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래봐야 거기까지 (1)
똑. 똑.
“들어오세요.”
덜컥.
심 팀장은 환한 얼굴로 유 실장 사무실에 들어왔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부르셨습니까.”
“심 팀장. 이쪽으로 앉아요.”
“네! 실장님!”
어느 때보다 밝고 씩씩한 목소리.
팀원들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꼬랑지 살랑거리는 강아지 같았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래요?”
심 팀장의 빈말에 유 실장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살쪘다는 의미인가?”
“네? 아······ 하하. 아니죠. 피부가 좋아지신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한가해 보인다는 뜻인가?”
“······.”
심 팀장은 유 실장의 답변을 들으며 그의 감정을 파악했다.
‘안 좋은 일로 부른 거군. 말을 아껴야겠어. 무슨 일 때문일까.’
분명 유 실장이 날카로운 말들을 던질 것이다. 심 팀장은 그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평소의 4배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심 팀장.”
“네.”
“이번 팍스버거 콜라보 건 말이에요.”
‘팍스버거’
그 단어가 비수가 되어 심 팀장의 가슴을 찔렀다. 곧바로 ‘지혁’의 이름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잘 마무리 된 거로 확인했는데.’
“그거 옷 봤어요?”
“네?”
옷을 보진 못했다.
그냥 무사히 입고된 거로 전산으로 확인만 했을 뿐.
심 팀장은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의중이 파악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못 봤습니다.”
“못 봤어?!”
유 실장이 눈이 도끼눈으로 변했고.
꿀꺽.
심 팀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유 실장은 책상 위에 있는 팍스버거 바람막이 점퍼를 신경질적으로 건네었고, 심 팀장은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아니, 옷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선도물산이 팍스버거 하청 업체입니까?”
심 팀장은 옷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 좀 심하긴 하네.’
전혀 스타덕의 제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중점 있게 보고 있다는 걸 알 텐데, 팀장이 제품 확인도 안 하고 말이야.”
“······.”
“아니면 몰랐나요?”
“죄송합니다.”
유 실장은 바람막이 점퍼에 달린 메인 라벨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거 봐요. 이거! 어떻게 스타덕 메인 라벨 달고 이딴 옷이 출시 되냐고요.”
“······.”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요. 왜 이 중요한 걸 지난주에 복직한 사원이 맡아서 했는지!”
팟!
순간 심 팀장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했다.
대기업에서 20년을 굴러온 짬밥이다.
지혁으로 인해 요즘 어려워진 회사생활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라는 직감이 들었다.
“좀 실망스러운데요. 난 심 팀장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실장님······. 사실 제가 남 부끄러워서 말씀드리기가.”
“뭔데 그래요?”
“실장님이니까, 부끄럽긴 해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건데요.”
회의실에서 지혁과 마주했던 얘기까지 싹 다 할까 하다가, 그건 관두었다.
그 얘기까지 하면 심 팀장 본인도 감당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오지혁 사원이 병가휴직을 갔다 온 후 통제가 안 됩니다.”
“통제?”
“네, 일 욕심을 너무 내는데, 이번 일도 그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난 겁니다.”
“그럼 팀장 지시를 무시했다는 건가?”
심 팀장은 순간 눈알을 굴리다가, 이 질문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했다.
“본인이 정 하고 싶다고 하고, 윤 차장이 뒤에서 돕겠다고 하니 맡긴 것이죠.”
담당을 정할 때 괘씸하게 굴던 윤 차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앙금이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한 방 먹이니 속이 시원했다.
“아니, 그래도. 팀장이라면 합리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심 팀장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실제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면목 없습니다. 저도 팀장을 하면서 이렇게 통제가 안 되는 팀원은 처음이라.”
“······.”
“병가를 다녀왔다는 생각 때문에, 모질게 대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잠깐······ 정리하자면.”
유 실장은 심 팀장의 말을 정리했다.
“오지혁이라는 사원이 팀장의 만류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업무를 맡아서 했다는 거죠? 심 팀장은 책임질만한 지시를 하지 않았다는 거고.”
“왜 없겠습니까. 도의적인 책임은 있겠죠.”
심 팀장은 눈을 깔고 처연하게 대답했고, 유 실장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어디 내 말도 안 듣나 보자.”
유 실장은 심 팀장에게 지시했다.
“이번 콜라보 관련자들 전부 소집하세요. 윤 차장도.”
“네? 그걸 왜 제가.”
“도의적인 책임은 있다면서요?”
“······.”
“1시간 내로.”
심 팀장은 똥 씹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회의실.
상품기획 1팀 전원과 이승주 디자이너, 생산팀 황성준 대리. 총 7명이 모였다.
정 과장은 툴툴거렸다.
“아니, 도대체 왜 나도 들어오라는 거야? 콜라보 진행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장 과장도 짜증 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하여간, 뭐 문제만 생기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때려넣고······ 도대체 ‘장’이 왜 있는 건지.”
덜컥.
그때 심 팀장이 들어왔고, 장 과장과 정 과장은 입을 싹 다물었다.
심 팀장은 지혁을 바라봤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엔 평소와 달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지혁. 책임질 일 했으면 감당해야지.”
“지겹다 지겨워. 그놈의 책임 타령.”
“······.”
심 팀장은 마음속으로만 욕을 퍼부을 뿐, 표면적으로 지혁을 상대할 깜냥은 없었다.
‘넌 엿 됐어. 감히 날 뭐로 보고.’
덜컹.
유 실장이 들어왔고.
일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혁은 유 실장을 처음 봤다.
‘아, 하필 앞머리를 내리고 있네.’
그의 색은 볼 수 없었다.
오감을 발동하여, 그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의 표정과 분위기를 통해 유심히 봤다.
“누가 오지혁이지?”
“전데요.”
지혁은 손을 번쩍 들었다.
어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에 유 실장은 약간 당황했다.
‘안 쫄아?’
“흠!”
유 실장은 헛기침하고 말했다.
“자네가 상황설명 해봐. 왜 옷이 이 모양이 된 거지?”
대답하기 전 지혁은 생각했다.
‘잘 모를 때는 내 스타일대로 간다.’
유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기에, 지혁은 본인이 믿는 상식에따라 대응하기로 했다.
“일단 이해가 돼야 말씀드리겠는데. 옷이 어쨌다고 그러는 거죠?”
“옷이 개판이잖아!”
유 실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움찔했지만.
지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새끼 봐라?’
유 실장은 놀라서 심 팀장을 바라봤고. 심 팀장은 거 보라는 듯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팍스버거와 콜라보를 성사시키라는 오더를 받았고요. 그 오더를 완수했습니다. 옷 이쁘게 만들라는 말은 없었는데요.”
“······.”
“옷 퀄리티에 집중해야 하는 일이었나요?”
지혁은 차분했고, 유 실장은 흥분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게 어디 스타덕 점퍼처럼 보이나?”
“아니요. 팍스버거 사은품으로 보이는데요.”
“지금 반항하는 거야?”
“실제로 그렇잖아요.”
“뭐?”
유 실장은 반문했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판매용도 아니고, 이번 테스트 오더는 사은품이라고 하던데요.”
“······.”
“모르셨어요? 심 팀장님이 그런 건 보고 안 했나요?”
심 팀장은 흥분해서 말했다.
“보고 안 하길 뭘 안 해! 네가 나한테 얘기 안 해줬잖아!”
“보고하러 다가가면 계속 바빠 보이시길래. 관심 없는 줄 알았죠.”
유 실장은 심 팀장을 바라봤고, 지혁은 말을 이어갔다.
“틈만 나면 책임 얘기만 하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인제 와서 뭔 보고를 안 했느니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심 팀장은 당황했다.
‘이 새끼가 왜 갑자기 말을 길게 하지. 무조건 단답형이던 새끼가.’
불리한 상황에선 말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심 팀장은 가만히 있었다.
유 실장은 이승주 디자이너를 바라봤다.
“이승주 대리.”
“네.”
“자네는 담당 디자이너로서 이런 식으로 디자인 수정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건가?”
“그건······.”
지혁이 무서운 눈을 하고 나섰다.
“실장님, 저랑 대화 중이셨잖아요.”
“뭐?”
“이승주 대리한테 시선 돌리지 마시고, 저랑 얘기하시죠. 저분은 제가 요청한 대로 한 것밖에 없으니까.”
요청한 대로 했으나, 어쨌든 담당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수정을 한 것이다.
문책받는 자리에서는 굳이 지혁이 나설 필요 없는 일인데,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나섰다.
지혁에게서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고, 유 실장은 말을 멈추었다.
‘약속은 지킨다.’
지혁은 이승주 대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멀리 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절대 위기의 순간도 아니다. 이까짓 일에 신의를 어기면, 자기 세력을 만들지 못한다.
“오더를 완수하기 위해, 제가 독단적으로 한 일입니다. 책임을 묻고 싶으면 저한테만 얘기하시면 돼요. 뭘 어떻게 해드릴까요.”
유 실장은 뒤는 보지 않고 달려드는 지혁이 이상해 보였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지혁으로서는 이까짓 회사 잘려도 상관없었다. ‘그 세계’에서 배워온 칼 솜씨도 있고, 어디서든 돈 버는 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오 부회장의 ‘색깔’을 봤고, 오너를 바꿔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이 정도로 참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임원급 실장이라 해도 마음대로 정규직 직원을 어쩔 수는 없을 거야. 회사를 위태롭게 할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
또한 이걸 진짜 위기로 보지 않은 것도 있다.
유 실장은 몸을 돌리고 말했다.
“부서로 돌아가 있어. 어떤 처분을 내릴지는 알려줄 테니.”
지혁이 너무 꼿꼿했고, 유 실장은 이 많은 인원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
뭐라도 해야 했다.
***
“실장님, 아무리 따져봐도 잘 못 한 게 없습니다.”
“······.”
“지시 불이행을 한 것도 아니고, 금전 취식을 한 것, 강압에 의한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백 과장은 적당한 징계를 내리라는 유 실장의 지시에 여러 가지 사안을 대보았지만, 딱히 없었다.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켰잖아.”
“판매되는 제품도 아니고요. 틀어질 뻔한 일을 성사시켰는데,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하기가······.”
“디자인이 말이 안 되잖아!”
“우리 회사는 팔기 위해 디자인을 하지, 패션쇼 올리려고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유 실장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자네 지금 나 놀리나?”
“실장님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수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요.”
유 실장은 입술을 뜯었다.
‘뱉은 말이 있는데, 아무런 조치도 안 내릴 수는 없고. 흠······ 딱히 인사 기록상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경고장이라도 날려.”
“내용은 어떻게.”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얘기해줘야 하나? 그럼 참모가 왜 있나?”
“······.”
“본대로 느낀 대로 작성해서 인사팀에 요청해! 오지혁이한테 경고장 날리라고.”
백 과장은 난감했다.
‘제기랄, 소설을 쓰란 얘긴데. 잘못 한 게 있어야 뭘 쓰지.’
“휴우-”
“자네 지금 한숨 쉬었나?”
“아닙니다. 지금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1시간 뒤.
백 과장은 유 실장을 찾아왔다.
“뭐야? 왜 빈손이야?”
경고장을 가져온 거로 생각했는데, 백 과장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게. 좀 이상합니다.”
“뭐가?”
백 과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인사팀에서 경고장 발부 못 한답니다.”
“뭐?! 왜? 자네 내용을 약하게 적은 거 아니야?”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오지혁 사원에게는 경고장 날릴 수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