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결단의 시간 (2)
“상품기획팀을 떠나고 싶어요.”
유 실장이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아서 지혁은 다시 한번 말해주었지만.
“······.”
이번엔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정적이 흘렀다.
‘왜? 도대체 왜? 대박 터트려놓고 왜 지금?’
유 실장은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들은 말이 맞는지 헷갈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팀 이동을 얘기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팍스버거 콜라보는 진행 중이다. 아니, 이제 시작에 가깝다.
‘그 성공을 만들어 놓고, 성과만 챙기면 되는데······ 팀 이동을 하겠다고?’
“저기······ 지혁 씨. 혹시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백 과장이 유 실장의 눈치를 본 후, 대신 나섰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반말을 했었는데, 말투가 존대로 바뀌었다.
“갑자기 팀 이동이라뇨. 항상 보면 지혁 씨는 과정 설명이 없더라.”
“결론이 중요하니까요. 시간 절약도 할 겸 결론부터 말씀드리는 거죠.”
잠자코 있던 유 실장이 말했다.
“결론부터? 그럼 자네 지금 통보하러 온 건가? 부서이동을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반 통보죠. 제가 이동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일을 하면 성과를 못 낸다고 말씀드렸는데.”
‘성과’라는 단어에 유 실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혁이 말하는 ‘성과’의 맛을 봤기 때문이다.
지혁은 빈말을 하지 않으며, 결과로 보여준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봤다. 그냥 보여준 정도가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 임원회의에 거론이 될 정도로 말이다.
‘아······ 미치겠네. 강압적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통할 놈도 아니고. ’
유 실장은 지혁의 눈치를 봤다.
‘젠장, 내가 사원 눈치를 보고 있다니. 에라이, 모르겠다.’
그는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돼! 절대 안 돼! 이유가 뭐든 간에 팀 이동은 불가야!”
유 실장은 얼굴이 붉어져서 소리쳤고, 지혁은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다.’
“······.”
지혁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유 실장은 지혁에게 바싹 다가와 앉으며 달래듯 말했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얘기해 봐. 지혁아. 넌 이동하면 안 돼.”
***
지혁은 조금 더 침묵을 유지했고.
유 실장과 백 과장은 그의 입만 바라봤다.
애가 탄다고 생각할 때쯤, 지혁이 말했다.
“심 팀장님과 한 팀에 못 있겠습니다.”
“어?!”
유 실장은 놀라서 반문했고. 백 과장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심 팀장님과 제가 어떤 관계인지는 대략 아시죠?”
“······.”
유 실장 앞에서 지혁과 심 팀장이 언쟁을 벌인 적은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상품기획본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유 실장은 윗사람으로서 아래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었다.
위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잘 보이는 법이다.
“어떻게든 함께 지내보려 했는데. 더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냥 이동시켜주세요.”
“······.”
“회사에 부서가 많은데, 안 맞는 사람끼리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같이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 유 실장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때문에 10층 A 구역은 항상 전쟁 중이라는 말이 들릴 정도니까.
하지만······.
유 실장은 지혁이 필요했다.
그의 진가를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절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지혁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
“심 팀장이 요즘 많이 달라졌다고 하던데. 그리고 너도 가만히 당하기만 했던 건 아니잖아.”
그 말을 들으며 지혁은 생각했다.
‘역시, 유 실장도 다 알고 있었군.’
“어차피 월급 받는 회사생활이야. 좀 안 맞는 사람끼리도 버티고 지낼 줄도 알아야지. 어떻게 입맛대로 회사생활 하겠어. 이건 직장 선배로서 얘기하는 건데, 힘든 일도 결국엔 다 지나가기 마련이고······.”
유 실장은 설교를 늘어놓았다.
자기계발서에서 많이 나오는 뻔한 이야기.
힘든 일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고, 남을 바꾸기는 힘드니 자신을 바꾸면 되고, 스트레스는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며······.
지혁은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당장 힘들어 죽겠는 사람에게 이게 뭔 잔인한 소리냐고. 그냥 벗어나면 되는 건데.’
진짜 힘들어서 팀 이동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얘기를 듣다 보니 짜증 났다.
“됐고요. 그래서 팀 이동은 안 된다는 건가요?”
“······.”
지혁의 매서운 눈을 바라보며, 유 실장은 섣불리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쉽게 얘기했다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 같아······ 얘는 그러고도 남을 애야.’
유 실장은 지혁이 또라이라는 걸 기억했고. 섣불리 대응하는 것보다는 조금 시간을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생각 좀 해보자. 나 지금 갑작스럽게 얘기 들었잖아. 인사이동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사원 나부랭이 한 명 이동하는 건데, 뭘 그래요.”
“넌 그냥 사원이 아니야.”
이 말에 지혁은 피식 웃었다.
“저 오래 못 기다려요. 내일까지만 기다릴게요. 별다른 말 없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다음 단계가 뭔데?”
“다음 단계는······.”
유 실장은 황급히 손을 들어 지혁이 막았다.
“아, 아니야. 하지 마. 안 들을래.”
옆에 선 백 과장이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도 실장님이신데, 체통이······.’
유 실장은 다급했다. 수중에 보석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는데. 그게 막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상황.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럼, 생각정리되면 연락 주세요."
지혁은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유 실장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네?”
“자네가 상품기획팀에 남을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거야?”
이 말에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심 팀장님과 같은 팀에 있을 수 없다는 게 전제 조건이니까요. 제가 팀에 남으려면······ 글쎄요? 생각해 보세요.”
지혁은 본인을 팀에 남기고 싶으면, 심 팀장을 보내라는 말을 표면적으로는 하지 않았으나.
유 실장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아······ 그 뜻이었구나.”
유 실장은 당혹스러움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혁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제 명확하게 이해가 된 것이다.
‘심 팀장과 너 중에 선택하라는 거잖아.’
이제야 유 실장은 차분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 가 봐.”
***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쯤.
지혁과 황 대리는 아지트에서 만났다.
선도 빌리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
황 대리가 처음 출근한 날, 둘이 대화할 때면 이곳에서 만나자며 지혁이 데리고 왔었다.
“흠- 휴우~”
황 대리는 담배를 피웠고, 지혁은 옆에서 캔 커피를 마셨다.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시네.”
지혁의 말에 황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아껴서 뭐 합니까. 그냥 참지 말고 하고 싶은 건 하렵니다~ 하하.”
“마인드는 좋은데. 고통 속에 살다 갈 수도 있어요. 건강하게 살다가 한 방에 가는 게 낫지.”
“······.”
이제 지혁과 대화를 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는 못했다.
지혁은 조직과 사람들에 관해서 물었다.
생산팀 하 팀장의 동향. 디자인실의 분위기. 물류와 영업팀까지.
황 대리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으나, 서글서글한 성격 탓에 여러 부서와 두루 친하게 지냈으며, 그 덕분에 이런저런 소식을 쉽게 접했다.
지혁에게는 좋은 정보제공자였다.
황 대리는 아는 대로 지혁에게 이런저런 뜬 소문을 전하다가.
“아, 맞다! 그거 진짜예요?”
“뭐요?”
“상품기획 팀 이동 소문이 있던데?”
“?!”
지혁은 깜짝 놀랐다.
‘뭐지? 불과 몇 시간 전에 한 얘기인데.’
“무역팀에서 우연히 얘기 들었거든요. 아니죠?”
지혁은 유 실장과 백 과장을 떠올렸다.
‘유 실장이 무역팀 가서 떠들 리는 없고······ 백 과장이군.’
어쩐지 상품전략실에서 셋이 한 얘기가 이상하게도 소문이 잘 돈다고 생각했었다.
“심 팀장님 아니면 지혁 씨 둘 중의 한 명 이동할 거라면서요?”
“아니, 거기까지 알아요?”
“지금쯤이면 다 알 걸요.”
‘백과장······ 보통 스피커가 아니었네.’
원래 회사라는 곳이 소문이 잘 돌긴 하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했다.
‘다음부터는 유 실장과 중요한 얘기할 때는 백 과장 없는데서 해야겠군.’
황 대리는 지혁의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네?”
“심 팀장님 내보내려고 하는 거잖아요. 팀원에 의해서 내쳐지는 모양새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소문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제안을 한 제공자가 심 팀장이며, 당연히 지혁이 나가게 될 거로 생각할 것이다. 팀장과 팀원이니까.
하지만, 황 대리는 지혁을 잘 알고 있다. 용의주도하게 일을 계획하여 냉정하게 실행한다는 걸.
“심 팀장님도 불쌍하잖아요.”
“······.”
“아무리 지혁 씨한테 모질게 굴었어도. 그분도 가족이 있고······.”
“그만.”
지혁은 황 대리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짜증 나는 얼굴로 황 대리를 바라봤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복수나 하려고 이러는 줄 알아요?”
“······.”
“영역 싸움이었고, 서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난 목표가 있으니, 올라가야 하고······.”
지혁은 말을 더하려다가 멈추었다. 약간 흥분해서 불필요한 말까지 할 뻔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 ‘가족’ 얘기는 하지 맙시다.”
“네?”
“세상에 가족 없는 사람 있어요?”
“······.”
“황 대리님은 알에서 태어났습니까?”
지혁은 황 대리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신파적인 얘기는 집어치우자고요. 아니, 남의 가족 사정까지 봐주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뺏기고 빼앗는게 세상인데. 상대방 가족 생각해서 내 가족은 굶길 수 있는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가족’이라는 단어는 지혁에게 아픈 고리였다.
“그냥 할 일을 하고, 맞서야 할 때는 싸우는 거지. 가족은 내 가족만 신경 쓰자고요. 오지랖 떨지 말고.”
황 대리는 지혁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아, 내가 뭐 그렇게 말실수를 심하게 했나. 왜 이렇게 흥분하지.’
황 대리는 입을 꾹 다물었고, 지혁은 돌아섰다.
“갑시다.”
“네.”
몇 걸음 걷다가, 지혁은 멈춰서서 말했다.
“이미 다 아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건데, 심 팀장님과는 어제 만났어요.”
“······.”
“이건 본인이 선택한 일이에요.”
***
하루 전.
지혁은 선제공격 주의자였으나.
그래도 심 팀장에게는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팀장이니까, 지혁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왜 보자고 했어?”
심 팀장이 회의실로 들어오자, 지혁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
“명예롭게 가실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뭐?!”
지혁은 최근에 우연히 봤던,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시발남아”
“뭐?!”
심 팀장의 눈두덩이 떨렸다.
‘뭐? 씨발? 이 미친 새끼가. 이제 대놓고 욕을 하네?’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사자성어라던데. 모르세요?”
“사자성어?”
“지금의 심 팀장님께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씨발남아.”
‘시발남아(時發男娥)’
『때 되면 떠날 줄 아는 아름다운 남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