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7화 (7/301)

7. 복직자 (2)

“뭐가 어째?”

심 팀장은 도끼 눈을 뜨고 지혁을 바라봤다.

“야 이, 미친놈아. 커피 믹스 타는 데 재능이 왜 필요해!”

심 팀장의 일갈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라봤다.

근데, 한번 쳐다보기만 할 뿐 다시 하던 일을 한다. 심 팀장이 소리 지르는 건 일상적이며,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당장 가서 뜨거운 물로 타와!”

예전의 지혁은 심 팀장이 불호령을 내릴 때면 눈을 아래로 깔면서 고개를 숙였었다.

잘못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상급자가 말이 곧 법이라고, 사십 대 후반의 꼰대 팀장에게 그렇게 배웠었다.

심 팀장은 그걸 미덕이라고 여겼다. 상급자의 잘못된 지시라도 일단은 해봐야 하는 거라고.

해봤는데 안된다는 걸 보고 한 후, 대안까지 제시해야 훌륭한 부하직원이라는 개소리를 심심찮게 나불댔었다.

‘상급자 기분 맞추려고 인력과 시간과 돈을 낭비해?’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렇게 상식적인 생각을 했었는데.

1년쯤 지났을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심 팀장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비굴한 표정만은 짓지 않았고, 항상 밝고 씩씩했다.

그 모습이 심 팀장의 눈에 유독 거슬렸었다.

“물 조절은 어떻게 할까요?”

“뭐?”

“뜨거운 물로만 탄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물 조절도 중요하지.”

“너 바보냐?! 그건 적당히 해!”

“적당히는 주관적인 표현입니다만.”

심 팀장은 지혁이 돌았나 싶어서,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었다.

하지만 눈빛이 또렷하고,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으며 표정 변화도 없었다.

“하아······ 종이컵의 반 정도. 됐냐?”

“종이컵도 크기가 여러 개 있거든요.”

“야 이, 개새끼야!”

심 팀장은 뚜껑이 열렸고.

의류 상품기획팀의 믹스 커피 때문에 A동 10층 전체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 그냥 지가 타다 먹지.

- 믹스 커피 타오라고 저런 지랄을 할까.

- 하여간······ 쯧쯧.

심 팀장의 도가 지나친 행동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에는 심 팀장의 면이 서지 않았다.

같은 팀 윤 차장은 계속 바쁜 척이었다. 다른 팀에서도 신경쓰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윤 차장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했다.

‘아유, 개새끼가. 이럴 땐 지가 나서서 중재를 해줘야지.’

어쩌다 보니 커진 상황 때문에 심 팀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취향에 맞게 타서 드세요. 간단한 일이에요.”

지혁은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심 팀장은 소리를 지를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심 팀장님.”

옆 부서, 상품기획 2팀장이 다가와 심 팀장을 불렀다.

지혁이 속한 의류 상품기획팀은 상품기획 1팀. 신발, 잡화를 총괄하는 상품기획팀은 2팀으로 불린다.

“아, 네. 팀장님.”

심 팀장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 금요일인데, 적당히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지혁은 그 남자를 바라봤는데.

앞머리가 이마를 가리고 있어서, 색이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 좀 낮추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커피 제가 타다 드릴게요.”

심 팀장은 얼굴이 새빨개 졌다.

“아, 아닙니다. 이 직원이 못 미더워서 제가 타 먹으려는 참이었습니다.”

심 팀장은 어금니를 깨물고 믹스 커피와 종이컵을 들고 일어났다.

***

상품기획 2팀장은 지혁을 힐끗 한번 본 후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1년 전 지혁이 기억하는 2팀장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윤 차장님.”

“응? 나? 잠깐만.”

윤 차장은 모니터를 향해 목을 쑥 내밀고, 미간을 찌푸리며 온갖 바쁜 척을 하다가.

탁!

그는 일부러 스페이스 바를 세게 누른 후 고개를 돌렸다.

“아~ 요즘 1/4분기 판매율 리포트 작성 건 때문에 정신이 없어~ 왜 불렀어?”

해맑은 표정으로 물어보는 윤 차장을 보며, 지혁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인간이 진짜 고단수지. 기회주의에 연기력······ 당장 ‘그 세계’에 떨어뜨려 놔도 살 놈이야.’

“2 팀장님 바뀐 거 맞죠?”

“응? 2 팀장님? 왔었어?”

“전 왔다는 말 안 했는데요.”

지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윤 차장을 바라보았고.

“흠! 흠!”

윤 차장은 민망함에 헛기침하고 말했다.

“6개월 됐나? 실적 부진으로 교체됐어.”

“어디서 오신 분인데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심 팀장님이 깍듯하게 대하는 거 보면,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기도 하고.”

“심 팀장님이 뭐 얘기 안 해요?”

“정보를 수집만 하지 공유하는 분이 아니잖아. 하하. 그새 까먹었구나?”

“흠······.”

잠시 후, 심 팀장은 빈손으로 나타났다.

“커피 마시고 왔다.”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지혁을 힐끔 본 후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 시간 다 되어 포니테일 헤어스타일에 은테 안경을 쓴 여성이 나타났다.

“미팅 다녀왔습니다. 어? 오지혁이 왔네?”

“안녕하세요.”

“그래. 축하해. 완치됐다며.”

“고마워요.”

그리고 끝이었다. 그녀는 지혁 못지않게 말수가 적었다.

장신지 과장. 상품기획 1팀에서 잡화 제품을 맡고 있다.

‘그래도 이 인간이 개중에 낫지.’

그녀는 적도 아군도 아니다.

시키는 거 하나는 잘하며, 본인 일 아니면 신경을 안 쓴다.

“근데 정성재 과장님은 안 보이시네요?”

심 팀장의 오른팔. 하이에나 같은 놈이 오늘 안 보인다.

“오늘 연차셔. 금요일이잖아.”

“그렇군요.”

심 팀장이 일어나며 말했다.

“난 점심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오지혁이는 다음 주에 정 과장도 있을 때 식사하자.”

“그러시죠.”

잠시 후, 윤 차장도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점심 약속이 있어서······ 오늘 식사는 둘이 같이해야겠는데?”

윤 차장이 나간 뒤, 장 과장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어쩌나. 나도 약속 있는데. 지혁 씨 같이 식사할 사람 있어?”

“혼자 먹어도 돼요.”

“미안해. 식사 맛있게 해.”

“맛있게 드세요.”

그들이 나간 뒤, 지혁은 창가에 섰다.

건물 1층 정문 앞에 만나서 함께 걸어가는 세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색하지 않았다.

1년 전에도 이랬으니까.

***

“지혁~ 식사 맛있게 했어?”

윤 차장을 선두로 세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갈 때는 따로 나가고, 올 때는 함께 들어오고.

“굳이 안 그러셔도 돼요.”

1년 만에 복귀한 팀원을 따돌리고 식사했다. 충분히 서운해 할만한 일이었으나, 지혁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은 밥 먹을 때 옆에 누가 있는 게 더 신경 쓰인다.

이제 그에게 식사는 그저 생존의 수단일 뿐이니까.

“뭐, 뭐가?”

윤 차장이 살짝 당황하여 되물었고, 심 팀장과 장 과장도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냥 처음부터 함께 나가시라고요. 뭘 그렇게 메시지 하고, 힘들게 시간 차로 나가세요.”

“······.”

윤 차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상품기획 1팀에는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서운해서 하는 말 아니고요. 저도 같이 먹고 싶지 않으니까.”

“······.”

“그냥 자연스럽게 세 분 손 잡고 나가시면 돼요.”

윤 차장은 고민이 됐다.

‘이거 알겠다고 대답을 해야 해. 말아야 해. 왜 하필 나한테 얘기를 해서는.’

항상 나이스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윤 차장은 자연스럽게 따돌리겠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지혁은 윤 차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은 들은 거로 할게요. 일 보세요.”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놀아나는 기분인데.’

지혁이 온 뒤로 사무실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주도권을 뺏긴 듯한 기분에 심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첫날이니까. 좀 두고 보자.’

상품기획 1팀은 오후 일과에 돌입했다.

***

총성 없는 전쟁터.

오전의 신경전은 모두 잊은 듯, 급하고 바쁜 일들을 쳐내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급한 일 뒤에 또 급한 일. 바쁜 일 뒤에 또 바쁜 일.

‘마치 전투 중에 끝없이 튀어나오는 적군 같네.’

일이 없는 지혁은 일하느라 정신없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다들 바쁜 와중에 혼자 일없이 가만히 있으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은 처음 부서배치를 받으면 뭐라도 하려고 우왕좌왕하고, 잡다한 일이라도 시키면 열심히 한다.

팀에서 막내며, 업무 경력 1년, 그리고 오늘 복직했다. 지혁은 신입사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오전의 일 때문인지, 지혁에게 일 시키는 상사는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지혁은 방해받지 않고, 계획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관찰’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엿듣고, 어조의 높낮이를 파악하면서 업무의 경중을 가늠했다.

사무실 안을 돌아보는 척하면서 모니터에 띄워진 자료, 메일 기록을 곁눈질로 살폈고.

공용 탁자 위에 놓인 보고 자료들은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지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알아야 전략을 짜니까.

탁!

심 팀장이 거칠게 탁자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과장, 이 자식은 꼭 연차 중일 때 사고를 쳐.”

“연락할까요?”

윤 차장의 물음에 심 팀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됐어. 급한 것만 지금 우리가 잡고, 월요일에 정 과장 오면 마무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심 팀장은 급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팀 미팅한다. 윤 차장이랑 장 과장 들어와.”

“네.”

세 사람은 미팅 실로 들어갔다. 지혁만 쏙 빼고.

피식.

지혁은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컥.

그가 미팅룸 안으로 들어서자.

회의를 시작하려던 세 사람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봤다.

“뭐야?”

심 팀장의 물음에 지혁이 대답했다.

“팀 미팅이라면서요.”

“뭐?”

“저도 상품기획 1팀인데요.”

“······.”

심 팀장과 지혁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급랭해진 공기.

2차전이 곧 시작될 거라고 예상되는 가운데, 갑자기 장 과장이 말했다.

“어? 영업 1팀에서 과일 가져가라고 연락 왔네요. 저 금방 갔다 올게요.”

윤 차장이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아, 이번에 매출 좋았다고 매장주님께서 보내셨다는 그 과일 말이지? 하하. 여자가 혼자 들기엔 무겁지. 내가 갔다 올게.”

“아니에요. 같이 가요.”

“그럴까? 팀장님,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철컥.

두 사람이 나간 뒤.

밀폐된 회의실 안에 심 팀장과 지혁만 남았고, 심 팀장은 잘됐다 싶었다.

‘잘 됐다. 기 좀 팍 죽여놔야지.’

심 팀장은 회의실 창 블라인드를 내렸고.

지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지혁, 너······.”

“잘됐네요. 안 그래도 심 팀장님이랑 단둘이 대화 좀 하고 싶었는데.”

“뭐?”

심 팀장은 키와 덩치가 큰 편이다.

한 대 칠 것처럼 도끼 눈을 뜨고 위협적으로 다가와 말했다.

“까불지 마.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너 회사생활 몇 년 했어?”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위험하실 텐데.”

심 팀장은 멈칫했다.

요즘은 핸드폰에 녹음 기능이 있어서, 직장 내 폭언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핸드폰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 좀 할까요. 녹음 하지 않고, 밖에 발설하지 않기로 하고요.”

심 팀장이 옳다구나 싶었다.

“너 깡 좋아졌다? 그래, 이 새끼야. 해봐~!”

심 팀장은 핸드폰을 거칠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지혁 또한 핸드폰을 올려놓으며, 심 팀장에게 먼저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쓰레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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