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체급 차이
업체 선정을 끝낸 다음 날.
생산팀의 하재웅 부장은 비딩 결과를 분석 중이었다.
실제 까놓고 보니, 기존 거래처인 정원피케이의 경쟁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내가 미쳤었지······ 지금이라도 잡아서 다행이야.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이게 맞는 거지.’
이유야 어쨌건 간에, 생산팀의 팀장으로서 가장 경쟁력 있는 업체를 쓰는 게 회사를 위하는 길이다.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오 팀장님께 밥이라도 한 끼 사야지.’
기본을 놓치고 있었는데, 그걸 잡아준 오 팀장이 새삼 고마웠다.
비딩 결과를 덮어 놓고,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위이잉-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조원준 팀장]
상품기획 2팀의 팀장.
지혁이 오기 전까지, 상품기획에서 최고의 에이스로 불린 사람이다.
다양한 업무 지식과 외국어 능력까지 갖춘 출중한 인재.
여전히 빛나는 에이스이지만, 더 큰 빛에 가려져 있다.
‘이분이 웬일이지?’
조 팀장은 신발을 다루는 상품기획이라서, 의류 생산팀장인 그와 업무 연락할 일은 없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생산팀장님. 조원준입니다.]
[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생산팀장은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조 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여보세요?]
[네.]
[하실 말씀 있으셔서 전화하신 거 아닙니까? 너무 조용하셔서.]
[말을 어떻게 전해드리는 게 좋을지, 잠시 생각하느라고요.]
생산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나한테 심각한 얘기할 게 있나? 그럴 게 없는 사이인데.’
[아, 안 되겠네. 완곡히 표현할 말을 못 찾겠어요. 제 스타일도 안 맞고. 그냥 말할게요.]
조 팀장은 뱉듯이 말했다.
[정원피케이 쓰세요.]
.
.
.
.
생산팀장은 방금 얘기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정원피케이? 그게 왜 조 팀장 입에서 나와?’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죄송한데,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정원피케이 쓰시라고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꿀꺽.
생산팀장은 회사생활을 10년을 넘게 했다.
생각지 못한 위협이 목 앞까지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생산팀장은 ‘새파란 색’의 소유자다. 정의에 결벽증이 있는 사람.
두려움을 느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와······.]
수화기 너머로 조 팀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듣던 대로 말이 안 통하는 분이군요.]
***
조 팀장은 혼잣말로 말했다.
[왜 업체를 쓰라고 하는지, 누구 지시인지까지도 알려줘야 하나······]
[······.]
그래도 생산팀장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조 팀장이 힘주어 말했다.
[회사의 지침입니다.]
[지침이라면 공식적으로 공문을 내려주십시오. 아니면 메일을 쓰시든가요.]
[······.]
[이런 지침은 따를 수 없습니다.]
조 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 걸 자기 마음대로도 못 하나요?]
[······.]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으셨을 만한데. 눈치가 없으신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이러시는 건가요?]
생산팀장은 생각했다.
‘자기 걸 마음대로 못 하냐고? 이 일을 지시하시는 분이 오너라도 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오너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뭐, 오너면 어쩌라고. 내가 맡은 일을 하는 건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차에 의한 지시사항이 아니면 따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경우는 더더욱요.]
조 팀장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지만, 괜한 여지를 줄 것 같아서 참았다.
[지금 한 말······ 후회 없으시죠?]
[네, 없습니다.]
생산팀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필요한 일은 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말이 쉽게 안 통할 줄 예상했지만, 기대 이상이네요.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끊을게요.]
뚝.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조 팀장은 전화를 끊었고.
두근. 두근.
생산팀장은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큰 실수를 한 걸까.’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조 팀장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그건 분명 경고의 의미였기 때문에.
멍하니 앉아서 한참을 앉아 있었고.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 지혁이 떠올랐다.
‘도움을 청하세요.’
***
회사 근처의 카페.
지혁은 생산팀장의 전화를 받자마자, 만나자고 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생산팀장이 지혁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팀장님, 어서 오세요.”
생산팀장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많이 놀랐었다는 게 느껴졌다.
“조 팀장이 전화했다고요?”
지혁은 본론부터 꺼내었다.
“네······.”
갑자기 전화해서 불러냈다는 게, 생산팀장은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연락 잘 주셨어요. 제가 전화 달라고 했잖아요.”
지혁이 생산팀장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천천히 얘기해 보시죠. 조 팀장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
“판단은 제가 할 테니까. 사소한 얘기까지 다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생산팀장은 침을 삼키고 생각했다.
‘얘기해도······ 괜찮을까.’
지혁은 생산팀장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한마디 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저 오지혁입니다.”
생산팀장은 고개를 들어 지혁을 바라봤다.
선도물산의 ‘오지혁’이라는 이름.
그거 하나면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무 걱정 말고 얘기하세요.”
“네. 그럼······.”
생산팀장은 조 팀장과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얘기했고.
지혁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던 중, 한 전무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상품본부장 라인은 유 실장이 아니라, 조 팀장이라고 했었어.’
지혁은 이 일의 몸통이 홍 대표라고 믿고 있었다. 송 상무의 라인인 조 팀장의 이름이 거론되니, 더 확신이 들었다.
생산팀장의 얘기를 다 들은 후, 지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말투가 어땠어요? 정중하던가요?”
“정중하긴 했지만······ 깔보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네가 말 안 들으면 어쩔 거냐는 듯한.”
“흠······ 고압적이었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생산팀장은 바투 앉으며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업체선정 하는데, 조 팀장이 왜 관여를 하는 겁니까?”
“······.”
“오 팀장님도 그렇고······.”
생산팀장은 지혁의 눈치를 한번 본 후 말했다.
“이해 안 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혁은 잠시 생각했다.
생산팀장 또한 이미 관여가 많이 된 상황.
“궁금하세요?”
“네. 궁금합니다.”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있으세요?”
“······.”
곧바로 대답하려다가, 생산팀장은 입을 닫았다.
지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있냐고?’
생산팀장은 고민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발주 권한을 가진 생산팀장인데. 당연히 감당해야지.’
“물론입니다. 감당해야죠. 생산팀과 관련된 일인데요.”
지혁은 그의 눈빛을 보고 얘기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았다.
“회사의 뿌리 깊은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
“겨우 박스와 폴리백이지만. 회사를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사안이거든요.”
꿀꺽.
생산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혁이 뭉뚱그려서 얘기했지만, 어느 정도 규모의 일인지는 짐작되었다.
‘어쩐지······ 오 팀장이 나서길래,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는데······.’
지혁은 결정적인 질문을 했다.
“제가 이 일로······ 조 팀장을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네?!”
지혁이 조 팀장에게 접근한다는 것.
그 행위로 생산팀장이 이 모든 일을 지혁에게 말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이는 곧······ 한배를 탄다는 걸 의미한다.
조 팀장의 뒤에 누가 있을지 모르지만, 생산팀장 또한 그를 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네, 만나셔도 됩니다.”
‘이미 한배를 탔어. 고민할 필요 없어.’
생산팀장은 지혁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고.
지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걱정은 마시고요.”
“걱정 안 합니다. 그냥 제 일을 하는 건데요.”
이런 우직함 때문에 지혁은 생산팀장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회사가 생산팀장님 같은 분을 알아줘야 할 텐데.”
생산팀장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못 알아줘도 괜찮습니다. 저 자신에게 떳떳한 게 중요하죠.”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네.”
생산팀장은 헤어지기 전에 지혁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시고. 그저 바로 잡아 주십시오.”
“······.”
“늦었지만, 제 실수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
저벅. 저벅.
자켓을 풀어헤치고.
넥타이를 흩날리며, 지혁은 복도 중앙으로 걸어갔다.
마치 싸우러 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복도를 거닐던 직원들은 이런 지혁의 모습이 불편하여 슬금슬금 피했다.
‘상품기획 2팀’
상품기획 1팀의 이웃 부서. 같은 구역에 있다.
덜컹.
지혁은 거칠게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지혁의 얼굴을 확인한 2팀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당황한 팀원들 사이로 조 팀장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지혁을 주시했다.
“사람 왔는데, 내다 보지도 않아요?”
지혁이 다가가 묻자, 조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오셨어요?”
조 팀장은 앉은 상태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저 만나러 온 건가요?”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이렇게 지혁을 건방지게 대하는 사람은 요즘 선도물산에 없다. 유 본부장도 지혁이 들어오면 칼같이 일어나서 맞이한다.
“네, 조 팀장님 만나러 왔어요.”
“어쩐 일로?”
“그냥 미팅 좀 했으면 해서요.”
“와······ 오 팀장님 너무 예의 없다.”
조 팀장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회사에서 잘나간다지만, 사전 조율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팅하자고요?”
“······.”
“그냥 여기서 하시죠. 최대한 짧게.”
이상하게도 조 팀장은 지혁에게 날이 세워져 있었다.
‘예전하고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지혁이 물었다.
“여기서 얘기하자고요?”
상품기획 2팀 팀원들이 주변에 있었다.
조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왜요? 뭐 비밀 얘기라도 하시려고요? 가만 보면 오 팀장님은 음흉하신 거 같아요. 다른 분들하고도 대화할 때 보면 꼭 몰래 얘기하시더니만. 그렇게 해서 뒤통수치고.”
“하하. 참나.”
지혁은 한참 웃다가 물었다.
“그럼 뒤통수 말고 앞통수 쳐 드릴까?”
지혁은 이런 조 팀장이 가소로웠다.
지금까지 지혁이 선도물산에서 어떤 사람들을 상대해 왔던가.
이건 라이트급이 헤비급에 엉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 팀장님이 뭔데, 생산팀 업체선정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조 팀장은 눈을 부릅떴다.
“정원피케이 사위라도 되시나?”
2팀 팀원들은 술렁거렸고.
조 팀장은 눈치를 살피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회의실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