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작지만 중요한 일 (2)
“그렇게 막 약속해도 돼요?”
김진아 과장은 지혁이 의심스러웠다. 가슴 FG(그래픽) 건으로 선도물산 상품전략실과 여러 차례 의견이 부딪쳤었다.
근데 갑자기 담당이라며 나타나서, 이런 식으로 쉽게 수용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저는 선도물산에서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으로 이 자리에 왔어요.”
“······.”
“뻔한 질문은 안 하셨으면 해요. 바쁘시다면서요.”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김진아 과장은 약간 위압감을 느끼긴 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도리어 좀 확신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추가로 얘기하자면, 가슴에 들어가는 팍스버거 로고는 재귀반사 나염으로 했으면 합니다.”
순간, 지혁은 당황했다. ‘재귀반사’는 모르는 용어였다. 생존으로는 5년을 넘게 굴렀으나, 업무경력은 겨우 1년. 그것도 오늘이 복직한 지 이틀째다.
좀 모양 빠지긴 했지만, 체면보다는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했다.
“재귀반사가 뭔가요?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
“상품기획 하시는 분이 그걸 몰라요?”
“······.”
“어두운 곳에서 빛 받으면 은색으로 반짝이는 거 있잖아요.”
“아, 뭔지 알겠네요.”
지혁은 곧바로 수첩에 적었다.
“재귀반사 알겠고요. 또 원하는 게 더 있나요?”
김진아 과장은 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좀 달라 보여서 긴장했었는데, 그냥 신입사원이네.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원하는 걸 다 해주겠데?’
“더 없으세요? 편하게 얘기하셔도 되는데.”
“오가닉 원단이라고 있던데.”
“오호, 원단까지.”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적었고, 김진아는 속으로 웃었다.
‘회사 가서 난리 나겠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난 당신이 해준다고 해서 말하는 것뿐이니까.’
원래 쟁점은 ‘가슴에 로고 들어가는 것’ 하나였는데, 김진아 과장은 옷 전체에 대해 별의별 요구를 다 하기 시작했다.
지혁은 그녀의 요구를 한참을 들으며, 계속 필기했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났고, 30분이 더 지났다.
“꽤 요구사항이 많으시네. 더 있나요?”
“네, 얼추 다 말씀드린 거 같아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마지막으로 제품 출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 뒤요.”
“일주일?”
“네, 이게 마지막 요구사항이겠네요.”
지혁은 생각했다.
‘바람막이 점퍼 100장. 그게 일주일 안에 가능할까?’
업무 지식은 부족하지만, 상식적으로 봤을 때 디자인인 요소와 원가는 협조부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품을 만드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된다. 어르고 누른다고 해서 일주일 걸릴 걸 하루 만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잠시만요. 통화 좀 할게요.”
지혁은 바로 황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김진아 과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이 전혀 없진 않네.’
***
김진아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 폰으로 연결했다.
[지혁 씨~ 웬일이세요.]
황 대리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바람막이 점퍼 100장. 일주일 안에 생산 가능할까요?”
[네? 갑자기?]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세요.”
[그게 조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주일 안에는 어렵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데요. 원가는 상관없어요. 비싸도 돼요.”
[원가가 문제가 아니에요.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되는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원단 염색도 해야 하고······ 점퍼면 지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지퍼가 오래 걸리거든요.]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이번에도 상식적으로 생각한 후 말했다.
“자재를 만드는 것 말고, 만들어져 있는 걸 쓸 수는 없나요?”
[아······ 시장 원자재요. 잠시만요······ 흠······ 가능할 수는 있는데, 지퍼는 안 돼요. 지퍼는 사이즈 길이가 있어서 만들어진 걸 쓰기가 어려워요.]
“대안은요?”
[점퍼의 앞 여밈을 반드시 지퍼로만 하라는 법은 없죠. 바람막이 점퍼라면 썬그립으로도 가능하죠.]
지혁은 생각을 정리한 후 물었다.
“그럼, 썬그립 일주일. 지퍼 이주일 정도라고 보면 되나요?”
[자재 상황에 따라 봐야겠지만······.]
지혁은 인상을 구기고, 언성을 높였다.
“여지 남기려 하지 말고, 딱 잘라 말하세요. 황 대리님은 생산 전문가 아닌가요?”
사원답지 않은 위압감에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진아 과장은 약간 질린 얼굴이었다.
‘대리면 상급자 아니야? 어째 사원이 대리한테······ 이 남자 회사에서 뭐라도 되나?’
[흠!]
황 대리는 헛기침을 하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게 맞춰보겠습니다.]
“네, 끊을게요.”
지혁은 김진아 과장에게 물었다.
“지퍼 꼭 해야 하나요?”
“네에?!”
“통화하는 거 들으셨죠?”
“······.”
지혁은 김진아 과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콜라보라는 말이 우리나라 말로 ‘협업’ 아닌가요? 전 가능한 건 다 양보해 드렸는데.”
실제로 김진아 과장의 요구사항은 과했으나, 지혁은 다 들어준다고 했다.
“안 되는 것만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초능력을 발휘해서 이주일 걸리는 걸, 일주일 만에 만들 수는 없는 거니까.”
테스트 오더는 팍스버거 매장에 사은품 행사로 출시된다.
“일주일 뒤에 계획되어 있는데.”
“날짜가 더 중요하다면, 지퍼 말고 썬그립으로 하시죠.”
김진아 과장은 결정 못 하고 우물쭈물했고, 지혁은 그녀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답답하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대세에 영향은 없을 거 같은데. 사은품 행사라며.’
“저······ 팀장님께 보고드린 후 말씀을······.”
“저기요.”
지혁은 김진아 과장의 말을 끊었다.
“책임 때문에 그러시나요?”
“······.”
“어디나 마찬가지네. 새가슴 가진 인간들. 그러니 재앙 터지자마자 우왕좌왕하다가 다 뒤지지.”
“뭐라고요?”
중얼거리듯 한 혼잣말에 김진아 과장이 되물었지만, 지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날짜가 중요해요? 퀄리티가 중요해요?”
“······.”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과장이라는 작자가 그것도 대답을 못 하나?’
“제가 봤을 때는 날짜가 중요할 것 같거든요? 돈 받고 파는 것도 아니잖아요. 고객이 제품 마음에 안 든다고 환불하러 오겠어요? 그리고 썬그립으로 디자인된 점퍼도 꽤 많아요. 야구 유니폼처럼요.”
“······.”
김진아 과장은 무언으로 대답했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 여밈은 썬그립으로 하겠습니다.”
지혁이 주도하는 분위기로 미팅은 끝났다.
“제품 준비되면 연락드릴게요. 이 시간 이후로 요구 사항은 안 받습니다.”
***
지혁은 바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내 ERP(통합정보시스템)로 담당 디자이너 이름을 확인한 후 디자인 개발실로 향했다.
저벅. 저벅.
‘꽤 지랄하겠지.’
디자이너는 당연히 디자인 수정을 싫어한다.
김진아 과장과 미팅을 통해 옷 형태만 빼고 다 바뀌게 되었다. 심지어 원단까지.
일이라는 건 여러 사람의 협업을 통해 이뤄진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망각한다.
그냥 자신의 것만 생각한다.
“이걸 다 바꾸라고요?”
예상했던 대로 디자이너는 난리를 쳤다.
“아니~ 이럴 거면 디자인을 왜 맡겨요. 그냥 직접 디자인하라고 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네?”
지혁은 디자이너를 누르기보다는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중요한 생존의 법칙 중 하나. ‘적을 만들지 않는다.’
즉, 적을 만들지 않거나, 혹은 없애거나.
‘그 세계’에서의 지혁은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으려 했고, 부득이 적이 생기면 이른 시일 내에 없애 버렸었다.
여기서 적이란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위협이다. 예를들어, 지혁은 심 팀장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밥이라고 생각하지.
“지금은 테스트 오더고요. 불가피한 상황이에요.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려 보이는데, 일 한지 얼마나 됐어요?”
지혁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이는 디자이너는 그를 위, 아래로 흩으며 말했다.
“윤 차장님이 담당이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김진아 과장과 대화할 때도 느꼈는데, 지금도 직급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다.
‘선입견을 갖네.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면, 승진부터 빨리해야겠어.’
지혁은 불필요한 얘기 하는 걸 싫어한다.
“어쨌든 상황 설명은 드렸고. 음······ 지금이 2시네요. 2시간이면 되죠?”
“네?”
“급한 건이니까. 우선순위로 해주세요.”
“명령하는 거예요?”
디자이너의 공격적인 어투에 지혁은 목소리에 힘을 줬다.
“아니요.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
“못 하겠으면 빨리 얘기하세요. 상품기획전략실에 담당 디자이너 바꿔 달라고 해야 하니까.”
지혁은 쌩하고 나가려다가.
‘아, 너무 셌나.’
돌아서서 다시 얘기했다.
“일 잘 풀리면 모른 척하지 않을 테니, 힘 좀 써주세요.”
***
오후 4시.
ERP(통합정보시스템)로 ‘생산의뢰서’가 업데이트되는 걸 확인했다.
담당 디자이너가 시간을 정확히 맞춘 것이다.
‘까랑까랑 하더니. 일 좀 하네?’
세 번째 눈으로 그녀를 보진 않았었지만.
‘디자인 개발연구실 이승주 대리’
지혁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생산의뢰서를 출력하여, 서명 후에 심 팀장 자리로 가지고 왔다.
“팀장님.”
“응? 어!어!”
지혁의 부름에 심 팀장은 화들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 뭐 재밌는 거 보고 계셨어요?”
지혁이 모니터를 보며 묻자, 심 팀장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 아니. 무슨 재밌는걸? 회사에서 일해야지?!”
심 팀장은 지혁의 몇 마디 말에도 바싹 긴장했다.
“반응 재밌네? 그냥 농담한 건데.”
“뭐······ 뭐?! 농담?”
‘농담’이라는 말에 팀원들은 일제히 지혁을 힐끔 바라봤다.
아침과는 달리 정 과장도 이젠 지혁이 편하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 지혁의 활약상을 점심 식사하면서 장 과장에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상품기획 1팀 모두가 지혁의 말과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아, 젠장. 심장 떨려. 내가 아래 직원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니.’
심 팀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팍스버거 콜라보 건이요. 생산의뢰서 완성되어 결재 받으려고요.”
“벌써?”
“······.”
“팍스버거랑 세부내용 협의 한 거야?”
“네.”
“자재는 뭐로 하기로 했어? 원가는 받아봤어?”
“······.”
“디자인실하고도 최종 확인 된 거지?”
“······.”
겨우 100장이지만, 중요한 오더라 그런지 심 팀장은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다.
막상 업무 생각을 하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잊은 모양이다.
“질문 더럽게 많네.”
“······.”
지혁은 질문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한다. 특히 이런 확인을 목적으로 하는 불필요한 질문은.
어차피 믿음이란 건,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물어서 대답을 들으면 믿어지나?
“그냥 결재나 하세요.”
“······ 뭐?”
“정 못 미더우면 직접 하시던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심 팀장은 두려움도 잊고, 순간 욱했다.
“야! 나 니 팀장이야. 팀장이 이 정도 확인도 못 하냐?”
“확인하면? 문제 생기면 팀장으로서 책임 져줄 건가요?”
“······.”
지혁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컨셉 좀 확실히 가져가요. 피곤하게 하지 말고.”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심 팀장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