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사고 (2)
상품본부 대회의실.
지혁과 상품기획 1팀이 도착했고, 다른 메일 수신자들은 먼저 와 있었다.
생산팀장과 황성준 대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고.
그 옆에 새초롬한 디자인실장 얼굴이 보였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지혁이 먼저 아는 척을 했는데.
“네, 안녕하세요.”
디자인실장은 억지로 인사를 받았다.
그래도, 지혁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인사도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역시 임원은 다르긴 하네.’
그 옆에 스타덕 영업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오 팀장님. 오셨습니까.”
“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괜한 일로.”
“아닙니다. 일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일이죠. 괜히 오 팀장님만 번거로운 일 겪으시겠네요.”
그리고는 황 대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혁은 영업팀장에게 말했다.
“지원사격 좀 해주세요. 제가 사정을 아는데. 황 대리님도 어쩔 수 없었던 거 같더라고요.”
지혁의 이 말이 영업팀장은 좀 의외였다.
‘감싸주네? 그런 스타일로 안 보였는데. 각별한 사이인가.’
영업팀장은 지혁에게 완전히 매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인사를 모두 나눈 뒤, 지혁은 유 실장 옆의 빈자리로 갔다.
자주 보는 사이기에 지혁은 살짝 목례하고 앉았고.
유 실장이 말했다.
“오 팀장. 이게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음?”
지혁은 별다른 말 없이, 정중히 사과했고.
유 실장은 지혁이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에, 많이 놀랐다.
‘이상하다. 오지혁이 답지 않은데.’
“흠! 어쨌든 벌어진 일이니 잘 수습해야지.”
“네. 최대한 문제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 실장은 괜히 불안해졌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면 불안해. 오 팀장이 웬 다나까를 쓰고.”
덜컹.
그때 회의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덜컹.
황 대리의 심장이 주저앉는 소리도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삼각형의 눈매에 스포츠머리.
강인해 보이면서도 머리 참 잘 쓰게 생긴 50대의 남성.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특유의 아우라를 뿜으며, 상품본부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모두 일어났다.
상품본부장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렇게 다 같이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영업팀장님은 처음 뵙는 거 같고.”
영업팀장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스타덕 영업팀장 김종식입니다.”
“네 반가워요. 모두 자리에 앉죠.”
상품본부장은 시작은 점잖게 했다.
“음~ 일단.”
상품본부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래. 오 팀장이 보고하는 걸로 하지. 어차피 매장 출고 전까지는 상품본부 주관 아닌가. 다른 팀은 협조부서고.”
그는 시작부터 지혁을 지목했다.
***
보고 준비를 하고 있던 황 대리는 당황했다.
‘뭐야? 사고는 우리가 쳤는데. 왜?’
생산팀장도 당혹스러워서, 손을 들고 먼저 얘기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품본부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
“······.”
“우선, 상품기획 1팀의 팀장으로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관리 소홀로 열심히 일해온 협조부서에도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지혁을 옆에서 봐왔던 상품기획 팀원들과 유 실장은 많이 놀랐다.
‘어떤 또라이 짓을 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지혁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별다른 변명 없이 사과했다.
하지만 비굴하지 않았으며, 고개 숙이지도 않았다.
아주 당당한 태도로 현상에 대해 침착하게 사과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떤 조치에도 따르겠습니다. 상품본부장님, 어떻게 할까요? 퇴사라도 할까요?”
“뭐?”
잠자코 듣던 상품본부장은 살짝 당황했다.
“자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아니요.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
상품본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직’을 말하는 지혁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정상인이 아니긴 하네.’
최악을 생각하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는 법이다.
잘려도 그만이라는 태도로 나오는 지혁을 보니, 상품본부장은 전투력이 반감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일단, 몰아 붙여보자.’
“흠! 그건 회의가 끝난 후에 경중을 파악해서 결정할 일이고. 어떤 일을 책임져야 할지, 먼저 보고를 해야 하지 않겠나?”
“윤 차장이 메일을 아주 상세하게 잘 썼던데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본인 이름이 나오자, 윤 차장은 뜨끔했다.
“그게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사실 여부는 제가 파악해봤는데. 그 메일 내용이 전부 맞습니다.”
“······.”
지혁은 상품본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결론을 짓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드신 거로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윤 차장이 날짜까지 아주 세세하게 메일 썼던데, 그걸 이해 못 하셨을 리는 없고.”
상품본부장의 아랫입술이 살짝 떨렸다.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하죠. 윤 차장이 글재주가 좋은 듯합니다.”
상품본부장은 점점 넋을 잃고, 지혁의 퍼포먼스를 보고 있었다.
“근데, 디자인실장이랑 영업팀장은 왜 부르신 건가요? 그건 좀 궁금하긴 하던데.”
역으로 질문을 받았다.
상품본부장은 뭐라 대답은 못 하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젠장,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 거야.’
회의실 안에 적막이 흘렀고.
상품본부장은 말을 잃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해도 우스워 보일 것 같았다.
“내용 아시니까, 차라리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상품본부장님 바쁘시잖아요.”
“······.”
상품본부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막 지랄을 해봐?’
건너 쪽에 앉은 영업팀장의 얼굴 위로 영업본부장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너무 맥락 없잖아. 영업부 있는 앞에서 그럴 순 없지. 하아······ 영업팀장 부른 건 실수였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회의를 끝마칠 수도 없었고······.
“잠깐 쉬었다 하지.”
“네?”
회의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었다.
지혁은 피식 웃었고.
상품본부장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
지혁은 황 대리와 함께 잠깐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휴······ 10분이 몇 시간은 되는 거 같네요. 오 팀장님,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제 포격이 황 대리님한테 향할 텐데.”
“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고요.”
지혁은 회의 중에 상품본부장의 이마를 봤었고, 그래서 더 밀어붙였었다.
‘청록색’
푸른색을 가장하고 있으나, 속은 검다. 이런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하고, 과시욕이 강하다.
청록색을 띠는 사람들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데, 속마음을 잘 숨기면서도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좀 어렵더라도, 강대강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아마, 강하게 몰아붙일 텐데······ 황 대리님이 강하게 맞서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어휴, 못 해요. 못 해. 전 지금 상품본부장님과 같은 회의실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혀요.”
“그럼 그냥 버텨야죠.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이런 말만 하고, 아무 말도 마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지혁은 황 대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팔, 다리 잘려도 결국엔 목 지키는 놈이 이기는 거 알죠?”
“네에?!”
무시무시한 말에 황 대리가 놀라서 쳐다보자, 지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버텨보자고요. 아직 우리의 때가 안 왔을 뿐이니까.”
“······.”
지혁은 싱긋 웃으며 먼저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사생활 참 재밌어.’
***
10분 뒤, 상품본부장은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고.
정신무장을 했는지, 표정이 무서워져 있었다.
“이 스타일 생산 담당이 누구죠?”
지혁이 예상했던 대로, 상품본부장은 타겟을 바로 황 대리로 바꿨다.
“네! 접니다!”
“왜 이렇게 된 거죠?”
황 대리는 다운점퍼 사고의 일련 과정을 쭉 설명했다.
지혁이 말한 대로 다 이메일에 있는 내용이었으며, 그걸 한 번 더 읊는 수준이었다.
“다운점퍼가 연간 매출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 줄 아나요?”
“······.”
“생산 담당은 입고만 시키면 그만인 줄 알지? 어?! 제때 입고 못 시켜서 손해 보는 금액이 얼마인 줄 아냐고!”
상품본부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는데.
좀 전에 지혁에게 밀렸던 울분도 섞여 있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황 대리는 사색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이 회사가 자네 거야?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회사에 해악을 끼쳐서야 되나?”
“······.”
“자네에게 월급을 줘야 하는 이유가 뭐야? 사고나 치라고?!”
갈수록 말이 심해졌으나.
다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 또한 잘해보려 했으나······.”
공포감에 황 대리는 이성을 잃었고, 지혁이 준 지침을 어기고 말았다.
“오호······ 이 사람이 핑계를 대네?”
상품본부장은 잘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잘해보려는 게 사고야?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하지만 자연재해는 어쩔 수가······.”
“그것까지 감안해서 계획을 짰어야지! 이 시기에 남중국해 태풍 잦은 거 모르나? 생산 담당이?!”
괜히 본부장이 된 게 아니다. 다양한 보고를 받으며 광범위한 업무 지식이 있었으며, 웬만한 생산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디자인 실장! 혹시 생산의뢰서를 늦게 넘겼어?”
상품본부장의 질문을 받은 디자인실장이 대답했다.
“3월에 생산의뢰서 넘긴 거로 확인했습니다.”
이번엔 윤 차장에게 물었다.
“오더 수량 확정이 늦었나?”
“안 늦었습니다. 점퍼는 항상 선기획으로 일찍 진행합니다.”
황 대리는 융단폭격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업무 과실이 있었지만, 마녀사냥이 따로 없었다.
점점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갔고.
옆에 생산팀장은 불편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섰다가는, 한 명 죽을 거 두 명 죽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저기, 상품본부장님.”
가만히 지켜보던 지혁이 입을 열었다.
“자넨 가만히 있어! 내가 질문할 때 얘기해!”
상품본부장은 지혁이 말을 못 하게 하려 했다. 회의에서 완전 배제한다는 생각이었다.
잠깐 붙어보니, 장난 아니었으니까.
본인이 주도하는 분위기로 회의를 마쳐야 면이 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
“보기 상당히 거북하네.”
윤 차장은 옆에 지혁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돌아왔네. 돌아왔어. 어째 정상같이 보인다 했다.’
심 팀장을 볶을 때, 7명의 디자이너를 상대할 때의 그 똘끼 충만한 눈빛이었다.
“뭐, 뭐라고?”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뭐 자꾸 계속해요. 메일에 다 있다고 했잖아요. 진짜 안 읽어본 거 아니에요?”
“······.”
“아니면 상품본부장님이 대신 일 처리를 해주시던지. 갈구기만 하고, 도대체 결론이 뭐야?”
상품본부장은 헷갈렸다.
‘방금 혼잣말? 반말?’
뭐라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애매했다.
“그리고요.”
“······.”
“그렇게 몰아세우다가 자칫하면 자폭하는 수가 있어요. 자폭 뭔지 알죠? 같이 죽는 거.”
상품본부장의 눈두덩이 떨렸다.
“잘 생각해보세요. 자폭했을 때, 누가 더 잃을 게 많을지.”
그리고 지혁은 상품본부장 송재호 상무와 생산 담당 황성준 대리를 번갈아 보았다.
'상무와 대리.'
누가 잃을 게 더 많을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황 대리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생각했다.
‘나 자폭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