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60화 (360/361)

360화 블랙 타이드

1980년 12월 테헤란 공항.

삭풍이 부는 겨울, 도로를 가득 메운 600만 인파가 모여 있었다.

파리에서 온 망명객이 귀환하는 날.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마침내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테헤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에 모인 600만 인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알라!!! 이맘께서 돌아오셨다.”

“호메아니, 우리들의 진정한 지도자시여!”

무려 16년 만의 귀환이었다. 팔라비가 암 치료를 위해 해외로 외유를 나간 틈에 내무군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모스크의 토지 분배를 반대하던 율법학자들이 획책한 일이었지만,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졸지에 중동 최대의 교두보를 잃은 미국은 체스판에서 퀸을 빼앗긴 형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요? 호메아니가 멀쩡히 돌아올 때까지 뭐한 건가?”

“그럼 어쩌라는 거요?”

“차라리 비행기를 폭파시켰어야지!”

“미친 소리. 그랬다면 바로 전쟁을 하자는 말이 되는 거 아니오?”

이란 왕정이 전복되자 백악관에서는 긴급 비상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호메아니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즉시 굴프를 비롯한 미국 석유회사들의 자산을 몰수한 다음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이 항의를 해 왔지만 호메아니의 대답은 심플했다.

“적절한 보상? 그딴 건 없다. 석유는 알라께서 우리 이란에 주신 신의 선물이다.”

집권 2기를 맞은 맥거번 행정부는 곧바로 경제 제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호메아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CIA가 국정에 개입해 전 정권을 전복시켰다는 증거를 폭로해 버린 것이다.

각종 기밀 문건과 스파이 명단이 폭로되고 호메이니의 설법을 테이프로 녹음해 전국의 모스크에 뿌렸다.

“이것이 미제 놈들의 비열한 본질입니다.”

“아랍의 것은 아랍에게로!”

“미 제국주의자들을 내쫓고 권리를 쟁취하자!”

이슬람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자는 외침은 수많은 시아파 무슬림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사우디와 이라크 남부에서 수니파 세력 타도를 외치는 대규모 소요사태까지 발생하자, 소식을 들은 수니파 지도자들은 매우 격분했다.

“이,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성스러운 순례길에서 감히 피를 보게 하다니.”

“감히 이단 놈들이 혁명을 수출하겠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시아파가 혹세무민하기 전에 서둘러 저 반동 놈들을 때려잡아야 합니다.”

뿔난 아랍권에서는 이라크를 지원해 싸움을 부추겼다. 지하드를 외치는 이슬람 전사들이 이란의 국경을 넘자, 중동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라크-이란 전쟁 발발!]

[유가 급등. 배럴당 42달러, 사상 최고치. 중동 사태 최악으로 치달아……]

제2차 오일 쇼크가 일어나면서 배럴당 12달러였던 유가가 40달러까지 치솟았고, 물가 상승률이 44.3%까지 뛰었다.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던 국내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재무부, 한국은행 외환관리부 등은 상황실을 설치해 외환 보유고를 수성하려 했지만,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전쟁으로 중동 쪽 건설 경기가 위축되며 건설사들이 연쇄 도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이 증권가를 강타했다.

[미래그룹, 완전 공중분해 위기]

[미래 협력사 연쇄 도산 우려, 추락하는 한국 경제]

국내 최대 건설사인 미래그룹이 중동발 사태로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서아그룹과 강산건설 등 건설주가 동반 폭락하며 증권시장 전체가 요동치자, 청와대에서도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미래건설이 파산 임박이라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가?”

“지금 바로 긴급 수혈을 해야 할 정도입니다. 미래 건설에서 부도가 나면 가뜩이나 바닥인 국내 은행의 대외 신용도는 더욱 하락하게 될 겁니다.”

“안 됩니다. 남아 있는 부실 여신만 5,000억이 넘는 상황인데요. 각하, 외환 보유액이 위험 수위입니다. 이제는 지원할 여력이 없습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합니다. 미래그룹은 담보가 충분하니 일단 살리기만 하면…….”

“이보십시오! 그럴 만한 여유가 있어야지요. 달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건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각하! 미래가 뿌린 융통 어음만 지금 수천억 단위입니다. 지급 기일을 넘기면 금융대란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겨우 자금을 투입해 미래그룹의 부도 사태는 어찌어찌 막았지만, 곧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디스 등 신평사에서 국가 신용 등급을 떨어뜨리겠다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돈 꾸러 간 재무장관은 아직 연락이 없나?”

“죄송합니다. 각하. 아직은 없습니다.”

“큰일이구만. 이거.”

“외화 부채가 너무 많아 기업들 상당수가 지급 불능입니다.”

“기업들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얼마인가?”

“대략 20~30일 정도입니다. 최악의 경우, 디폴트 상태로 접어들 수도 있습니다.”

중화학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된 만큼 한국 경제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사실 이 정도 버틴 것도 용한 것이었다. 보물선 펀드 덕에 생긴 기대심리 덕분에 증권가 쪽에 생긴 버블이 경제가 무너지는 속도를 늦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그렇다면 국가 부도가 야기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방도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법도…….”

“IMF라고?

“나라가 망하게 내버려 두느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될 말일세. 구제금융 신청이라니. 그건 경제 주권을 포기하는 일이야!”

최한규는 극약 처방을 두고 망설였지만 사실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은행(WB) 등에 수소문해 봤지만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재계가 들끓었다.

“IMF라니. 달러, 달러가 필요해!”

“당장 현물을 매각하고 현찰을 확보하게. 어서!”

총선을 앞둔 상황에 생긴 엄청난 악재.

최한규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을 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여당 의원들이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큰일입니다. 외환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할 판이에요.”

“정부에서는 뭐랍니까?”

“뭐라긴요. 그냥 기다려 보라고 하지요.”

“아니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현 정부에서는 작금의 위기를 컨트롤할 능력이 없습니다. 디폴트까지 간다면 경제는 완전히 결딴날 겁니다.”

“그렇다고 한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팽배해진 상태인데요. 이렇게 계속 가다간 우리가 무조건 집니다.”

본디 야당인 국민 평화당의 인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도 경각심을 가중시킨 원인이었다. 소극적인 정치 참여를 약속하고 등장한 관제야당이었지만, 김공삼과 김중대의 인기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당의 중진이 된 이원석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총선이 문제가 아닙니다. 해외로부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부터 세워야 합니다. 최 대행은 지금 국가 수반으로서 대외적인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겁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까. 더 무게감 있고 연륜 있는 분을 모셔야지요.”

그 말에, 모인 의원들이 숨을 들이켰다.

“설마?”

“안타깝지만 국가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그날 새벽, 긴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었다. 헌법에 위배되는 범죄 의혹(월성재단 설립)을 통한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계엄 선포 등을 이유로 국회에서 최한규에 대한 탄핵 소추를 발의한 것이다.

탄핵에는 여당과 야당 인사를 포함, 총 230명이 가결에 참가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 탄핵 소추 의결서를 송달받은 최한규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 무슨 황망한 짓인가?”

“죄송합니다. 최 총리님.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탄핵 소추 의결서를 전달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원석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과 국정 파탄이라는 죄목에 한동안 말이 없던 최한규가 힘없이 대꾸했다.

“달리 할 말이 없군. 그렇다면 내 후임은 대체 누군가?”

“각하께서는 이 시간부로 직무 집행이 정지되니, 굳이 그 뒤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감히! 그게 무슨 망발인가? 각하께서 얼마나 노심초사를…….”

비서가 버럭 화를 냈지만, 최한규는 손을 들어 비서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미 대세가 넘어갔음을 깨달은 최한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권력이라는 그런 거지. 그렇다면 내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법과 원칙에 따라 처결할 생각입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심하게 대하진 말게.”

“……선처해 보도록 하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경호원과 함께 총리공관에서 쓸쓸하게 퇴장하는 최한규의 모습에, 이원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최한규와는 꽤 오랜 기간 정치적인 동지로서 지내지 않았던가.

비록 대의를 위한 일이긴 했지만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한숨을 쉬던 이원석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읊조렸다.

“난 약속을 지켰네. 강 회장. 이제 자네 차례야.”

한편 최한규 총리가 직무 정지 상태가 놓였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백경그룹에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의원이 큰일을 해 주었군요.”

“다행히 일단 급한 불은 껐군.”

최한규가 순순히 물러난 것이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물러나기 싫다 땡깡을 부렸다면 그때는 다 같이 피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해지펀드들을 이용해야지. 로비력을 총동원해 봐야 하지 않겠나.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아니, 그쪽에서 우리를 도와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러게요. 그놈들도 머리가 있으면 털어먹을 생각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재갑의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특히 소로스의 경우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초토화시킨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러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투자의 기본은 적은 돈으로 큰 효율을 내는 것이지. 이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환율 조작을 해 봤자 얻을 이득이 얼마나 된다고. 차라리 더 큰 먹이가 있다면 그걸 목표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런 게 있습니까? 그게 뭡니까?”

“앞으로 인양할 난파선이 고작 한 척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않겠나?”

강태준은 자신만만했다. 무안 외에도 이미 난파선이 있는 지역을 몇 군데나 찜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지펀드 대표자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후 얼마 되지 않아 희소식이 전해졌다.

[속보입니다. 현재 오일 쇼크로 고조되는 경제 위기에 대응해 미국 50억 특별 차관 지원에 합의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장기 체류 중인 김필중 총재는 미국의 통 큰 지원에 감사를 표하며 민정 이양에 성실히 협조할 것임을……]

김필중이 미국으로부터 특별차관을 가져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철완이 와락 신문을 구겼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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