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88화 (88/301)

88. 기회일지도 (1)

‘조건이라······.’

지혁은 한 전무가 어떤 얘기를 할지 짐작이 되었다.

“말씀해보세요.”

‘상황이 바뀌었을 때, 변치 않는 자신의 안위를 얘기하겠지.’

잠재적 위협 앞에서 누구나 마찬가지다.

지금 상황에서는 분명히 안위를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 사장님은 건드리지 마라.”

“······네?”

지혁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오 사장님은 건드리지 말라고. 이건 조건이자, 경고야.”

지혁에게 한 전무의 이 말은 정말 의외였다.

“좀 당혹스럽네요. 그런 조건은 생각도 못 했는데.”

“······.”

한편으로는 한 전무가 자신을 꽤 높이 평가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혁은 일개 팀장이며, 오 사장은 선도생명 대표이사다.

근데, 지금 지혁에게 오 사장을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을 붙이다니······.

‘확실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지혁은 머지않은 미래에 그룹을 뒤흔들 것이며, 자신도 있었다.

그걸 눈치챈 한 전무의 눈썰미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어.’

“왜 대답이 없어? 자네 설마, 오 사장님도 타겟으로 두고 있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전무를 바라봤다.

“오 사장님 하기 나름이에요.”

“······.”

“무조건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드리겠어요. 단······.”

지혁의 눈빛이 빛났다.

“그분이 저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 저 또한 그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

“그건 약속드릴 수 있어요.”

지혁은 오너일가에 억하심정은 없다. 아버지가 그 집안에서 쫓겨나게 된 일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로 인해 지혁이 피해 본 건 없었다.

풍족하지 않지만,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고. 아버지의 사망 원인도 췌장암이었다.

지혁은 목적만 이루면 된다.

‘아버지의 복수 때문에 오너일가를 뒤집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기억도 안 나는 아버지. 지혁에게 큰 동기부여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르는 미래를 두고, 약속을 할 순 없었다.

"확실한 약속은 못 하겠다는 거군."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라······.’

한 전무는 방금 지혁의 한 말을 곱씹었다.

‘오 팀장의 정체를 알게 되면, 오 사장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연히 적대관계가 되지 않을까? 흠······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가······,’

지금은 쉽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한 전무의 표정을 살피다가, 지혁이 말했다.

“적이 되지 않으려면 더 가까이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

“오 사장님과 자리 좀 자주 만들어 주세요. 더 친해질 수 있게.”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이야기.

오너일가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지혁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한 전무는 지혁과 오 사장이 과연 친해질 수 있을지도, 잘 가늠이 안 되었다.

***

선도생명 사장실.

평소처럼 한 전무는 오 사장에게 선도물산 현황보고를 했다.

최근 선도물산에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기에 보고는 금방 끝났다.

“요즘 좀 조용하네요?”

“네, 시끄럽게 하던 사람들이 나갔거나, 조용해졌으니까요.”

송 상무와 고 팀장을 얘기한 거였다.

“그렇군요.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

“너무 순탄한 게 꼭 좋지만은 않아요.”

선도물산이 이렇게 순탄하게만 흘러가면, 홍 대표의 입지가 탄탄해진다.

오 사장에게 있어서 꼭 호재라고 볼 수는 없었다.

“뒤흔들어 볼까요?”

한 전무는 오 사장의 의향을 눈치채고 바로 물었다.

“음······.”

오 사장은 잠시 생각했다.

‘최근 인사 이슈가 너무 많았지.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까.’

본부장 퇴출에 반복되는 특진.

요즘 선도물산의 인사명령에 눈에 띄는 일들이 많았었다.

“아니에요. 기다려 보죠. 지금은 자연스러운 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 사장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오 팀장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건 어떻게 됐어요?”

“······.”

“전무님답지 않게 시간이 꽤 걸리네요?”

오 사장은 부드럽지만, 업무 지시와 이행에 있어서는 엄격하다. 머릿속에 달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언제 어떤 지시를 했는지 기억하고 칼같이 체크한다.

“네,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뭔가 있던가요?”

한 전무는 잠시 망설였지만, 지혁과의 약속을 지켰다.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그래요?”

“네.”

오 사장이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 전무는 말을 덧붙였다.

“연일 오 씨는 맞지만, 오 사장님 가족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기에, 한 전무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흠······ 그렇군요.”

오 사장이 뭔가 찜찜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한 전무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오 팀장 말입니다.”

“네.”

“정기 모임에도 참석시키는 건 어떠십니까?”

오 사장이 주재하는 비밀 모임을 말하는 거였다.

한 전무는 지혁을 높이 평가한다. 오 사장과 지혁이 서로를 겨누는 사이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지내보니, 지혁이 겉보기와 달리 인간성도 있는 사람이었고.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다 보면, 유대관계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좀 갑작스러운데요?”

“······.”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죠?”

오 사장은 사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그 숨은 뜻을 확인한다.

“젊고 유능한 친구이니, 저희 모임에 빨리 편입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한배를 탄 사이기도 하고요.”

“한 전무님은 오 팀장을 믿으시나 봐요?”

“네? 아 뭐, 저야.”

오 사장 또한 지혁을 괜찮게 평가하지만,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건 아직 아니에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알겠습니다.”

오 사장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보다는 오 팀장 이제 자리 바꿀 때 되지 않았어요?”

“네?”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는 거 같은데, 팀장 자리가 좁아 보인다는 얘기도 들리고요.”

이 말을 듣고 한 전무는 생각했다.

‘다른 경로로도 얘기를 듣고 계시는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

복직한 지 어느덧 1년이 훨씬 지났다.

회사생활 1년이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혁의 시간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가 오기 전의 상품본부 3년보다, 지혁이 복직한 뒤 1년 동안에 훨씬 더 많은 변화와 성과가 있었으니까.

8시 55분.

여느 때처럼 지혁은 항상 그 시간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손정진은 여느 때처럼 일어나서 각 잡고 인사했다.

업무도 익숙해졌고, 이제 신입사원 태를 완전히 벗었다.

“나 찾는 사람 없었어?”

“네, 없었습니다.”

지혁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향해 걸어갔고, 손정진이 따라다니며 브리핑했다.

“오늘 오전 10시에 내년 봄, 여름 상품 플랜 기획 미팅이 있고요. 오후 2시에는 개발팀 미팅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지시하셨던 봄 상품 원가 픽스는······.”

흡사 비서 같았다. 아니, 그냥 비서였다.

지혁이 책상에 가방을 올려둔 후, 커피를 내리러 가는 동안.

손정진은 지혁을 쫓아다니며, 약 10여 분간 브리핑을 했다.

“이상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정 차장님?”

정 차장은 지혁의 호출에 바로 반응했다.

“네, 팀장님.”

얼마 전부터 정 차장은 지혁에게 존대를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지혁은 하던 대로 편하게 부르라고 했지만, 정 차장은 이제 존대가 편하다며 바꾸지 않았다.

“오전, 오후 미팅 모두 정 차장님이 주도할 수 있으시죠?”

“네.”

정 차장은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항상 그래 왔었으니까.

“이제 현업에 끼려고 해도 못 끼겠네요. 다른 팀 거 봐주다 보니까.”

지혁은 호칭만 상품기획 1팀장이지, 명실상부한 상품전략실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유 본부장도 인정하고 지혁에게 맡기고 있다.

다만 직급이 ‘차장’이라서, 정식 발령만 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에 준하는 보상은 받고 있다.

지혁이 대가 없이 이렇게까지 수고할 사람은 아니다.

회사는 직급체계에 따른 연봉제가 있고, 그를 지킨다고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이다. 명시적으로 표현만 안 할 뿐이지.

탁. 탁.

지혁은 정 차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 차장님이 잘해주시기니까 든든하네요. 제가 봤을 땐, 팀장 중에서 일 처리는 제일 빠르신 거 같아요.”

정 차장의 특징을 잘 알기에, 지혁은 이렇게 한 번씩 꼭 띄워준다.

그러면 정 차장은 더욱 열심히 한다.

“하하! 저만 믿으세요!”

지혁은 황 과장을 불렀다.

“황 과장님!”

지혁을 피하려고 뒤돌아 서 있던 황 과장은 뜨끔했다.

최근 황 과장은 집중 과외라고 할 정도로 지혁에게 상품기획, 회계, 인사 등 전반적인 걸 배우고 있다.

거의 머리에 쑤셔 넣는 수준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갈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출근한 거 봤으면 와서 테스트부터 해야지, 뭘 못 본 척하세요?”

“아······ 네.”

“어제 가르쳐 드린 거, 쭉 읊어보세요.”

팀원들은 그런 황 과장이 안 됐으면서도 부러웠다.

‘요즘 잠이나 제대로 잘까.’

‘보기만 해도 숨 막혀.’

‘근데, 팀장님은 황 과장 진짜 신경 많이 써주네. 어디에 쓰려고.’

‘부럽다. 나도 팀장님 옆에 딱 붙어서 배우고 싶다.’

그렇게 상품기획 1팀의 오전이 지나갔고, 점심시간이 되어 여느 때처럼 다함께 식당으로 갔다.

***

“새로운 생긴 집 맛있네~”

정 차장이 배를 두드리며 말하자, 문 대리가 말했다.

“그래요? 전 항상 가던 순댓국 집이 더 맛있는 거 같던데.”

일주일에 반은 순댓국집에 간다. 지혁의 취향 때문에.

“정진아, 주문받아라.”

“알겠습니다!”

식사 후, 평소처럼 지혁이 커피를 쏘려 했다.

“팀장님, 오늘은 제가 한번 사겠습니다. 항상 팀장님이 쓰셔서.”

황 과장이 나서자, 오 팀장이 말했다.

“여러분 사주라고 회사에서 받은 돈이 있어요. 내 돈으로 사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드시면 돼요.”

지혁은 이제 예전처럼 흥청망청 개인 돈을 쓰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 적응하며 변한 태도 중 하나였다.

“정진아, 받아.”

“네!”

손정진이 지혁의 법인카드를 받아드는데.

어딘가에서 큰 인사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처음에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고,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반복되는 인사 소리에, 지혁이 뒤를 돌아보자.

“맞네, 맞아.”

“사진이랑 똑같네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과 지혁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남자가 지혁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나한테 인사한 건가?'

1층 로비.

선도물산 직원들은 지혁을 연예인 대하듯 하며, 그의 등장만으로도 이목이 쏠린다.

낯선 사람 둘이 지혁에게 돌발행동을 하니, 1층 로비의 다른 직원들도 지혁이 있는 쪽을 주목했다.

“오지혁 팀장님 맞으시죠?!”

둘 중 나이 많은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네······ 맞습니다만.”

그는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오지혁 팀장님께 스카우트 제의하러 찾아왔습니다.”

“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무슨 조치를 하신 건지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이 없더라고요. 선도 물산에서도 절대 안 알려주려 하고.”

“······.”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잠깐 시간 되실까요?”

이 불도저 같은 남자의 얼굴을 살핀 후, 지혁은 그가 건넨 명함을 보았다.

‘재우 인터내셔날, 인사팀장 류광환.’

선도물산 최대 경쟁사의 인사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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