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실차장과 함께
[특별승진]
1) 오지혁 비서실장 : 이사 -> 전무
오진원이 출근한 다음 날.
지혁의 승진 발표가 났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의 승진 퍼레이드.
이제 직원들에게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았다.
지혁은 오너일가이며.
그 전부터도 그들과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걸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서른이 좀 넘은 사람이 전무가 되었음에도, 도리어 제 직급을 찾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의 승진 소식을 접한 비서실 내의 ‘지혁라인’들이 비서실장실로 모였다.
“실장님~ 축하드립니다. 진작 전무셨어야 했는데.”
황 차장의 축하 인사에 지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만 승진해서 미안하네요.”
윤 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와~ 비서실장님 변했네. 처음에 대리 특진했을 때 앞에서 뭐라고 했더라. 기억 안 나지?”
지혁이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윤 부장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지혁 성대모사를 했다.
“다음엔 여러분도 잘하셔서 승진하시죠. 이상.”
황 차장과 고 차장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고, 지혁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별걸 다 기억하시네.”
윤 부장도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기억 못 할리가 있나. 승진 소감을 이렇게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당신 말고 없을걸? 그것도 임원 승진도 아니고, 대리로 승진한 사람이.”
황 차장이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맞아요. 근데, 좀 멋지지 않았어요? 담백하고.”
고 차장도 웃으며 말했다.
“뭔들 황 차장님께 안 멋지겠어요. 비서실장님이 하신 일인데.”
황 차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지혁은 고맙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근데, 비서실장님.”
윤 부장이 지혁을 불렀다.
“네.”
“회장님 조카잖아.”
“그렇죠.”
“이미 사장쯤은 되어야지.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출신도 출신인데다 회사에서도 굵직한 일들 많이 해왔잖아.”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그렇다고 제가 회장님 친아들은 아니잖아요? 이 정도도 빠른 거죠.”
윤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난 속상해. 누구는 오자마자 사장으로 발령 나고······ 뭐 그분이 전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이건 아니라고 봐.”
황 차장도 손을 들고 말했다.
“동감입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공지 메일로 받은 오진원의 인사발령을 떠올렸다.
[인사발령]
1) 오진원 사장 : 미래기획실 차장
회사를 떠나기 전 상무였던 오진원은 ‘사장’직급으로, 미래기획실의 이인자인 ‘실차장’으로 발령받았다.
‘지혁라인’의 눈에는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오 회장 일가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지혁이 묻혀 보이는 게 싫었다.
고 차장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오 회장님이 공정해 보여도, 핏줄은 어쩔 수 없나 봐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
“전 다만, 실차장님이 잘하셨으면 좋겠네요.”
***
미래기획실 차장.
통상적으로 ‘실차장’으로 불린다.
미래기획 실장 바로 아래의 미래기획실 이인자 이며, 사장급이 발령받는다.
선도그룹의 규모가 큰 만큼, 실장과 실차장은 범위를 나눠서 관리한다. 즉, 실차장은 실장의 대리 업무가 아닌, 독립적으로 일한다.
물론, 그룹 전체에 영향이 갈만한 일에 대해서는 실장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한다.
실차장 자리는 1년간 공석으로 있었다.
자리 자체가 주는 무게 때문에 적격자가 없으면 공석으로 둔다.
관계사 대표이사와 비슷한 위치이나, 영향력은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와 파워가 있어야 한다.
전임 실차장이 은퇴한 이후 마땅한 자원이 없어서 공석으로 있었고, 최 부회장이 겸직하고 선임 팀장인 경영진단팀장이 보좌하면서 빈자리를 메꿔왔다.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공석이 채워진 것이다.
300여 명의 미래기획실과 20여 명의 비서실이 선도본관 대강당에 모여, 오진원 실차장을 맞이했다.
[새로운 실차장님 앞으로 모실 때 큰 박수 부탁 드립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직원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오진원! 오진원!
미래기획실 직원들은 한목소리로 외쳤고.
마치 선거 운동 같은 기세에 지혁은 깜짝 놀랐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윤 부장 등 ‘지혁라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진원! 오진원!
-실차장님! 어서 오십시오!
-미래기획실에서 버티길 잘했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흡사, 교주를 맞이하는 신도들 같았다.
지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오진원이 앞으로 나와서 손을 흔들자.
-실차장님! 실차장님~!
-잘 생겼다!
항상 진중하며 조용한 엘리트 집단이 이러니, 더 신기했다.
“아아, 목소리 잘 들리시나요?”
오진원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았고.
-네! 네~!
-너무 잘 들려요!
직원들은 대답에도 열성적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간단한 소감과 포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조용.”
난리를 치던 직원들은 오진원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 하나에, 입을 다물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회사를 떠나 있었는데······ 직원 여러분들이 참 보고 싶었습니다.”
오진원의 따뜻한 목소리가 강당 안을 울렸다.
“절 반겨주시는 모습을 보니, 돌아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짝짝짝.
말하는 중간에 박수가 터져 나와서, 자연스럽게 소감이 끊겼다.
맹신도와 같은 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지혁은 생각했다.
‘어디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절 아는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전 예전과 달라진 거 없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회사생활은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성과 내자입니다.”
오진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회사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건 대부분 사람 때문이죠. 각자 집에 돌아가면 소중한 남편이자 아내, 아들이자 딸인 사람들입니다.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서로 보듬고 사랑하며 지내십시오.”
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지금 교회에 있는 건가.’
“일 때문에 정 괴롭다면 절 찾아오세요. 무엇이든 해결해 드릴 테니까. 회사에서 최고 결정권자가 해결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소신껏 일하고 즐겁게 성과 내십시오.”
대강당 안에는 오진원의 설교에 집중하느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들 은혜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제가 회사에 있는 동안, 저의 일 순위 고객은 무조건 우리 직원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대강당 안은 환호성 소리로 가득 찼다.
지혁은 오진원의 얘기가 너무 신선하게 들렸다.
‘다르다, 이런 경영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근데, 일은 제대로 할까.’
우려스러운 부분에 관해 얘기 나누려고, 옆에 있는 윤 부장을 돌아봤는데.
“와······.”
그의 눈이 하트로 변해있었다.
황 차장도, 고 차장도.
***
“이야~ 실차장님 집무실 좋네요.”
지혁의 말에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지혁아, 그냥 형이라고 해라.”
“회사잖아요.”
“회사가 뭐? 회사에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거야? 홍길동전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
지혁은 오진원의 말이 재밌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형님, 홍길동전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게 그거지 인마. 뜻이 통하잖아. 유두리가 없어.”
오진원은 지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흠칫!
지혁은 놀라서 순간 몸을 움찔했다.
오진원의 온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어머니께 남동생 갖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는데.”
“······.”
“너 있으니까 좋다. 어릴 적부터 알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부드러운 미소.
오진원은 한없이 편하고 따뜻하게 대하지만, 지혁은 이런 모습이 이상하게도 어렵게 느껴졌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결국 경쟁해야 할 사람이라서일까.’
킹메이커가 주시하고 있는 두 남자.
두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비교선상에 놓여 있다.
“난 너 때문에 회사에 왔고, 앞으로도 너 따라갈 거니까.”
“······.”
“책임져라?”
“무슨 소리세요. 저보다 직급도, 직책도 모두 높으신 분이.”
오진원은 미소로 대답했고.
타닥! 타닥!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높은 사람이 왔는지, 실차장실 밖에서 직원들이 크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생각지 못한 인물이 들어왔는데.
“진원아.”
오 부회장이었다.
“형님?”
“야, 이 녀석아······.”
그는 말을 잇지 못했고.
지혁은 황당한 눈길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올 줄은 알았지만, 진짜 빨리 왔네.’
오진원이 복귀한 건, 인사발령과 함께 오늘 오전에 알려졌지만,
오 부회장은 어제 늦게, 오 회장과 미팅 중이던 선도카드 대표로부터 이 사실을 접했다.
덜컹!
그때 또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님도 오셨네?”
오혜진 사장.
그녀는 집무실에 오 부회장과 지혁이 있는 걸 보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정말 고마운데요. 바쁘신 분들이 이렇게 직접 오셔서 저의 복귀를 반겨주시고.”
오진원은 웃으며 하는 말에, 오 부회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진원아, 왔으면 형한테 먼저 연락해야지.”
“네, 오늘 연락드리려 했어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는 오 부회장 성향답게, 옆에 누가 있건 말건 대뜸 말했다.
“선도전자로 와라.”
“네?”
지혁도 황당해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오늘 발령받은 사람한테 바로 이동해달라니.
“와서 형 좀 도와다오.”
“갑자기 뭐예요.”
“요즘 괜찮은 사람이 없어서, 경영하기 힘들다.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더더욱 제가 가면 안 되지 않아요? 이제, 막 복귀했고 감도 떨어져 있는데.”
“잔말 말고 와라. 너만 괜찮다면 인사조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오혜진 사장이 나섰다.
“진원이는 원래 보험, 증권 쪽이 전문 분야잖아.”
“뭐······ 전문이라기보다는.”
“누나랑 선도생명에서 공동 경영하는 게 어때?”
지혁은 두 사람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대뜸 함께하자는 말부터 하니.
‘뭐 때문일까?’
그건 차츰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눈에 거슬렸기에 한 마디 던졌다.
“우애가 보기 좋네요. 몇 년 만에 만났는데, 함께 일하자는 말부터 하고.”
“······.”
“잘 지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안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 부회장과 오혜진 사장의 얼굴이 불편해졌다.
정확히 어떤 의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용하려는 속이 뻔히 보였었고. 지혁이 그 부분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아주 급했나 보다.”
“조용히 안 해?”
오 부회장이 험악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어딜 감히, 형제들 대화하는 데 끼어들어?”
지혁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굉장히 불쾌한 발언인데.’
피치사 소송 전 이후부터, 지혁은 오 부회장을 피하지 않는다.
한마디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오진원이 나섰다.
“형님,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지혁이도 같은 형제인데요.”
“뭐가 같아? 아버지가 다른······.”
오진원은 손을 살짝 들었고.
거짓말처럼.
제멋대로인 오 부회장이 말을 멈췄다.
“와주신 건 감사한데, 업무를 시작한지 얼마안되서 신경 써야 할 게 많거든요.”
오진원은 부드럽게 두 사람을 보내려 했다.
“집에서 봬요.”
“진원아, 네 보직은······.”
오진원은 오 부회장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이동할 의사 없습니다.”
“······.”
“됐죠?”
오진원은 두 사람을 무시하고, 지혁에게 말했다.
“지혁아, 이쪽으로 와봐. 선도증권 건으로 너랑 상의할 게 있어.”
오진원은 보고서가 쌓여 있는 집무 책상 앞에 앉았고.
지혁을 향해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