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억하는 색깔
[반갑습니다. 선도전자 부회장 오진양이라고 합니다.]
짝. 짝. 짝.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힘차게 박수쳤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한 명.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지만, 선도그룹의 리더는 바뀌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 오종건 회장은 아들 둘에 딸 둘을 두었고, 후계자 정리를 애초에 다 해놨다.
건강상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장남인 오진양은 오 회장에 뒤를 이어 선도그룹의 오너가 될 것이다.
[이번 경력 공채에 합격하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젠틀하다.
-말씀하시는 게 참 겸손해.
-자신감 넘치는 표정 봐봐.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얘기할게요. 저희 그룹은 모든 부분에서 1등을 해야 합니다. 최고만이 살아남습니다. 절대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최고들을 모셨고, 우리 회사가 1등을 견고히 하는데, 일조해 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말도 명확하게 잘했다.
어려운 수식어 써가며 말하지 않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관리 잘한 사십 대 후반의 매끈한 외모에 말투와 발음도 좋으니, 오 부회장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눈이 그를 쫓고 있는 와중에, 오직 지혁만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앞자리에서.
‘분명 같은 색이야.’
에이원 캠프의 캡틴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와 같은 색이었다.
분위기도 비슷하다. 캡틴도 그 세계에서는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칼도 잘 쓰고, 총도 잘 쏘고. 판단도 빠르며 단호했다.
한 마디로 난 사람.
누가 봐도 무리의 우두머리로는 제격이었다.
그에게서 보았던 보라색. 지혁은 처음에 그 색을 매혹적인 색깔로 봤었다. 리더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지닌 색으로 말이다.
근데 아니었다.
아포칼립스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에이원 캠프.
1년을 떠돌다가, 4년을 머문 캠프다.
아무리 인정사정없고, 이별이 일상인 세계라고 해도.
생사를 함께 하며 먹을 걸 나눠온 동료들이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몰살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게 다 그 인간이 캡틴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일이다.
지혁에게 있어 그 일은 트라우마다.
‘이 남자는 절대 안 돼.’
지혁은 자신의 눈을 믿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색을 볼 수 있었던 세 번째 눈을 말이다.
같은 색을 지닌 사람은 같은 행동과 결과를 가져왔다.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동료들의 몰살로 보라색에 대한 경험이 쌓였다.
절대 리더가 되면 안 되는 색을 지닌 사람.
지혁은 감았던 눈을 떴고.
마침 그를 주시하고 있던 오진양과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도그룹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두 남자는 서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우리 선도그룹은 시가총액 940조의 회사로서, 국내에서는 1위이며 세계 14위의 규모의 기업입니다. 창업주께서는······.]
오진양 부회장의 인사말이 끝난 후, 다음 강연자가 올라와 그룹 역사와 현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강연은 뒷전이고, 캡틴이 죽는 순간에 했던 마지막 한 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리 미래가 암울하더라도, 모르면 몰랐지 알게된 이상 동일한 실수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혁은 계속 필기를 하며 내내 궁리했다.
‘이 인간이 오너가 되면 안 되는데.’
오 부회장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각. 사각.
회사 소개를 하는 중에, 쉴 새 없이 필기를 하는 사람은 지혁말곤 없었다.
강연자는 그런 지혁이 거슬렸다.
보통 필기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열정적이라고 보지만.
지금은 필기할 타이밍은 아니다. 딴짓 중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떠들며 방해를 하는 건 아니라서 지적을 하기도 어려웠고.
그저 지혁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필 왜 가장 앞줄에 앉아서는······.’
[저희 선도그룹 상장사만 16개입니다. 우리나라 사업 전반에 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우리 그룹의 미래가 곧 대한민국의······.]
“질문 있는데요.”
필기를 멈추고 지혁이 손을 들었다.
“네?”
강연자는 황당했다.
회사 현황 설명 중에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에서는 특히 더.
“하면 안 되나요?”
‘오지혁’
강연자는 그의 이름이 적힌 명찰을 본 후 말했다.
“간단한 거면 지금 물어보시고, 긴 거면 설명 다 끝난 후에 하시는 게······.”
“총 직원 수가 어떻게 되나요?”
지혁은 강연자의 말을 끊고 물었다.
“직원 수요?”
“네. 선도그룹 총 직원 수요.”
“······ 그게 왜 궁금하죠?”
강연자의 고압적인 물음에도 위축되지 않았고, 지혁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냥 궁금합니다.”
강연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강단 옆 한 켠에 모여있는 인사팀 직원들끼리 수군거렸다.
-저 사람 누구야?
-부회장님 강연할 때도 내내 졸더니.
-오지혁이라던데. 복직자.
-아아, 배 대리님이 보낸······.
-팀에서 왕따였다고 하던데, 이해가······.
“흠! 제가 정확히 기억이······.”
강연자는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룹의 총 직원 수를 물어볼 줄은 생각 못 했었다.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현재 직원 수를 알고 싶어서 물어본 건데. 인터넷 쳐봐야 하나, 최근 건 안 나올 거 같은데.”
강연자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회사 대표로 입사자들에게 소개하러 나온 자리에서, 현황에 관한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 한다는 게······.
“혹시 그쪽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지혁은 강단 위의 강연자는 무시하고, 인사팀 직원들이 모여있는 자리를 향해 물었다.
이런 안하무인이 없었다. 지혁의 뒤에 앉은 경력직 입사자들이 민망해할 정도였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지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22만 명입니다.”
한 인사팀 직원이 대답했다.
지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22만 명······ 꽤 많네.”
선도그룹의 직원 수가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 못 했다.
‘그 인간 아래에 22만 명이 있다는 거잖아······. 의미가 있겠어.’
지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인사팀 직원이 다시 말했다.
“끝 단위까지 알려드려야 하나요?”
“아니요. 됐어요.”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 세계’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아니, 지혁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올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혁이 ‘그 세계’가 오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눈에 보이는 선명한 재앙은 막을 수 있다.
몰살 되었던 동료들을 다시 떠올렸고, 결국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그 세계’에서 떠돌아 다닌 지 두 번째 겨울을 지났을 때쯤.
갑자기 사람들의 이마를 보면 희미한 색깔이 보였다.
처음엔 희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보였고.
개인마다 채도만 약간 다를 뿐 비슷한 유형의 사람은 색이 겹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능력은 생존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어제 친구였던 사람이 다음날 통조림 하나 때문에 내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세상.
오로지 자신만 믿을 수 있고, 동물적 감각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했다.
공격을 당할 낌새가 느껴지면, 먼저 공격하는 게 상책이고.
이유 없는 호의를 받을 때는 칼을 손에 쥐고 있는 게 안전했다.
그런 세상에서, 색을 통해 어떤 인간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별의별 사람들을 만나면서 색상에 따른 사람의 성향에 대한 정보가 쌓여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을 보면서 믿을 놈인지 아닌지 수월하게 판단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적재적소에 맞는 사람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세 번째 눈’
지혁은 사람의 색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이렇게 불렀다.
앞머리를 내리거나, 모자를 써서 이마를 가리지 않는다면 어떤 놈인지 알 수 있다.
단, 처음 보는 색상만 아니라면.
[다음 분 자기소개 하겠습니다.]
신입사원은 오리엔테이션에서 평가를 받고, 서로 경쟁하지만.
경력자는 근무하는 부서까지 이미 배치가 되어 있고, 회사생활도 이미 해본 사람들이다.
그렇다 보니,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은 경쟁과 평가보다는 서로 익숙해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관계사 별로 모여서 한 명씩 자기소개하는 시간 중이었는데.
소개하러 나오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지혁의 눈은 그들의 이마를 쫓고 있었다.
‘먼저 조력자를 찾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선도물산 생산팀에 입사한 황성준 대리라고 합니다. 올해 나이는 32세고요. 이곳에 입사하기 전에는 미래상사에서······.]
웨이브 진 긴 머리에 밝은 인상.
주변 사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호오.”
지혁은 그의 이마에서 ‘흰색’을 본 후, 살짝 미소지었다.
모두 소개가 끝난 뒤, 사회자가 말했다.
“자 그럼, 이것으로 자기소개는 마치고요. 각자 자유롭게 다과를 즐기시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딱 한 가지 룰만 지켜주시면 되는데.”
‘룰’이라는 말에 경력자들은 하던 걸 멈추고 사회자의 입을 바라보았다.
“혼자 놀기 금지입니다. 하하. 그럼 이따 뵐게요~”
-하하~ 좋네~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이라 그런가? 확실히 달라.
-일로 오셔서 맥주 한잔하시죠~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지혁은 성큼성큼 눈여겨 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툭. 툭.
너무 저돌적으로 다가가다가, 옆 사람과 부딪히기도 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성큼. 성큼.
어느덧 황성준 앞에 왔다.
“응? 안녕하세요.”
그는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황성준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성준 씨?”
지혁은 눈도 깜빡 않고 그를 바라봤고, 성준은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지혁의 명찰을 본 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생산팀에 배치받은 황성준대리라고 합니다. 오지혁 씨? 반가워요.”
지혁은 웃지 않았고, 용건부터 말했다.
“황 대리님.”
“네?”
“저랑 좀 놉시다.”
“······.”
황 대리는 한눈에 봐도, 본인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지혁을 바라보았다.
***
“몇 살이나 드셨소?”
지혁의 저돌적인 대시에 이끌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놀자고 해서 왔는데, 전혀 그럴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지혁은 손가락으로 몇 번 셈을 해보고 말했다.
“28살이요.”
'그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보낸 시간이 다르니, 아직 좀 헷갈렸다.
“나보다 한참 어리네. 28살에 경력 입사를 해요?”
“전 신입으로 들어왔어요.”
“네? 신입? 여기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인데.”
상황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고.
말 한번 할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가 듣지 않도록 속삭이듯 말한다.
그리고 지혁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는데, 마치 AI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명찰 보면 이 회사 사람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봐도 이상해.’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혁은 황 대리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이 회사에서 성공하고 싶죠?”
“성공?”
“······.”
이 황당한 질문에 황 대리는 어이가 없어서 바라봤지만, 이번에도 지혁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뭔 질문이 이래? 대답해야 하는 건가?’
지혁은 가만히 있었고, 황 대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뭐, 그렇죠? 성공하기 싫은 사람이 있겠어요?”
황 대리는 웃었는데.
지혁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제가 성공하게 해줄게요.”
“네?”
‘신입이라며? 뭔 소리야?’
말 하는 게 좀 이상했지만, 지혁의 눈빛은 또렷하고,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냥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단, 나를 좀 도와줘야 겠어요.”
“도와요? 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