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이런 색이 있었어? (2)
‘이렇게 갑자기?’
최 부회장 또한 하고 싶은 말이었고, 타이밍을 보고 있었으나.
지혁이 이 얘기를 이렇게 빨리 꺼낼줄은 몰랐다.
만난 지 이제 약 2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다.
어찌 됐든, 최 부회장으로서는 원하던 얘기가 나왔으므로, 오진원의 반응에 집중했다.
“네가 왜 그런 말을 하지?”
오진원은 멈췄던 젓가락질을 다시 하며 물었다.
“내가 회사에 가는 걸 왜 네가 얘기할까? 좀 주제넘은 거 아니니?”
부드러운 말투 속에 묵직함이 있었다.
지혁은 이런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제가 그룹 비서실장이잖아요. 회사의 미래와 안위를 생각해야 할 위치에 있어요.”
“그런데?”
“형이 오 부회장보다 좋은 사람 같아요.”
“······!”
오진원은 눈을 부릅떴고.
최 부회장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돌직구도 이런 쌩 돌직구를······.’
연애로 치면, 생판 처음 보는 여성한테 괜찮아 보이니 결혼하자며 프러포즈하는 것과 같았다.
“하하. 참나.”
오진원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지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일은 참 잘하나 보다. 그렇지?”
“네?”
“이렇게 어리숙한데, 비서실장으로 있는 거 보면 말이야. 얼마나 일을 잘하면 그러겠어.”
“······.”
지혁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어리숙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이런 무시 받는 듯한 용어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오 부회장이 심한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그의 경계심 때문에 들은 말이었다.
처음 본 사람인 경우, 지혁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을 함부로 못 했는데.
오진원에겐 그런 게 없었다. 진짜 친척 동생 대하듯 말했다.
“주변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회사에 돌아가서 할 게 없어. 그러니까, 큰형님과 날 비교할 필요가 없다.”
지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봉사활동을 했었다고 했지.’
“저를 돕는다고 생각하고 오면 안 돼요?”
“널 도와?”
“네.”
오진원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널 돕는 것과 회사로 돌아가는 게 무슨 상관이냐?”
***
“회사와 직원들을 생각하는 게 제 뜻이니까요.”
최 부회장은 옆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회사를 대하는 지혁의 생각을 알아볼 기회였다.
지금까지는 지혁의 업무적인 퍼포먼스만 지켜봐 왔다.
“회사와 직원들을 생각한다······.”
오진원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회사와 직원들을 위해서, 큰형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건가?”
“네.”
“너무 위험한 발상 아니냐?”
오진원은 지혁을 보며 물었다.
“네가 뭔데,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거지? 뭐, 그래, 비서실장이란 자리가 대단하긴 하지. 그렇다고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자리는 아니잖아?”
“······.”
“그리고, 너 오늘 나 처음 보지 않았니?”
“네.”
“뭘 보고 확신하냐?”
오진원은 지혁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큰형님은 옆에서 꽤 지켜봤겠지. 하지만, 나에 대해선 뭘 아냐고. 뭘 보고 나한테 그런 위험한 말을 하는 거냐?”
최 부회장도 지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진원을 오랜 시간 봐왔고, 그의 품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기다렸다.
하지만 지혁은 오진원을 잘 모른다. 오늘 처음 봤다. 아무리 전해 듣는 얘기가 좋았더라도, 이런 급진적인 선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혁은 지혁 나름대로 고민에 빠졌는데······.
‘세 번째 눈을 얘기할 순 없잖아.’
오진원의 색, 순백색에 섞인 고귀한 골드를 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색을 보고 확신했다고 말했다간, 밥 다 먹었으면 어서 가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다.
“전 제 눈을 믿습니다.”
“뭐?”
모호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확신, 그 진심은 전해질 거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요. 후회 없었어요.”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니?”
“지나고 보면 알 일이죠. 나중에 설명할 날이 올 거로 생각해요.”
“지금 설명하지 그래?”
“결과로 확인되기 전에 설명하는 건 의미 없어요.”
오진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부회장님, 얘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이상하지 않아요?”
“좀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 처리 하면서도 성과를 잘 내더라고요.”
최 부회장 또한 목적이 같기에 지혁의 편을 들었다.
“비서실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 비서실장이 하는 말이 무조건 못 미덥진 않네요.”
오진원은 최 부회장과 지혁을 번갈아 보았고.
“이분들이 진짜. 하하.”
그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회사와 직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쳐. 하지만, 나한테 의지가 없어.”
지혁을 보고 말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니? 형은 지금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고. 걱정거리도 없고. 욕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
지혁은 이 말을 생각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형님, 봉사활동 하셨다고 했죠. 지금도 어찌 보면 하는 중이고.”
“갑자기 봉사활동은 왜?”
“타인을 돕는 게 좋으신 거 아니에요?”
오진원은 지혁이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서 잠자코 보았다.
“선도그룹 직원이 20만 명이에요. 무려 20만 명.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 수준이죠.”
“······.”
“지난 몇 년간 봉사활동 해서 몇 명이나 도우셨어요? 한, 만 명정도 되나요?”
“······.”
“천 명도 안 될 거 같은데.”
지혁은 목소리를 좀 높여서 말했다.
“20만 명이 불행해지고, 위험해 빠질 수도 있다고 하면······ 그래도 모른 척하실 거예요?”
오진원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인드가 강하다는 걸 눈치채고 한 말이었다.
오진원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 정말 확신이 대단하구나.”
“······.”
“그렇게 큰형님이 위험해 보이니?”
“네.”
지혁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색으로도 봤고,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으니까.
오진원은 최 부회장을 바라봤고.
그 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거였다.
오진원은 한숨과 함께 웃으며 중얼거렸다.
“밥이나 먹고 가지, 사람을 홀려 버리네.”
“······.”
“두 분 아주 작정하고 오셨군요?”
가볍게 말했지만, 최 부회장과 지혁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오진원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
“지혁아.”
“네.”
“설거지는 네가 좀 해라.”
오진원은 빈 접시를 모아주며 말했다.
“몇 개 안 돼~”
“전 손님인데.”
“짜샤, 이런 건 막내가 하는 거야.”
“보기와 다르게 꼰대시군요.”
“입 다물고, 어서 해.”
“······.”
그룹 비서실장은 빈 그릇이 올려진 상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진원은 지혁이 들어간 걸 확인한 뒤, 목소리를 죽이고 최 부회장에게 물었다.
“쟤 뭐예요?”
“······.”
“저런 사람 처음 봐요. 최 부회장님은 본 적 있으세요?”
“저도 처음 봅니다.”
“하하.”
오진원은 황당해서 큰 소리로 웃었고.
최 부회장도 따라 웃었다.
“쟤 나이가 몇이에요? 이십 대? 삼십 대?”
“막 서른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 저렇게 젊은 녀석이······ 말하는 게 참······.”
“······.”
“눈빛도 그렇고요. 대화할 때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던데요.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데.”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내 눈을 바라보면 넌 건강해진다고 말해도 믿을 것 같아요.”
“하하. 오 상무님, 농담도 참.”
“정말인데요?”
최 부회장은 잠자코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쨌든 특별한 친구인 건 분명합니다.”
“네, 그건 인정. 보통 놈은 아니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 부회장은 비서실에 온 뒤, 지혁의 했던 굵직한 행적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코엑스에서의 괴한 방어 사건.
베트남에서의 풀바디랭귀지.
전 비서실장을 집으로 보낸 간담회.
간담회를 통한 TF팀 구성. 그룹의 변화.
피치사와의 소송 전을 막는데 일조한 얘기.
.
.
.
.
얘기를 들으며 오진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최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 모든 게 근 반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오진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와······ 정말요? 괴물 아니에요?”
“······.”
“완전 난 사람이네. 하하.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너무 막대한 거 아니에요? 설거지 멈추라고 해야 하나.”
최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친척 동생인데요.”
“아······ 친척 동생. 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사람이기도 하네.”
순간, 오진원의 눈이 빛났다.
“그럼······ 저보다 쟤가 낫지 않아요?”
“······.”
최 부회장은 잠시 뜸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 또한 전혀 생각 안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지혁이는 이미 입증한 거 같은데.”
최 부회장이 말했다.
“어쨌든, 아까 비서실장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선도그룹은 20만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회사고요. 이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직원들의 위험과 안위요?”
최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험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뭐 직원의 처우를 달리 표현한 말이 아닐까요?”
“흠······.”
“일단 회사로 돌아가시죠. 비서실장이 상무님을 보는 것처럼.”
“······.”
“상무님도 비서실장을 직접 한번 보시죠. 어떤 사람인지.”
오진원은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
선도본관 1층 로비.
로비 한편에 외벽 없이 개방된 카페가 있는데.
직원들은 이곳에서 외부인과 미팅도 하고, 차 한잔하면서 머리를 식히기도 한다.
“이야~ 날씨 좋다.”
“실내에 있으면서 뭔 날씨 얘기야.”
“창밖을 봐. 햇살이 좋잖아.”
“그럼 뭐하냐, 우린 출근해 있는데.”
선도본관의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일하는 건 싫지 않은데, 답답해······.”
“맞아. 일은 가끔 재밌을 때도 있지. 막상 회사 안 나가면 심심할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이. 하지만,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참 답답해.”
“그게 월급 받는 자의 숙명 아니겠냐. 무탈하게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두 사람은 자조 섞인 얘기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엇? 비서실장님이다.”
지혁이 게이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와······ 남자가 봐도 멋있어.”
“어딜 저렇게 급히 가시지?”
지혁의 걸음이 빨랐고.
선도본관 1층에 있는 직원들은 모두 지혁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의 명성과 아우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다.
지혁은 현관 밖으로 나간 뒤, 곧바로 한 남자와 같이 다시 로비로 들어왔는데.
전에는 어두운 무대에서 지혁 홀로 핀 조명을 받고 있었다면.
지금은 쌍라이트가 켜진 것 같았다.
쌍라이트는 단순히 1+1이 아니다.
밝기가 합쳐지면서 그 이상의 밝음을 보여준다.
“와······ 저 사람 누구지?”
지혁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부류로 보이는 남자.
지혁 못지않게 시선을 끌며, 빛이 났다.
미간을 찌푸리고 두 사람을 자세히 살피던 직원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중얼거렸다.
“나······ 저분 누군지 알 것 같아.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