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예상했던 풍파 (1)
‘아니······ 이게 뭐야? 홍썬?’
처음엔 생산의뢰서를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디자인실에 홍썬이라는 사람은 없는데. 가만······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고.’
디자이너는 주변 눈치를 봤다.
상품기획 1팀 전원은 모두 자기 일하느라 바빠서 디자이너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열어서 재빨리 검색해 보았다.
‘홍썬’
└영향력 있는 크리에이터 20명 안에 들어가는 인물
└강아지 소녀, 홍썬
└국내 최고의 화가 크리에이터.
└홍썬이 디자인한 그림 속 엑세서리, 완판.
└활동 영역을 넓히겠다며 준비중. 머지않은 미래에 선보일 계획······.
“어머!”
디자이너는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일하고 있던 정 과장이 바라봤다.
“왜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호.”
정 과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크리에이터와 콜라보를 하는 건가?’
그리고 다시 생산의뢰서를 보았다.
‘아니지. 콜라보라면 우리한테 디자인 의뢰를 해야지. 생산의뢰서의 디자인 자체가 홍썬 거 같은데.’
그때 디자이너 머릿속에 ‘업무 배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디자인실을 건너뛰고 외주를 준건가?!’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디자이너는 회사생활 5년을 했다.
지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며, 어떤 여파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생산의뢰서를 잡고 있는 디자이너의 손이 떨렸다.
‘이걸 어쩐다. 증거가 필요한데.’
생산의뢰서를 가져갈 수는 없고······ 핸드폰을 꺼내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업무 중 카메라 쓰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기에.
‘휴······ 일단 진정하자.’
디자이너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인사했다.
“이만 가볼게요.”
정 과장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인사했다.
“네, 수고하세요.”
디자이너는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
***
“팀장님! 팀장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디자인 팀장을 급하게 찾았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크, 큰일 났어요.”
“큰일?”
디자인팀장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상품기획 1팀에서요. 헉. 헉.”
말을 하다 끊고, 디자이너는 숨을 골랐다.
“너 뛰어왔니?”
“헉. 헉. 네. 너무 놀라서.”
디자이너는 말이 잘 안 나올 것 같아서, 찍은 사진부터 보여줬다.
평범한 생산의뢰서였는데.
‘시즌 기획 designed by 홍썬’
“음? 홍썬?”
디자인팀장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닉네임이 홍썬인 사람이 있어? 어디 건방지게 회사 문서에 본명을 안 쓰고.”
“아니요! 팀장님!”
“어머,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디자이너는 검색창에 ‘홍썬’을 기입하여 보여주었다.
“아······.”
‘홍썬’과 관련되어 보이는 내용.
지금 디자이너의 다급한 목소리와 눈빛.
디자인 팀장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얘네······ 지금 뭐 하고 있구나.”
디자인팀장은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회사에 디자인팀이 있는데, 디자인 외주를 줘?! 미친 거 아니야? 게다가 사전 협의도 없이······.’
하지만 팀장 짬이 있다. 디자이너처럼 호들갑 떨지 않았다.
“담당이 누구야?”
“윤현성 차장님이요.”
지혁을 떠올리고 물어본 거였다.
일전에 이승주 대리의 팍스버거 콜라보 리오더 건을 인수하려다가, 지혁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지혁과는 절대로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그가 담당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근데, 그 사람 팀장 됐지.’
하지만 지혁은 현재 상품기획 1팀 팀장이다.
지혁이 이 일과 전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팀원인 윤 차장이 독단적으로 이 정도 큰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고······.
‘이를 어쩐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지혁의 저승사자 같은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머리를 굴리다가, 주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명확하게 벌어진 일이고 증거도 있으니 일 키워도 문제 될 거 없어. 어떻게 보면 지금이 기회야. 이럴 때 길들여놔야지.’
“나랑 같이 디자인 본부로 가자. 보고 드려야 겠어.”
“시, 실장님께요?”
디자인 본부 실장.
스타덕, 신발, SPA, 여성 의류, 남성복 브랜드의 각 디자인 팀장들 위에 있는 다지인 파트에서 가장 높은 상급자다.
임원이며, 직위는 이사.
“거, 거길 왜 제가 같이 가요. 싫어요.”
디자인 팀장은 살살 달랬다.
“목격자가 안 가면 어떡하니. 넌 그냥 본대로만 얘기하면 돼. 찍은 사진도 보여드려야 하고.”
“사진은 톡으로 팀장님께 보내드릴게요.”
팀장에게 보고했는데, 굳이 그 부담스러운 자리를 하러 함께 가자고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디자인팀장은 문제 제기자를 팀원으로 하여, 본인은 제기 받은 문제를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싶었던 거다.
만약 잘못되더라도, 팀원으로 인해 책임이 분산될 수 있도록.
이런 게 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하우다. 팀장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 안 갈래요.”
디자이너가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보이자, 디자인팀장은 얼굴을 무섭게 하고 겁박했다.
“좋게 말할 때 가자. 업무 지시를 안 따르겠다는 거야?”
‘이게 무슨 업무지시야······.’
디자이너는 속으로 불만이었으나······어쩔 수 없었다.
“수첩 챙겨. 따라와.”
“알겠습니다.”
두 여자는 디자인 본부로 향했고.
이승주 대리가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
“하아~ 진짜. 디자인 모르는 사람 가르쳐가면서 일하려니까 힘드네.”
윤 차장은 홍썬과 미팅을 하고, 회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홍썬이 바쁘기도 했지만, 윤 차장은 가급적이면 그녀의 사무실에서만 미팅을 했다.
지혁의 지시로 이 일을 진행하고 있고, 분명 문제 생기면 그가 다 책임진다고는 했으나.
자칫하다간 꽤 시끄러워질 수 있는 사안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본사에서 홍썬과 미팅하다가, 디자이너에게 발각되어 괜한 불협화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단 제품 입고까지 완료하면, 그때부터는 지혁이한테 다 넘기면 되니까.’
‘홍썬 라인’은 최대한 조용히 무난하게 일 처리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도 외근 다니는 건 좋네.’
마침 전철에 빈 자리가 생겨서, 앉은 뒤 핸드폰 게임을 하려고 켰는데.
위이잉-
“음?”
담당 디자이너한테 온 메시지였다.
[윤 차장님~ 디자인 본부로 좀 오실래요? 실장님이 뵙고 싶다고 하세요~~]
고개를 갸웃했다.
‘실장? 디자인 실장? 그분이 날 왜 보자고 하지?’
윤 차장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는데, 그 높으신 분이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약간 싸한데. 이걸 어쩐다.’
아직 대화창에 들어가서, 메시지 확인까진 안 한 상태였다.
‘읽씹(읽고씹기)은 아니니까. 일단, 이 상태로 두고, 몰랐다며 뭉개볼까?’
윤 차장은 협조부서를 만날 때는 항상 조심했다. 특히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답장을 안 보내었고.
10분이 지나자, 또 진동이 울렸다.
위이잉-
[차장님~ 빨리요~ 기다리고 계세요. 잠깐 얘기만 나누신다니까~ 빈손으로 가볍게 오시면 돼요~~~]
윤 차장은 이번에도 까똑 확인은 하지 않은 상태로 메시지만 봤다.
‘잠깐 얘기······ 가볍게 오면······.’
무엇보다도 마지막 문장의 ‘물결 표시 3개’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심각한 얘기는 아니겠지.’
결국 대화창에 들어가, 메시지를 보냈다.
[네, 지금 사무실 들어가는 중이에요~ 10분 정도 걸려요~~~]
***
똑똑.
노크 소리에 디자인팀장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들어오세요!”
디자인실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덜컹.
윤 차장은 평소의 비굴한 표정과 함께 들어왔다.
‘뭐야?’
가볍게 생각하고 왔더니, 디자인 본부 안에는 디자인실장과 각 예하 팀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거기에 윤 차장의 담당 디자이너까지.
7명의 여성.
눈빛에서 불이 쏟아지고 있었다.
‘젠장, 기만전술에 당했다.’
담당 디자이너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윤 차장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꿀꺽.
윤 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회사생활 최대 위기가 되겠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어 지혁에게 연락하려는데······.
디자인실장이 말했다.
“뭐 하세요? 가까이 오지 않고.”
“······.”
“윤 차장님?”
“네? 저요?”
“그럼 당신 말고 지금 누굴 부르겠어요!”
사무실 공기를 찢는 샤우팅이 날아갔고.
윤 차장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마음속으로 되뇌며, 숨을 몰아쉬었다.
***
[오 팀장님.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사내 메신저로 온 이승주 대리의 메시지.
지혁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이에요?]
[디자인실이 심상치 않아요. 혹시 무슨 일 벌이셨어요?]
지혁은 예상하는 게 있었으나,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러니까,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디자이너가 상품기획팀 갔다 오더니, 핸드폰 사진 보여주면서 우리 팀장님께 보고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둘이 얼굴이 심각해져서 디자인 본부로 가던데.]
지혁은 윤 차장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생산의뢰서를 보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요? 디자인 본부로 간지 얼마나 됐나요?]
[지금 막이요. 바로 연락 드린 거예요.]
[어딘지 몰라서 그러는데. 저 좀 안내해줄 수 있어요?]
[가보시게요?]
지혁은 지금 시각과 윤 차장이 사무실을 나간 시간을 생각했다.
[네. 30분 뒤에 봐요.]
30분 뒤.
이승주 대리를 따라서, 디자인 본부로 향했다.
디자인 본부에 가까워질수록.
고성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어머······ 어떡해.”
이 대리는 식겁한 얼굴로 불안해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디자인 실장님 성격 장난 아니에요.”
“그래요?”
“아무리 오 팀장님이라도······ 임원이 난리를 치면······.”
어느덧 디자인 본부 앞에 도착했고.
[누구 컨펌받고 하는 거냐고요!]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요?!]
[이런 경우가 어딨냐고! 대체!]
블라인드 틈 사이로 안쪽 모습을 살폈는데.
윤 차장은 7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큭.”
지혁은 웃었고.
이 대리는 어이없는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이게 웃겨요?”
“윤 차장님 지금 연기 중이에요.”
“······.”
“위협이 지나갈 때까지 몸을 움츠리고 기다리는 거죠.”
지혁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윤 차장님 발장구치고 있는 거 보여요?”
대역 죄인처럼 고개는 숙이고 있는데.
오른쪽 발은 바닥을 때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지루해서 저러는 거거든요.”
이승주 대리는 지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 팀장님도, 윤 차장님도. 참 대단하다.’
지혁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계속 보기만 할 거예요?”
“화력이 세네요. 꺾이길 좀 기다려야죠. 이 상황에서 들어가면 말이 전혀 안 먹혀요.”
“······.”
지혁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니 언성이 좀 잦아들기 시작했고.
했던 말 되풀이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꿋꿋이 버티는 윤 차장을 보며, 지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윤 차장님한테 일 맡기길 잘했네.”
“네?”
지혁이 이승주 대리를 바라봤다.
“저 이제 들어갈 거거든요. 이 대리님은 자리 피하세요. 같이 온 거 보이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아, 네.”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한 번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덜컹!
지혁은 문을 거칠게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