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성과를 보여주다 (3)
“이, 이 자식이······ 그래서 너······.”
심 팀장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구경하는 직원들로부터 얼굴을 숨겼다.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지혁이 가만히 있는 게 좀 이상하다 싶었었다.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설마 이것도 의도한 건가? 날 흥분시켜서 실수하게 만드려고?'
이런 생각이 들자, 심 팀장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야, 저분 심 팀장님 아니야?
-사람들 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서 어떻게 저런 짓을 하냐.
-원래 좀 저런 분이셔.
-이건 진짜 아니다. 너무 하잖아.
지혁은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피해자 같은. 근데, 사실 피해자가 맞긴 하다.
하지만 진짜 피해자가 누구라는 건 지혁과 심 팀장만 알고 있다.
꿀꺽.
심 팀장은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이대로 뒤돌아서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고, 일부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는 것도 봤다.
“하······ 젠장. 완전히 당했네.”
심 팀장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지혁에게 영락없이 일격을 당했다는 생각에.
피식.
지혁은 웃으며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끝난 것 같아요?”
“······.”
“이런 식으로 보내려면 진작에 보냈죠. 팀장님을 내보내는 게 내 최우선 순위가 아니에요.”
‘심 팀장을 이용한다.’
심 팀장 따위는 지혁의 방해물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냥······ 조그만 걸림돌 정도?
하지만 공존할 수는 없는 사이인 건 어쩔 수 없다. 필요한 만큼 이용을 한 후, 적절할 때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보내지 않아요. 깔끔하게 보내드려야지. 제 팀장님이신데.”
꿀꺽.
팀장이 팀원에게 도저히 들을만한 내용이 아니지만, 심 팀장은 꼼짝하지 못했다.
지혁에게 심리적 지배를 당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심 팀장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꽤 집요하다. 그래서 지혁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성큼. 성큼.
지혁은 몸을 돌려 구경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저희 팀장님과 업무 대화를 나눈 거였거든요. 격한 토론을 하다 보니, 적절치 않은 단어도 좀 나왔는데.”
일부 직원은 이 모습도 촬영하고 있었다.
“저 전혀 불쾌하지 않았고요, 문제 될 일 아니니까. 못 본 거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본 걸, 못 본 거로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촬영하신 분들 삭제해주시면 좋겠고요. 만약 삭제를 안 하시더라도 어디 올리거나 하지는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지혁이 만인 앞에서 감싸주니, 심 팀장은 한층 더 병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젊은 거 보니까 사원인 거 같은데, 착하네.
-도대체 누가 누굴 챙기는 거야.
-심 팀장님이 그런 사람인 건 다 아는데.
수군거림 중에 지혁이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도 있었다.
-저 사람 요즘 말 많은 복직자잖아.
-최근 상품기획팀에서 샤우팅이 끊이질 않아서, A 구역 직원들 일하기 힘들다던데.
-난 소문 듣고 저 사원이 이상한 줄 알았지. 괜찮은 거 같은데?
-심 팀장······ 역시는 역시다.
지혁은 내심 웃었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네. 이미지 쇄신까지 하게 될 줄이야.’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자자, 이만 일 하러 가보세요. 저희도 갑니다.”
지혁은 구경하던 사람들을 보낸 후에 심 팀장에게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심 팀장님 가시죠.”
“응? 어어······.”
심 팀장은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지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
“황 대리님, 리오더 잘되고 있는 거죠?”
지혁과 황 대리와 함께 대성실업에 가는 중이다. 김진아 과장에게 팍스버거 콜라보 입고 제품을 주기 위해 나선 것이다.
지혁은 거의 매일 외근을 했다. 이젠 외근 안 하는 날이 이상할 정도였다.
“네, 아직 이상 없어요.”
“끝까지 이상 없어야 해요.”
“근데, 자연재해 등 불가피한 일이 생기면 어쩔 수가 없어서······.”
“만약 그런 일 생기면 숨기지 마시고, 저에게 바로 상의해주세요.”
황 대리는 이 말에 살며시 웃었다.
그는 지혁의 이런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보통 기획자들······ 아니 회사원들은 문제 되는 상황은 아예 듣고 싶어 하질 않고, 꼭 나중에 일 터지고 나서 지랄한다.
황 대리는 지혁이 가자고 해서 일단 따라나서긴 했는데, 궁금했다.
“근데 보통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팍스버거가 바이어는 아니잖아요? 뭘 입고 샘플까지 가져다주나요? 그것도 직접.”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함께 수고한 사이잖아요. 결과물이 나왔으면 공유해야죠.”
황대리는 좀 이상했다.
‘지혁 씨가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었나?’
“특별한 걸 하는 게 아닙니다. 전리품은 나누고, 공적은 명확하게 하는 게 기본이죠. 이 정도도 안 지키면 동료가 적이 될 수도 있어요.”
비유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되었다.
“아······ 네.”
어느덧 대성실업에 도착했고, 김진아 과장은 로비 앞까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지혁과 황 대리를 맞았다.
“황 대리님도 오셨네요?”
황 대리는 얼굴이 약간 붉어져서 대답했다.
“하하. 네, 그렇게 됐네요.”
그때, 지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꼭 같이 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김진아 과장님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그랬나?”
흡!
갑작스러운 지혁의 말에 황 대리는 화들짝 놀랐고. 김진아 과장도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어, 언제 그런 말을?!”
“그럼 아니에요?”
지혁의 물음에 황 대리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닌 건 아니지만······.”
김진아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들어가시죠. 저도 두 분 오셔서 좋아요~”
미팅 실에 들어간 후, 지혁은 가방에서 팍스버거 입고샘플을 꺼내었다.
“어머.”
김진아 과장은 샘플을 보고 놀랐다.
“너무 이뻐요~ 와~ 옷 잘 나왔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황 대리는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혁만 무표정이었다.
“근데······ 설마, 이거 때문에 오늘 오신 거예요?”
“네.”
“······.”
“드리려고 가져온 거니까. 가지시면 돼요.”
김진아 과장은 감격한 눈빛이었다. 지혁은 약간 부담이 느껴져서 말했다.
“함께 고생하셨잖아요. 입고샘플 정도는 드려야죠. 뭐, 회사가 가깝기도 하고요.”
“고마워요.”
김진아 과장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 처음이에요.”
“이게······ 챙겨준 건가.”
지혁의 혼잣말에 김진아 과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급할 때만 친한 척하고, 일 끝나고 나면 돌아서 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지혁은 김진아 과장의 눈빛을 읽었다. 이 사소한 일로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 같았다.
‘오늘 생각지 못한 수확을 여러 번 얻네. 별것도 아닌 일에······.’
이상하게도 지혁 주변에는 한번 마음 열기가 어려울 뿐, 일단 마음이 열리면 고속도로인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인연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김진아 과장은 시계를 본 후 말했다.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인데, 두 분 함께 저녁 식사 어떠세요?”
“네?”
지혁은 생각지 못한 제안에 반문했는데.
“하하~ 좋죠~”
황 대리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대답했다.
지혁은 황 대리가 김진아 과장을 어떻게 생각 하는지 첫 만남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수고한 조력자를 위해, 좋은 일 하나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김진아 과장의 안내를 따라, 회사 근처의 횟집을 갔다.
이번에도 지혁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황 대리와 김진아 과장은 달렸다.
황 대리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영양가 없는 말만 뱅뱅 돌릴 뿐,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시간은 자꾸 가고, 보다 못한 지혁이 나섰다.
“황 대리님 애인 있어요?”
“네? 아유~ 없죠~ 솔로로 지낸 지 오래됐어요.”
지혁은 김진아 과장을 바라봤다.
“과장님은요?”
“호호, 저도 혼자에요.”
“그렇군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네? 어머. 호호. 숙녀 나이를······.”
“뭐 어때요? 술자리인데.”
술 한 방울 안 마시는 지혁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33이에요. 좀 많죠~”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황 대리님보다 한 살 많으시네?”
“네? 아, 네.”
지혁은 대뜸 황 대리에게 물었다.
“황 대리님 연상 어때요?”
“네?!”
그는 놀란 눈으로 지혁과 김진아 과장을 돌아보았다.
‘지혁 씨는 연애도 돌직구인가.’
“왜요. 싫어해요?”
“아! 아니요!”
“그럼 좋나요?”
“네? 아······.”
황 대리는 김진아 과장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당황한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좋죠~ 뭐~”
“그럼 됐네. 두 분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지혁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아 과장님, 황 대리님이 과장님께 관심 있는 거 같거든요?”
“······.”
“기회 한번 주시죠.”
“뭔 기회를······.”
“황 대리님 나쁜 사람 아니니까요.”
지혁은 간단히 인사하고 일어났다.
“전 아내 만나러 이만 먼저 일어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져 있는 두 사람을 두고, 지혁은 자기 갈 길 갔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메시지 : 황성준 대리’
황 대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지혁씨, 오늘 고마워요. 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답문을 보냈다.
[별말씀을.]
***
팍스버거 콜라보 제품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입고된 첫 주차에 주간 판매율 60%를 넘기며 대박 조짐을 보이더니, 예상대로 2주 차 접어들자마자 완판(완전판매)되어 버렸다.
‘정상가 판매율 98%.’
일부 협찬과 불량 제품을 제외하고 모조리 다 팔아 버린 것이다.
매출만 좋은 게 아니라, 팍스버거 콜라보는 마켓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고객들은 물건을 찾느라 난리였다.
물건이 있기만 하면 팔리는 건데, 없어서 못 파는 아쉬운 상황이 이어졌고.
이 히트상품을 기획한 ‘오지혁’ 사원은 여기서 한 번 더 터트렸다.
‘리오더 1차 입고 완료.’
가뭄에 단비 같은 리오더 제품이 재입고된 것이다.
재입고된 제품 또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스타덕 연간 히트 상품의 여러 기네스를 갈아치웠다.
그냥 난리였다.
팍스버거 콜라보 제품이 워낙 잘 팔리니, 덩달아 다른 제품들까지 잘 팔리는 기현상이 일어났고.
선도물산의 스타덕은 7월 내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도물산 패션 영역 임원회의’
대표이사가 직접 주관하고 실장급 이상의 임원들이 참석하는 선도물산 패션 영역의 최고 회의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대표이사가 말했다.
“이상 회의 마칠게요. 마지막으로 상품 본부장님 일어나시죠. 오늘 고려일보에 기사 뜬 거 다들 보셨죠? 이건 진짜 축하 받을 일입니다. 모두 박수 한번 주세요.”
상품 본부장은 일어나면서, 상품 전략실장도 함께 일으켜 세웠고.
짝. 짝. 짝.
임원들은 상품 본부장과 상품전략실장인 유 실장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유 실장은 임원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지혁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