담으로 앉아 있고, 각 관계사 사장들은 대부분 지혁이 상대했다.
한번은 지혁도 짜증 나서 입 다물고 있어 보려 했으나.
‘막상 눈앞에 보이는 걸,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모른 척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단, 아니다 싶은 건 까고 봐야 했다.
오진원이 회사에 돌아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고.
생각지 못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룹 전체에 퍼져 있는 오진원의 사람들이 지혁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분 다른 듯하면서도 잘 어울려.
-블랙 앤 화이트 같다고 할까.
-실차장님이 인정하는 분이라면······.
-좀 날카로워서 그렇지, 비서실장님 괜찮은 분일 줄 알았어.
오진원의 사람들은 꽤 많았다.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지지하고 기다려온 직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건, 지혁 또한 오진원과 함께 다닐 때마다 느끼고 있었는데.
‘이래서 오 부회장이 견제했던 걸까.’
오진원의 등장으로, 직원들 사이에 오 부회장 외에 없을 줄 알았던 대안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갔고.
지혁은 자연스럽게, 왜 오 부회장이 오진원을 찾으려 했는지, 왜 그를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변화도 있었는데.
“비서실장님,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직원들의 밝은 인사 속에서 분위기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그들이 지혁에게도 기대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이 계속 함께 다니며, 좋은 모습을 보이니.
지혁과 오진원은 한 팀처럼, 동일시되고 있었다.
실차장 오진원을 지지하는 세력
비서실장 오지혁을 지지하는 세력
두 세력은 자연스럽게 합쳐지고 있었다.
***
“팀장니임~!”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지원팀장은 목을 움츠리고 소리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 차장이 호랑이 눈깔을 하고 지원팀장을 보고 있었다.
“왜요······,”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고 차장은 지원팀에 온 지 거의 3개월이 다 되었고, 지원팀장은 완전한 그의 밥이 되었다.
“저보고 또 주말 근무 하라고요?”
“힘들겠어요?”
“팀장님은 뭐 하시고요.”
“나야······.”
“팀장님은 자리만 지키면 되는 사람입니까?”
고 차장이 소매를 걷어붙이려 했고.
지원팀장은 식겁했다.
‘또 털리기 싫어. 차라리 엿 같은 직장 상사를 두는 게 낫지.’
부하 직원을 상사처럼 모시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최소한 교대 근무는 비슷하게는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저녁과 주말 타임에는 팀장님 근무 시간이 빠져 있을까요.”
‘젠장······ 차라리 의전팀이 나았어.’
이젠 팀장이 되어서, 주말 근무까지 할 참이었다.
“아, 알았어요.”
틀린 말은 아니기에 반박은 하지 못했다.
“더 얘기 안 해도 됩니까?”
“네.”
“그럼, 알아서 하십시오.”
“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지원팀장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부서 이동 요청할까. 팀장이 부서 이동을 요청하기도 참······.’
팀장급은 팀 이동하기가 어렵다. 팀원으로 가지 않는 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원팀장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고 차장 자리에 있었던 부하직원이 그리웠다.
'떠나지 않게 잘해줄걸······.'
타인에게 했던 걸 똑같이 당해봐야, 자신의 했던 짓을 기억한다.
지혁은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지혁라인과는 못 해도 이틀에 한 번은 만나고, 사소한 얘기도 다 하니까.
여느 때처럼, 비서실에 모인 ‘지혁라인’ 네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하하, 너무 잡는 거 아니에요?”
지혁이 웃으며 이렇게 묻자, 고 차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저 같은 부하 직원을 만난, 그 사람 복이지요. 전 일 똑바로 하는 사람한테는 까칠하게 안 굽니다. 제가 비서실장님이나, 윤 부장님께 그렇게 대한 적 있습니까?”
윤 부장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초면엔 그랬죠.”
“그땐 탐색하던 시기라 그랬던 거고요. 잘 모르니까.”
윤 부장은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당신의 직속 상사는 되기 싫다. 부하 직원 되는 건 더 싫고.’
고 차장의 활약은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것 같았다.
지혁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고 차장님.”
“네.”
“지원팀장은 그대로 둡시다. 저한테 우호적인 데다가, 차장님께서 완벽하게 컨트롤 하시니까.”
“······.”
“팀장은 나중에 하셔도 되죠?”
고 차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팀장 안 해도 됩니다. 지금도 좋아요.”
지혁은 살짝 미소 짓고는 황 차장을 바라봤다.
“황 차장님.”
“네?”
“나중에 오신 분이 먼저 팀장 되어도······ 괜찮죠?”
황 차장은 윤 부장을 바라본 후.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당연하죠. 무슨 그런 걸 물으세요. 저랑 급이 다르신 분인데.”
“······.”
“윤 부장님이면 무조건 오케이죠.”
윤 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혁을 보았고.
‘뭐야, 이 불길한 기분은 틀린 적이 없는데······.’
윤 부장의 감은 정확했다.
“윤 부장님.”
“나 부르지 마.”
“이번 주에 발령 낼 거거든요? 의전팀장으로.”
황 차장과 고 차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윤 부장을 보았으나.
윤 부장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아~ 왜~”
팀장 시켜준다는데, 윤 부장은 싫다고 난리였다.
“비서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아,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면 안 될까?”
지혁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너무 단칼인데.”
“직급 보조비 많이 드릴게요.”
“하아······.”
윤 부장은 직급 보조비도 달갑지 않았다.
‘이제 업무도 좀 손에 익고, 딱 지낼 만했는데······ 하여간, 이 인간은 여유를 안 줘.’
“부장님은 일 좀 해주셔야 해요.”
“······.”
윤 부장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 쉬며 대답했다.
“알았어······.”
지혁은 황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이 윤 부장님 많이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윤 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윤 부장은 입만 웃었다.
***
[인사발령]
1) 윤현성 부장 : 그룹 의전팀원 -> 그룹 의전팀장
2) 추대웅 이사 : 그룹 의전팀장 -> 선도전자 비서실 팀원
발령받은 날, 추대웅 이사는 오 부회장에게 인사하러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의 첫인사는 ‘죄송합니다’였다.
“휴······.”
오 부회장은 방심하고 있다가 지혁에게 일격을 당했다.
어느새, 선도본관에서의 오 부회장의 입지는 완전히 줄어들었다.
비서실에 심어놓은 사람들은 다 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는 지원팀장인 장남일 이사는 누구 눈치를 보는지, 연락도 거의 없었다.
그룹의 세력 판도는 오진원이 온 이후로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고.
빈틈없이 견고할 것만 같던 오 부회장의 입지에 균열이 보이고 있었다.
“상무 이상 임원급 다 부르세요. 대책 회의하게.”
“네.”
오 부회장은 인상을 쓰고 창밖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형님? 바쁘세요?”
소리가 들린 입구 쪽에.
오진원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