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뒤는 걱정하지 마라
“안녕히 가십시오.”
“그래~ 회사에서 보세.”
영업본부장의 차가 먼저 출발한 뒤.
유 실장과 지혁이 남았다.
“자네 차는 어딨나?”
“차 안 가져왔어요. 여기 어울리는 차도 아니고.”
지혁은 자가용으로 캠핑카를 가지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자가용이란게 뭐야. 어쨌든, 그럼 택시 타고 온 거야?”
“네,”
꽤 늦은 시각.
지혁은 콜택시 부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대리기사가 도착했고.
유 실장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차로······ 가자. 가까운 역까지 태워줄게.”
“네, 고마워요.”
차 안.
적막한 분위기.
역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잠깐 가는 건데도 어색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고성을 지르고 지랄했던 부하직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근데, 오 팀장은 어떻게 영업본부장님과 가까워진 거야?”
“팍스버거 콜라보 때문이죠.”
“아······.”
그리고 지혁은 속에 담아왔던 얘기를 꺼냈다.
“솔직히 그거 반은 유 실장님이 하신 거잖아요. 마무리를 제가 지어서,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
“전 잘 알고 있습니다. 상품기획 1팀 팀원들도요.”
팍스버거 콜라보는 지혁이 복직하기 전부터 준비 중이었고, 유 실장이 직접 챙기는 프로젝트였다.
진행이 지지부진해서, 중간에 접을 뻔한 걸 지혁이 살린 거였지만.
어쨌든 아이디어와 기획은 유 실장의 머리에서 나온 게 맞다.
지혁이 살린 프로젝트기에 유 실장은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는데.
그걸 기억하고 말해주니, 고마웠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지만, 자네가 아니었다면 성공 못했을 거야.”
“그렇긴 하죠.”
“······.”
이 타이밍에서는 보통 겸양을 떠는데, 지혁은 달랐다.
유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 팀장은 하여간······ 이 얘기가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지혁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아마 위험할 거예요.”
“······.”
“상품본부장을 기만하고, 정보를 캐내는 일이.”
유 실장은 앞만 보고 있었다.
“일이 잘 끝나도 유 실장님은 꽤 타격을 받겠죠. 상급자 등에 칼 꽂은 이미지로 기억 될 테니.”
“······.”
유 실장 또한 지혁이 하는 말을 모르지 않았다.
그 부분 또한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이성적인 결정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안정보다 모험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상품본부장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제가 지켜드릴게요.”
유 실장은 이 말에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다.
“내 사람은 챙깁니다.”
유 실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오 팀장의 사람이야? 말이 참······.’
부하직원에게 이런 소리 듣는 게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뒤는 걱정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 주시면 돼요.”
“오 팀장이나 잘해. 상급자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 실장의 투덜거림에, 지혁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
다음날. 상품본부.
출근하자마자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에게 불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유 실장 어서 와. 거기 앉게.”
“네.”
거세게 지랄하던 어제의 상품본부장이 아니었다.
아주 자애로운 얼굴로 유 실장을 대했다.
“커피 마셨어?”
“아직 안 마셨습니다.”
“그래. 내가 좀 일찍 불렀지.”
지금 시각은 8시 10분.
업무 시작 시간 9시도 되기 전이다.
유 실장은 보통 사무실에 8시쯤에 출근한다.
회사에 쓸데없이 일찍 출근하는 상품본부장은 본인이 급하거나 궁금한 일이 있을 때면, 이른 아침부터 유 실장을 부른다.
그런 직속 상사의 성향 때문에, 유 실장은 오래 전부터 8시 전 출근이 습관화되어 있다.
‘제기랄, 도대체 내가 몇 년간 이러고살았냐. 그게 유일한 답인 줄 알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윗사람을 섬겨야 하며, 이 정도는 당연한 거로 생각했었다.
“좀 연하게 먹지? 내가 자네 취향은 잘 알고 있잖아.”
상품본부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커피를 내려 주었다.
탁자 위에 냅킨을 깔고, 티스푼에 설탕까지.
정말 친절했다.
“입 심심하면 뭐 먹을 것 좀 줄까? 아침은 먹었어?”
“먹고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정없이 두들겨 팰 때는 언제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베푸는 친절.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하며 눈치 보게 했다.
이제, 그 굴레를 벗어나니.
이런 상품본부장의 모습이 소름 끼칠정도로 재수 없게 느껴졌다.
유 실장은 불쾌함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아~ 향 좋다.”
상품본부장은 유 실장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아침에 맡는 커피 향은 참 좋아. 그렇지?”
“······.”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이런 여유를 가지면······ 왠지 앞서가는 기분이란 말이야. 그래서 난 신입 때부터 항상 일찍 오는 게 좋았어.”
한때는 이런 상품본부장의 성향을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라이 새끼, 일찍 오는 게 좋으면 혼자 즐기면 될 것이지. 왜 업무 시간도 되기 전에 날 부르냐고.’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이 빨리 본론을 말했으면 싶었다.
후르릅-
상품본부장은 커피를 마시고는 운을 떼었다.
“상품기획 1팀이 기획하고 있는 거 말이야.”
“······.”
“홍썬인지 뭔지. 그거 잘 얘기했나? 아직 얘기 안 해본 건 아니겠지?”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제 본인이 지랄하며 얘기한 것을 유 실장이 이행했는지 확인하려고 부른 것이다.
“얘기했습니다.”
“그래, 오 팀장이 받아들이던가?”
유 실장은 말을 뱉으려다가, 순간 고민됐다.
‘지금 거짓말을 하게 되면, 강을 건너게 되는 거야.’
말 그대로, 영업본부장이 심어놓은 내부자가 되는 것인데.
미우나 고우나 상품본부장과 함께해온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한 것보다 인정을 덜 받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의 힘으로 ‘이사’직까지 올랐다.
“왜 대답을 안 해? 설마······ 아니겠지?”
잠깐, 망설였다고 뱀 눈깔로 변하는 상품본부장을 보며.
어젯밤 영업본부장, 지혁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 인간은 안돼. 마음 약해지지 말자.’
유 실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네, 받아들였습니다. 홍썬 기획은 관두기로 했습니다.”
“진짜?”
상품본부장은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쉽게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쉽게 관둬? 그럴 사람 아닌 거 같던데?”
“네?”
유 실장은 약간 당황했다.
“아~ 오 팀장 파악 좀 하려고, 주변에 사람 좀 심어놨거든.”
유 실장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어제 회동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누굴 심어놓으셨습니까?”
“응?”
상품본부장은 의아한 얼굴로 유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걸 왜 물어보지?”
“네?”
“자네 그런 거 안 물어봤었잖아.”
“아, 무심결에 여쭤봤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유 실장은 당황하여,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상품본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정색해서 사과를 하나? 그냥 한 소리인데.”
“······.”
궁금했으나, 유 실장은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럼······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는 거지?”
상품본부장은 유 실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되물었고.
유 실장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네, 확실히 얘기됐습니다. 이제 그 일은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흠······ 그래.”
상품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향해 뒤돌아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 수고했네.”
이 말을 할 때의 상품본부장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
상품기획 1팀.
8시 55분.
지혁은 출근하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팀 미팅이요. 모두 회의실로 모이세요.”
그리고 손정진을 불렀다.
“정진아.”
“네!”
“선배들한테 주문받아서 커피 좀 사 와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회의실에 모두 모였다.
상품기획 1팀은 미팅을 잘 하지 않는다. ‘홍썬라인’ 관련 미팅 이후 처음인데, 그게 약 2주 전 일이다.
웬만해선 미팅 소집을 하지 않는 지혁의 성향을 잘 알기에, 팀원 모두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긴장하지 않은 딱 한 사람.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팀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얼굴 푸시고, 커피부터 마셔요.”
“······.”
하지만 다들 커피잔을 선뜻 입에 가져다 대지 못했다.
후르릅-
지혁은 뜨거운 커피를 불지도 않고, 꿀꺽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정 과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무슨 커피 마시는 스타일도 호러야. 입천장 다 데었겠다.’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였다.
“다들 알고 있죠? 은밀히 진행되던 ‘홍썬라인’ 시즌 기획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거.”
이 말이 나오자, 윤 차장은 뜨끔했다.
“이게 어디서 샜는지 내가 출처를 알긴 하는데······.”
지혁은 이렇게 말끝을 흐렸고.
팀원 모두가 뜨끔 한 기분을 느꼈다.
‘나 진짜 아닌데.’
‘혹시 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오 팀장이 나라고 오해하고 있으면 어쩌지.’
지혁은 이런 팀원들을 표정을 살피기만 할 뿐, 말을 끝맺지 않았다.
“고의는 아닌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아무 짓도 한 게 없는데, 왜 한숨을 쉬는 걸까.’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전원 끄고, 핸드폰 탁자 위에 올려놓으세요.”
팀원들은 이제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놓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지혁은 회의실 밖으로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홍썬라인은 오늘부로 관둡니다.”
“뭐?!”
담당인 윤 차장이 가장 반응이 컸다. 다른 팀원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왜?! 그럼 나 지금까지 한 건 뭐야?”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질문은 얘기 끝나고 받을게요.”
지혁은 표정을 굳힌 채 말했고, 윤 차장은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미안.”
지혁은 다시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상품기획 1팀은 홍썬라인 기획을 관둔 겁니다.”
“······.”
“공식적으로요.”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공식적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그만둔 거면, 그만둔 거지. 공식적으로는 뭐야.
지혁은 이어서 설명했다.
“외부에서 봤을 때, 상품기획 1팀은 홍썬라인 기획을 관둔 거로 할 겁니다.”
“······.”
“비공식적으로는 계속합니다.”
이제야 이해한 팀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집중했다.
“특히 상품본부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게 믿도록 행동을 해야 해요.”
“상품본부 사람이라면······.”
정 과장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말 그대로 상품본부 예하부서 모두요. 상품기획 각 팀, 상품전략실, 디자인실······ 그리고 상품본부장.”
상품본부장이라는 말에 팀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일부 팀원에게는 제가 행동지침을 줄 겁니다. 그대로 따라 주면돼요.”
손정진은 이런 얘기를 들으며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혁은 눈을 부릅뜨고, 홍썬라인 담당인 윤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
“홍썬라인은 반드시 거대한 성공을 거둬야 합니다.”
부담감에 윤 차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거대한 성공을요.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윤 차장은 아랫입술을 떨며 무심결에 대꾸했다.
“진짜······ 나한테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