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멀리 안 나간다
지혁은 자켓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대표님.”
“얘기하게.”
“저는 부드럽게 얘기 못 하거든요. 본대로 솔직하게 얘기할 테니,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그래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혁 또한 본인이 말을 거침없이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회사 대표니까, 미리 양해를 구한 거였다.
지혁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유 실장으로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시작됐구먼. 허락했다가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
하지만, 지혁을 잘 모르는 대표로서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게 하게. 나 솔직한 거 좋아하네. 어차피 일 얘기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표의 이마를 볼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앞머리로 가려져 있었다.
어쨌든 지금 해야 할 일은 명백하기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상품본부장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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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표이사는 눈을 끔뻑거렸고.
회의실에 모인 다른 이들도 귀를 의심했다.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어떻게 저런 소리를 면전에서······.’
말은 지혁이 했는데, 지켜보는 사람들이 조마조마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사람, 위협이 되지 않을 사람들로만 가려서 쓰는데.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겠어요?”
“······.”
“제가 디자인실의 무능함을 3년간 못 본 척했다고 했죠?”
대표이사는 얼이 빠져서 넋 놓고 있었고, 지혁은 거침없었다.
“우리 회사에 유능한 디자이너 많았습니다. 아니, 실제로 지금도 많아요. 근데, 바른말 한다 싶은 디자이너는 다 내보내고. 조직에 불평불만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시늉만 잘하는 사람들로만 윗자리에 앉혀 놓았죠.”
“······.”
“귀 닫고, 눈감고. 매장에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무실 안에서 예술을 하고 있죠. 밖에서는 브랜드 네임을 가지고도 디자인을 이런 식으로밖에 못 하느냐고 말이 많은데. 시장조사를 나가질 않으니, 들을 일도 없죠.”
지혁은 언성을 높였다.
“조직의 발전보다는 자신의 안녕에만 집착하는 리더들 때문에 실력 좋은 사람들까지도 병들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점점 한통속이 되어 썩어가는 거죠.”
지혁은 상품본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잘해봐야 똑같으니까. 도리어 잘해서 튀면 찍히니까. 상품본부장이 잘하는 말 있잖아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성과는 만드는 거라고.”
상품본부장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과는 조작하는 거라는······그 의미 맞죠?”
상품본부장은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닫았다.
성과는 만들면 된다는 것. 최측근에게 챙겨주겠다는 의미로 종종 쓰던 말이었다.
물론, 지혁은 유 실장을 통해 이런 얘기를 들어서 다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이 디자인실에 관련되었기에 그 예로 설명을 드렸지만, 상품기획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 실장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똑같아요! 작년 데이터 돌려서 워스트 제품은 안 하고, 베스트 제품은 그대로 하고. 오더 수량도 작년 판매데이터만 보고 감으로 때려 맞추고.”
“······.”
“연간 계획 준비를 그딴 식으로 한다니까요. 이게 말이 됩니까?”
평소답지 않게 지혁은 좀 흥분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회사에요? 위에 계신 분들 놀고 먹으라고 월급 많이 받는 거 아니잖아요?”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선도물산의 임원급이었고. 지혁의 얘기에 가슴이 뜨끔 했다.
상품본부장 얘기로 시작했지만, 지혁은 임원들을 다 까는 거였다.
“대표님.”
“응? 어어.”
갑작스러운 호명에 대표이사는 당황했다.
“상품본부장에 대한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시면 아실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조직을 좀 먹고, 자기 권력을 위해 다수를 불행하게 하는 리더를······ 계속 자리에 두실 건가요?”
지혁 검지로 상품본부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
대표이사는 선뜻 대답을 못 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혹시 대표님도 알면서 모른척하신 건가요? 아니면 상품본부장을 유지하는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자네, 말이 좀 심하잖아.”
옆에서 CHO가 나섰으나, 지혁은 멈추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듣고도, 회사 대표가 가만히 있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회사라고 생각하는데.”
지혁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면······ 제가 이상한 건가요?”
지혁이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
“원하시면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도 있는데.”
지혁의 말에 대표이사는 손을 들었다.
“아니야. 됐네.”
앞선 대화에서 지혁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대표이사는 충분히 이해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무능하며, 방향이 잘못된 리더는 조직과 사람을 병들게 한다.’
평직원은 잘하면 좋고, 못 하면 가르쳐서라도 끌고 가면 되지만.
리더에게 있어서 무능함은 죄악이다.
그런 사람이 리더를 하면 안 된다.
무능함에 더해 상품본부장처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조직과 사람을 쓸 줄 아는 머리까지 갖춰져 있다면······.
상품본부 소속인 지혁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상사로 둘 수 없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일단 얘기는 잘 들었고, 회의는 마치기로 하지. 상품본부장 거취에 대해서는 추후에 결정하는 거로······.”
“아니요.”
지혁이 막았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시죠. 선도물산의 수장께서 이 정도 결정도 바로 못 합니까? 심지어, 지금 문책도 하지 않으셨는데.”
CHO가 결국 한마디 했다.
“이봐, 오 팀장. 적당히 하게. 어디 대표님한테.”
지혁은 CHO를 쏘아보았다.
“회의 시작할 때 편하게 말하라고 했던 거 못 들었어요? 불편한 얘기 꺼내니까, 마음이 바뀌셨나?”
“아니, 이 사람이······.”
지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야 해. 여기서 숨통을 끊지 못하면, 도리어 당할 수 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특히, 강한 적을 상대할 때 그렇다.
강자들은 생존력이 강하며, 위기를 벗어나면 한층 더 업그레이드해서 돌아온다.
‘그 세계’에서도 타이밍을 놓쳤다가, 역으로 위험에 빠졌던 경험을 해봤다.
지혁은 대표를 향해 말했다.
“전 명백히 말씀드립니다. 상품본부장의 거취에 대해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으시면······.”
대표이사는 불길한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다.
“저는 언론사와 아주 딥한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딥한 인터뷰?”
“지금 회의실에서 얘기했던 것처럼요. 아무것도 숨기는 것 없이. 거침없이.”
이건, 협박이었다.
대표이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분노, 당혹스러움, 걱정.
그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리가 인터뷰를 취소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 같은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취소하면 내가 언론사 찾아가서 하면 되죠. 화제의 인물인데, 안 받아주겠어요?”
지혁의 눈빛에 똘끼가 아주 충만했다.
대표이사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새끼, 진짜 할 놈이다.’
“흠······.”
대표이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고.
회의실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러려고 보자고 한 게 아니었는데.’
가볍게 사안을 들어보려 했던 건데, 일이 커져 버렸고.
대표이사는 뭐라도 결정을 내려야 할 궁지에 몰렸다.
“자네는 뭐 할 말 없나?”
지혁이 말하는 내내, 잠자코 있던 상품본부장에게 대표이사가 물었다.
“지금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꿍꿍이 중이구먼.’
대표이사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좋아, 오 팀장. 내가 한 가지는 약속하지.”
“······.”
“상품본부장의 거취에 대해서는 오늘 중에 정리하겠네. 하지만, 그게 가벼운 일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바로 할 수는 없어.”
지금 시각은 4시 30분.
퇴근 시간까지 1시간 30분 남았다.
“알겠습니다. 기한은 퇴근 시간인 저녁 6시까지예요.”
“······.”
“납득 못 할 결과가 나온다면, 전 제 의지대로 움직일 겁니다. 모든 건 대표이사님 결정에 달렸습니다.”
대표이사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회의는 마치기로 하지.”
대표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회의는 종료되었다.
저벅. 저벅.
지혁은 같은 방향인 유 실장과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유 실장이 옆에서 물었다.
“볼수록 진짜······ 자네는 다음 생각은 조금도 안 하나? 이 일 끝난 후, 대표이사와의 관계 걱정 안 돼?”
유 실장은 뒤는 전혀 생각 안 하고 지르는 지혁의 태도가 신기하면서도 우려되었다.
“글쎄요. 전 그냥 필요한 일을 하는데, 주저하고 싶지는 않아요.”
유 실장은 오늘따라 지혁이 좀 커 보였다.
***
상품본부장이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대표이사는 그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 부회장님이 이 일을 알면 어떨 거라고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저런 어린놈······ 겨우 대리 팀장한테 꼼짝도 못 하나?! 본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상품본부장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본인도 꼼짝 못 했으면서.’
“그리고 조직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해온 거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해야지.”
“죄송합니다······ 오늘 바로 조직쇄신안 정리해서, 내일 오전 중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대표이사의 반응이 상품본부장은 불안했다.
“네?”
“일단 대기해 봐. 이대로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대표님······.”
상품본부장은 넋이 나간 얼굴로 대표이사를 바라봤다.
함께 오 부회장을 모시며, 2주에 한 번 은밀한 모임을 하는 사이였다.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는 건가.’
대표이사는 상품본부장에게 말했다.
“이봐, 대의를 생각해야지. 지금은 과정일 뿐이야.”
“······.”
“오 부회장님이 회장 되면, 우리 세상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되실 거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지 않지만.
상품본부장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제가 상품본부장으로 있는 와중에 엄청난 성과가 났습니다.”
어이없게도, 상품본부장은 지혁이 이뤄낸 성과를 말하고 있었다.
“근데,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건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허, 참.”
대표이사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여간 태세 변화 하나는 끝내줘.’
“자네가 결정하게. 오 부회장님께 이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 드리고 처분을 받아볼 텐가. 아니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할 텐가?”
“······.”
상품본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
***
[인사발령]
1) 송재호 상무
이동 전 : 상품본부 본부장
이동 후 : 경영미래전략 고문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서 인사발령 메일이 날아왔다.
경영미래전략 고문이란 건 없는 자리를 만든 거다. 즉, 한직으로 물러난 거였다.
그가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니며, 어찌됐든 상품본부가 큰 성과를 냈다.
지혁은 이번 일로 송재호 상무가 잘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가 관리자를 하면 안 되며,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회의 중에 그런 지혁의 의도를 대표이사에게 분명하게 보였었고.
대표이사는 그의 의도를 따른 것이다.
지혁은 인사발령 메일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갑작스러운 상품본부장의 강등.
다른 부서는 충격에 빠져 난리였으나, 상품기획 1팀만은 평온했다.
계획했던 대로 되었을 뿐이니까.
상품기획 1팀은 평소와 같은 월요일 아침을 맞았고.
지혁은 출근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송사 갔다 올게요.”
방송 출연 한다며, 오늘은 좀 더 깔끔하게 입고 왔다.
그래서일까. 팀원들은 그런 지혁이 오늘따라 더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빛나 보이는 건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팀원들에게 지혁은.
범접하지 못할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