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38화 (138/301)

138. 상식적으로 (1)

다음 날 아침.

지혁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회장 대리업무는 비서실장으로서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지만, 지혁은 당연히 처음이며 전임자가 하는 걸 본 적도 없다.

‘완전히 맨땅에 헤딩.’

의전팀장은 지켜본 적이 있을 것 같아서 경험담을 들어보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나네요.’

같이 일해봐서 안다. 의전팀장이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지.

하지만, 지혁의 도움 요청에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막상 아침이 되니 걱정이 몰려왔다.

‘회장님이 의미 없는 일을 시킬 리가 없어.’

이 또한 테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일찍 출근하여 전년도 선도화재 경영 보고서를 살펴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미래기획실로 향했다.

똑. 똑.

[네.]

미래기획실장실.

최 부회장은 놀란 얼굴로 지혁을 맞았다.

“비서실장님께서 아침부터 어쩐 일이신가?”

“안녕하세요.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그룹 비서실장님이신데.”

“······.”

최 부회장은 약간 비꼬듯 말했고, 지혁은 헛기침하고 소파에 앉았다.

“왜 왔어?”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조언?”

“네.”

최 부회장은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얼마 전에 나한테 말하지 않았나? 예전엔 저한테 안 그러지 않았느냐고.”

“······.”

“자네에 대한 내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잘 아는 거 같은데······ 지금 나한테 조언을 구하겠다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도와주지 않으실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찔러는 봐야죠. 아니면 마는 거고.”

“하하, 참나.”

최 부회장은 지혁의 이런 뻔뻔함이 이상하게 싫지가 않았다.

“좋아. 얘기나 들어보지.”

“오늘 회장님 일정 중에 선도화재 경영 보고 건이 있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일정을 소화 못 한다고 어제 오후에 갑자기 말했으며, 자신에게 대리업무를 지시했다고 얘기하였다.

최 부회장은 다 듣고 나서는······.

“그러니까. 관계사 대표이사가 하는 경영 보고를 자네보고 받으라고 했다는 말이지?”

“네.”

‘이 양반이 무슨 꿍꿍이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최 부회장은 오 회장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간혹 비서실장에게 대리업무를 맡기기는 하지만, 관계사 경영 보고까지 맡긴 적은 최 부회장 기억 속에는 없었다.

일정을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나한테 요청했어야 정상인데.’

그룹 이인자인 미래기획실장에게 맡기는 게 정상이었다.

“그냥 피곤해서라는 이유 말고는 없었나?”

“네. 그 말씀 말고는 없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고민에 빠졌고.

지혁은 그의 말을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합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라도 빨리 팁을 좀 얻고 싶었다.

최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회장도 안 해 본 내가 무슨 조언을 하겠나?”

“네?”

“조언을 구하려면 회장님께 했어야지. 나도 몰라. 받아봤어야 알지.”

최 부회장 또한 관계사의 경영 보고를 종종 받는다. 현장 지도로 관계사를 방문하게 되면, 대표이사는 경영 보고부터 하니까.

하지만,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테스트해 보겠다는 거잖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뜻에 부합해 드려야지.’

“경험 있으실 거 같은데?”

지혁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지만, 최 부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몰라. 모르니까, 그만 물어보고.”

“······.”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상식적으로 하면 되지 않겠나?”

지혁은 눈빛을 빛내며 최 부회장의 말에 집중했다.

“보고 잘 듣고, 이해하기 어려운 거 물어보고. 의심스러운 거 물어보고.”

“······.”

지혁은 기다렸지만, 최 부회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게 다입니까?”

최 부회장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까 싶네? 어렵게 생각하면 더 어려워지겠지.”

지혁이 쉽게 나갈 생각을 안 하자, 최 부회장은 돌려 앉으며 말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이만 나가주겠나? 오전에 바쁜 일이 있어서.”

지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가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한 후.

최 부회장은 인사지원 팀장을 호출했다.

“비서실장이랑 항상 같이 다니는 사람 있지? 아, 그래. 황성준 과장. 그 사람 좀 지금 오라고 해.”

***

황 과장이 쭈뼛거리며 미래기획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 뭐 잘못했나?’

겁먹은 얼굴에 다리도 살짝 떨고 있었다.

“미래기획실장님이 찾으셔서 왔는데요.”

“아, 부회장님이요?”

꿀꺽.

‘부회장’이라는 말에, 오금이 저렸다.

“네······ 맞습니다.”

“저기 갈색 문 보이시죠? 거기 들어가셔서 안내직원에게 말씀하시면 돼요.”

“하아······ 네.”

황 과장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어기적거리며 들어갔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어제 승진 소식 듣고 기뻐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 부회장이 자신을 부를 이유는 없어 보였다.

“황성준 과장님이시죠?”

안내직원은 황 과장을 바로 알아봤다.

“네? 그걸 어떻게.”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노크도 없이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황 과장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고, 최 부회장과 마주치자마자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실 의전팀에서 근무하는 황성준 과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어서 와요. 말 편하게 해도 되죠?”

최 부회장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하며 물었고.

황 과장은 공손히 악수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편하게 말씀 주십시오!”

“우리 오다가다 만난 적 있지 않나?”

“네! 부회장님께서는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부회장님을 먼발치에서라도 많이 뵈었습니다.”

최재훈 부회장.

평사원에서 부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선도그룹 샐러리맨들의 레전드.

모든 직원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황 과장은 이런 사람과 독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나도 기억해~ 항상 비서실장이랑 같이 있잖아?”

“네? 하하. 네.”

황 과장은 멋쩍은 듯 웃었고, 최 부회장은 가만히 미소 짓다가 무심한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

“비서실장 행동 상황을 내게 보고해 줄 수 있겠나?”

“하하, 네?!”

황 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듣다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나보고 오 실장님 첩자 노릇을 하라는 건가?’

아무리 최 부회장이어도 황 과장은 지혁이 최우선이었고, 금세 표정이 굳어버렸다.

“이봐, 뭘 그런 표정을 짓고 그러나?”

“······.”

“상급자가 하급자 행동 상황을 보고해달라는 게 이상한 일인가?”

황 과장은 잔뜩 경계한 눈초리로 대꾸하지 않았다.

최 부회장은 이런 황 과장을 보며 생각했다.

‘최측근이 맞군.’

“활약상을 알려달라는 얘기야. 나쁜 의미가 아닐세.”

“······.”

“비서실장이 그룹의 주요 인사로 급부상 중인 건 자네도 알 거고. 난 그 친구가 어떻게 일 처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그래.”

최 부회장은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책잡힐 만한 것을 알려달라는 게 아니라. 잘하는 걸 알려달라고. 음······ 그래. 홍보대사. 비서실장의 홍보대사처럼 말이야.”

나쁜 의미가 아닌 건 이해했다. 하지만 최 부회장은 자기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짐작했기에, 황 과장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제가 부회장님이 지금 요청하신 걸 비서실장에게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최 부회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건 좋을 대로.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좋은 얘기 전하라는 건데?”

“······.”

황 과장은 고민했지만, 최 부회장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 없어. 명령이니까.”

“네?”

“당장 오늘 선도화재 경영보고 건부터 시작하게. 나가 봐.”

***

오후 2시.

선도본관 회장실 내부의 소회의실.

선도화재에서는 대표이사, 전략실장 등 4명이 왔고.

회의실에 지혁과 황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혁이 선도화재 일행에게 인사했고, 대표이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회장님은?”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지혁이 너무 젊다 보니, 안내직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요. 비서실장이 대리로 보고 받기로 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실장?”

대표이사는 또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비서실장님은 어디 계시는데?”

뒤에서 황 과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지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명함을 건네었다.

“처음 뵙습니다. 비서실장 오지혁 이사라고 합니다.”

“아······.”

대표이사는 명함과 지혁의 얼굴을 몇 번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구나. 회장님 조카. 강정철 전무 내보내고 비서실장 자리에 앉은······ 생각보다 훨씬 젊네.’

“실례했습니다.”

대표이사는 다시 인사했고, 지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이니까요. 그러실 수 있죠. 앉으세요.”

대표이사는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낙하산도 보통 낙하산이 아닌데. 무슨 이런 사람한테 경영 보고를 하라고. 회장님이 노망이 드셨나. 대충 빨리하고 가야겠다.’

짜증 섞인 얼굴로 전략실장에게 말했다.

“보고 시작해.”

“제가요?”

‘대표님이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략실장이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자, 대표이사는 다시 말했다.

“뭐해? 어서 하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황 과장은 노트북을 열고 속기할 준비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도화재 전략실장입니다. 경영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이후로, 약 15분가량.

전략실장은 선도화재의 전년 실적과 현재 경영실적 등 전반적인 회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올해 계획과 선도화재의 이슈 사항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했고, 지혁은 이 부분을 특히 주의 깊게 들었다.

모두가 진지하게 경영 보고에 임했으나.

단 한 사람, 대표이사만이 태도가 좋지 않았다.

연신 딴청을 하고, 하품을 하는 등, 빨리 끝내고 가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비서실장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이상 경영보고 마칩니다.”

짝짝짝.

“혹시,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대표이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뭔 질문이냐. 알아야 질문을 하지.’

지혁이 말했다.

“올해 보험료를 인상할 거라고 하셨는데요.”

“네.”

“코로나 때문에 자동차 이동량이 감소한 건 상식적인 얘기인데. 이동량이 감소하면 사고율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

“사고율이 줄어들었는데, 보험료를 인상한다? 소비자들이 이해할까요?”

날카로운 질문에 전략실장의 표정은 굳었고, 대표이사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가던 떡볶이집이 있는데. 물가 오르면 가격 올리고, 물가 내려갈 때는 가격 안 내리면 짜증 나잖아요. 그렇다고 떡볶이를 안 먹을 수도 없고. 안 그래요?”

“······.”

“업계 1등이면 그런 식으로 장사해도 되는 겁니까? 상식선에서 움직여야죠.”

전략실장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어 손해율이 악화하기라도 한다면······.”

“보험사가 소비자를 대상으로 보험을 듭니까? 그 만약을 대비해서 보험료를 인상한다?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

“보험료를 이런 식으로 일괄 올리는 게 최선입니까?”

전략실장은 고민하다가, 뭐라도 답하려 하는데.

“잠깐. 지금부터는 대표님이 답하세요.”

지혁은 손을 들어, 전략실장의 입을 막고 대표이사에게 말했다.

“대표님, 전 여기 회장님 대리로 있는 건데.”

“······.”

“언제까지 구경만 하면서 아랫사람 시킬 겁니까? 회장님 앞에서도 이러세요?”

지혁은 황 과장을 향해 말했다.

“황 과장님. 빼놓지 않고 다 속기하고 있죠?”

“네, 실장님.”

대표이사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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