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조준, 발사 (2)
상품본부장은 여느 때처럼 아침 7시에 출근했다.
걱정거리도 없고, 다시 회사생활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아서 요즘 기분이 좋았다.
지혁과의 부딪힘으로 잠깐 피곤한 적도 있었으나, 어찌 됐든 ‘홍썬라인’은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이젠 지혁을 신경 쓰지 않는다.
‘위협이 되지 않을 놈은 그냥 무시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
상품본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도 출근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의 고요한 여유를 즐기며 상품본부장은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을 맡으며 창밖으로 바깥 전경을 바라보다가.
“오랜만에 사우나나 할까.”
상품본부장이 출근했는지, 확인할 사람은 없다. 게이트 출근 기록은 찍혀 있고.
“하아~!”
상품본부장은 아저씨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오자~”
회사 앞 사우나로 향했다.
잠시 후, 오전 9시 30분.
좀 늦게 사무실로 들어온 상품본부장. 미스터 쾌남 향에 여직원들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요~ 좋은 아침~”
상품본부장이 들어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인사했다.
‘늦게 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뭔가······ 특별해지는 느낌?’
상품본부장실로 들어가며 피식 웃었다.
‘느낌이 아니지. 실제 특별한 사람이니까.’
“본부장님.”
젊은 여직원이 막 본부장실로 들어서려던 상품본부장을 불러세웠다.
“음? 무슨 일이지?”
상품본부장은 눈썹을 찡긋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여직원은 손을 내밀었다.
“아침에 직원 생일 축하하려고 빵을 좀 사 왔는데. 이거 좀 드시라고요.”
접시 위에 올려진 크로와상.
상품본부장은 한껏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고마워라. 잘 먹을게요?”
“맛있게 드세요.”
여직원은 황급히 나가려는데.
“본부장실에서 같이 먹을까?”
“아, 아니요! 저희는 이미 다 먹었어요.”
누가 봐도 별로 챙기고 싶지 않은데, 같은 부서에 있으니까 건넨 거였다.
상품본부장이 다른 눈치는 좋으면서, 이런 눈치는 없었다.
“그렇구나~ 다음부터는 미리 얘기해줘. 난 우리 직원들과 함께 하는 게 좋아~”
“네······.”
여직원이 나간 뒤,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임원 회의. 10시.’
회의 시간 15분 전에 맞춰놓은 알람이었다.
“어이쿠 서둘러야겠네.”
크로아상을 입에 쑤셔 넣고, 일어났다.
잠시 후, 회의실에 도착했고.
짝짝짝.
상품본부장이 들어서자마자.
먼저 와 있던 임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뭐야?’
짝짝짝.
상품본부장은 의아했는데, 이 박수는 분명 자신을 향한 거였다.
-상품본부장님~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려요!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시네! 하하.
휘이익-!
심지어 휘파람 소리까지.
박수 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럴수록 상품본부장은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더 해졌다.
‘이상한데······ 왜 이러지.’
오늘 아침을 너무 여유롭게 보낸 게 불안했다.
보통 회의 준비는 전날 다 해놓지만, 아침에 메일 확인은 못 했었다. 금요일 오전이라, 별다를 게 없을 거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상품본부장은 일단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사람들이 축하해주는데, 본인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홍썬이랑 접촉할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어디선가 들린 한마디에.
상품본부장은 눈을 부릅떴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
[선도물산 3주 차 경영보고 드립니다······.]
전략기획실장이 앞에서 회의를 주관하는데. 상품본부장은 거기에 집중할 정신이 없었다.
재빨리 핸드폰을 켜서, 이메일을 열어봤다.
임원들 전체가 다 알 정도면 출처가 이메일 말고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근데, 제목만 봤을 때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뭐지?’
핸드폰을 창을 끄고, 다시 생각하다가.
'아······.'
문득 메일 목록 중에 잔상에 남는 게 하나 있었다.
‘발신자 : 오지혁 팀장’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발신자만큼은 명확하게 떠올랐다.
상품본부장은 다시 핸드폰을 켜서, 해당 메일을 찾았다.
‘상품기획 1팀 3주 차 스타일별 매출 보고.’
매주 금요일에 각 팀으로부터 받는 주간보고 메일이다.
상품본부장을 메일 참조해서 유 실장에게 보고하는데.
유 실장이 팀별 취합 본을 정리하여 따로 보고하므로, 팀 보고 메일은 잘 열어보지 않는다.
‘설마······ 진짜 홍썬을······.’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잊고 지냈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홍썬라인으로 성과 냈습니다!’
가장 상단에 '글자 크기 32'에 '궁서체 굵은 글씨'로 떡 하니 쓰여 있었고.
“커헉!”
그걸 보자마자, 상품본부장은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얼굴이 빨개졌다.
-본부장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허억!”
옆에 있던 임원이 다급한 소리로 외쳤다.
“비서실! 물! 물 좀 갖다 줘! 본부장님! 본부장님!”
새빨간 궁서체 글씨.
상품본부장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 글씨에서 지혁의 미소가 느껴졌으며, 날카로운 비수가 보이는 것 같았다.
“허억.”
큰 충격에 상품본부장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결국, 임원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고.
정신을 차린 상품본부장은 지혁이 보낸 주간보고 메일을 찬찬히 읽고 있었다.
‘입고 후 이틀 만에 완판.’
‘주간 판매기록 역대 기네스.’
‘전주 대비 매출 400% 성장.’
‘고객들의 예약문의 고객상담실 업무 마비.’
‘홍썬 구독자 수 상승.’
.
.
.
.
엄청난 성과.
말이 안 나오는 사이즈였다.
‘어떻게 기획라인 하나로 이런 결과를······.’
임원 회의 들어올 때 박수받을 만했다.
분명 좋아해야 하는 일인데.
상품본부장은 두려웠다.
이 정도면 파급력이 너무 크다.
사장급 이상까지 보고될 만한 내용이었다.
만약, 매스컴까지 타게 된다면······.
“젠장, 뭐 이렇게 참조를 많이 걸었어.”
그리고 지혁은 유독 이번 주간 보고 메일은 참조를 많이 걸었다.
영업본부, 디자인실, 생산본부, 무역, 인사, 물류, 홍보, CS······.
확성기 대고 소리 지른 것이다.
‘이번에 우리 참 잘했다고. 지금까지 왜 이렇게 못 했냐고. 이상하지 않냐고.’
“상품본부장님, 괜찮으세요?”
홍보실장이 다가왔다.
“아, 네. 괜찮아졌습니다. 하하. 놀라셨죠.”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방송사에서 ‘홍썬라인’ 신드롬 관련하여 인터뷰를 좀 하고 싶다는······.”
“커컥.”
상품본부장은 또 얼굴이 빨개졌다.
“괘, 괜찮으세요?”
“나중에······ 나중에 얘기합시다. 지금 몸이 좀.”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호흡을 진정하고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다가.
유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빠드득.
상품본부장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이 부르기 전에 다가왔다.
“본부장님, 괜찮으세요?”
“유 실장, 너······.”
상품본부장의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졌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임원들이 모여있는 자리라 그럴 순 없었다.
“왜요. 칭찬해 주시려고요?”
“허, 참나.”
상품본부장은 어이가 없었다.
“자네, 제정신이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치 빠른 분이시잖아요. 상황 파악 안 되세요?”
“뭐?”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 귓가에 다가와 작게 말했다.
“지금 등 뒤에 칼 맞은 거잖아요. 진짜, 모르세요? 아니면 믿기가 싫은 건가?”
상품본부장은 눈을 부릅뜬 채,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 간단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오 팀장이랑 짜고서······.”
“네, 쉽지 않았어요.”
“왜? 내가 자네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거야, 제가 하수인 노릇 하니까, 좀 챙겨준 거죠.”
“하수인······.”
“내가 한 것에 비하면 챙겨준 것도 아니지. 사냥개 마냥 이용만 당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본부장님만 아니었으면 벌써 상무 달았겠더라고요.”
“······.”
“그래서 다른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 대가가 상품본부장님이고.”
상품본부장은 오늘 아침, 기분이 참 좋았었는데, 반나절도 안 되어 지옥 불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수년간 이용당했는데, 한 번쯤은 제가 이용해도 되잖아요. 너무 억울하게 생각 마세요.”
“······.”
상품본부장은 할 말을 잃고, 덜덜 떨기만 했다.
깨문 입술에 살짝 피가 배어 나왔다.
[회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자리 착석을······.]
“유 실장.”
“왜요.”
“배신자의 말로가 어떨 거라고 생각하나?”
“······.”
“이유야 어쨌든. 자네는 배신자야.”
유 실장은 굳은 얼굴로 상품본부장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
각 본부별 주간보고 끝나고, 선도물산 현안 이슈에 대한 토론 중이었다.
위이잉-
영업본부장의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메시지 : 오지혁 팀장’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영업본부장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잿빛 얼굴의 상품본부장을 보았다.
피식.
평소 자애롭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심 좋고, 사람 좋은 영업본부장이지만.
어쨌든 그 또한 수많은 사람을 밟고 본부장 자리까지 올라왔다.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영업본부장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운데 자리에 앉은 대표이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영업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품본부장님.”
“네?”
상품본부장은 영혼 없는 눈으로 영업본부장을 바라보았고.
영업본부장은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작년 여름엔 팍스버거 콜라보로 일을 내주시더니.”
상품본부장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이번엔 ‘홍썬라인’이라는 기획 상품으로 일을 내시네요. 덕분에 영업부에서도 큰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영업본부장은 다른 임원들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매출 성과는 메일로 다들 보셨죠? 이거 정말 대단한 겁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
짝짝짝.
임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고.
대표이사 또한 흡족한 모습이었다.
-상품본부장님 축하드려요.
-상품본부 직원들은 진짜 좋겠다. 작년부터 계속 대박을 내시네요.
-성과급 잔치 열렸네~
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도 상품본부장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저 양반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럴 리 없는데.’
영업본부장과 상품본부장은 선도물산에서 서열을 다투는 사이다. 입사는 영업본부장이 2년 더 빠르지만, 승진과 직책에서 상품본부장이 항상 조금씩 더 앞섰었다.
“상품본부장님! 어떻게 홍썬라인을 생각하셨습니까? 성공비결이 너무 궁금합니다.”
“하하. 그거야 아래 직원들이 잘해준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게 있겠습니까. 나중에 보고 자리를 따로 만들겠습니다.”
상품본부장은 이렇게 넘어가려 했으나.
영업본부장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홍썬라인 디자인을 누가 했죠? 기존 스타덕 제품과는 차이가 많이 나던데.”
“······.”
“고객 반응 또한 현저한 차이가 나고요.”
모두 홍썬이 했다. 상품본부 산하의 디자인실은 홍썬라인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임원 모두가 상품본부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
대표이사까지 다 보고 있는 상황.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홍썬이 디자인했습니다.”
“왜요?”
영업본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 회사 디자인실이 있는데, 왜 홍썬이 직접 디자인을 한 거죠? 그것도 40 스타일 25만 장이나?”
“······.”
모든 임원이 알고 있으나,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
영업본부장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디자인실을 불신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동안 무능했던 걸 인정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